[동서남북] ‘학폭’ 피해자의 사적 복수극이 흥행하는 까닭

이태훈 문화부 차장 2022. 12.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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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는 무용, 어른은 무능할 때
복수극 인기는 좌절의 다른 표현
대면수업 재개 뒤 ‘학폭’ 느는데
비극 다시 없게 막을 준비 됐나
지난 9월 22일 서울 서초구 푸른나무재단에서 열린 2022년 전국 학교 사이버폭력 실태조사 발표 기자회견에서 재단 관계자들이 학교폭력 추방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뉴시스

올해 한국에서 만들어진 넷플릭스 시리즈 중 최대 흥행작은 ‘지금 우리 학교는’이었다. 이 ‘K좀비물’의 출발점은 학교 폭력(이하 ‘학폭’)이다. ‘학폭’ 피해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개발한 약물에서 좀비 전염이 시작된다. 지난 3월 나온 티빙 시리즈 ‘돼지의 왕’에선 학폭 피해자가 성인이 된 뒤 어린 시절의 가해자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피의 보복을 벌였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우리 드라마에 복수와 피 냄새가 진동한다. 학폭 피해자의 사적 복수는 현실엔 존재하기 어려운 판타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판타지의 공간에서 피를 피로 갚는 ‘정의 구현’에 열광한다.

최근 공개된 웨이브 ‘약한 영웅: 클래스1′에선 왜소한 고교생이 ‘뉴턴의 물리법칙’ 등을 떠올리며 볼펜 한 자루로 가해 학생들을 응징한다. 올해 웨이브에서 새 유료 회원을 가장 많이 끌어모은 드라마. 디즈니+의 ‘3인칭 복수’에선 쌍둥이 여동생이 오빠를 살해한 학폭 가해자를 찾아 청부 폭력을 맡아주는 교내 동급생과 함께 복수에 나선다.

드라마일 뿐이라고 웃어넘길 일일까. 백성의 고통과 불만이 참던 속을 비집고 쏟아질 때, 광대가 저잣거리에서 악당들 곤장 치고 양반과 왕을 비웃던 것이 그저 옛날 일일까.

쏟아지는 학폭 피해자들의 사적 복수극 속에서 이들을 보호할 시스템은 없거나 무용지물인 것도 공통점이다. 어른들은 무능하면 다행. 오히려 폭력을 방관하거나 조장하는 걸로 그려진다. ‘약한 영웅’에서 경찰은 폭력조직이 친구를 감금한 장소를 알려줘도 나중에 경찰서로 오라며 그냥 돌아간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30일 공개 예정)에서 담임 교사는 경찰에 신고한 학폭 피해 아이를 또 때린다. “야, 교복 처입고 경찰서를 와? 친구끼리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신고를 해?” 피해 학생은 온몸에 가해자들이 지진 흉터투성이 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18년간 복수를 준비해 실행에 옮긴다.

코로나가 진정되고 전면 등교가 재개된 뒤 학교 폭력은 다시 늘고 있다. 10월 국정감사 때 교육부가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한 학기 만에 학교폭력 발생 건수는 1만7695건으로 이미 전년 전체(2만1928건)의 80%를 넘었다. 여전히 신체 폭력, 언어 폭력, 성폭력이 많지만, 강요, 금품 갈취, 따돌림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난다.

전문가들은 “학폭 피해자는 맞서지 못하고 계속 해를 입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죄책감과 싸우게 된다”고 말한다. 자존감이 무너진 자리에 사적 복수를 향한 욕망은 임계치를 넘어 끓어오른다. 쏟아지는 학폭 복수 드라마들은 그 끓어 넘친 욕망을 담아 보여주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뭐든 쉽게 잊는다. 10년쯤 전 또래 가해자들의 폭력에 시달리던 아이가 남긴 긴 유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저주저하던 사진이 한동안 세상을 휩쓸었다. 당시 중2 아들을 잃은 엄마는 학폭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여섯 개의 폭력’(글항아리)에서 “기자들에게 ‘지금 인터뷰로 끝내지 말고 10년, 20년, 30년 후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꼭 취재해 달라’고 말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가해 학생도 담임 교사도 여전히 사과 한 번 없었다. 작년과 올해엔 연예인과 운동선수들을 향한 ‘학폭 미투’가 쏟아졌다. 우린 또 쉽게 잊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돼지의 왕’의 동명 원작 애니메이션(2011)을 만든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11년 전의 디스토피아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말한다. 더는 비극이 반복돼선 안 된다. 더 이상 아이들이 사적 복수에 열광하지 않아도 괜찮은, 맘 놓고 다녀도 안전한 학교를 만드는 것은 여전히 어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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