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처음입니다만”… 에세이 작가 소설쓰기 붐

곽아람 기자 2022. 12.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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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소설가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작가 첫 소설.”

지난 10월 민음사에서 출간된 소설 ‘언러키 스타트업’ 띠지에 적힌 문구다. 이 소설은 출간 두 달 만에 초판 3000부를 거의 소화하고 중쇄를 앞두고 있다. 정지음은 등단 절차를 거친 문인이 아니다. 그는 성인 ADHD를 앓은 경험을 토대로 쓴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지난해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가 주관하는 ‘브런치북 대상’을 받았다. 민음사는 순문학 작품을 중점적으로 내왔지만 등단 문인이 아닌 작가의 소설을 망설임 없이 냈다. 김세연 편집자는 “정지음 작가의 브런치 게시물에서 코미디 성격이 강한 픽션 원고를 발견했다”면서 “등단 여부보다는 원고가 출간할 만한가를 기준으로 계약했다”고 했다.

소설가 진입 장벽이 낮아지고 있다. 예전 소설 시장엔 신춘문예나 문예지 문학상 소설 분야로 등단한 문인 작품이 주를 이뤘다. 간혹 연예인 등 이른바 ‘셀럽’이 쓴 소설이 출간되기도 했지만 팬들을 위한 굿즈 성격이 컸다. 그렇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에세이스트·교양서·논픽션 작가들이 쓴 소설이 쏟아진다. 에세이나 논픽션으로 출판시장에서 작가로서의 인지도를 쌓은 후 소설을 출간하는 것이 새로운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소설 ‘가녀장의 시대’(이야기장수)를 낸 이슬아(30)가 대표적인 예. 이슬아는 에세이·인터뷰집·서평집 등을 내며 활발하게 활동해 왔지만 소설은 처음이다. 잡지사 주관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지만 소설 아닌 에세이로 수상했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출간 한 달도 안 돼 1만부 넘게 팔렸다. 이연실 이야기장수 대표는 “요즘 독자들은 소설을 고를 때 출판사나 상의 ‘권위’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인가’ ‘재미있는가’를 중시한다”고 했다. “예전엔 에세이 작가가 소설을 쓰겠다고 하면 ‘매대를 옮기는 것은 신중히 생각하는 게 좋다’며 만류했다. 요즘은 편집자들이 먼저 소설을 써 보라고 적극 권한다.”

300만부 베스트셀러인 대중인문서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시리즈 저자인 채사장(41)도 지난해 말 소설가로 데뷔했다. 제목은 ‘소마’(웨일북). 동서양 문명이 융합되는 공간에서 고대·중세·근대 흐름을 통과하며 진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권미경 웨일북 대표는 “저자가 그간 다른 책을 통해 말해온 메시지를 좀 더 대중 친화적으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이 책은 2만부가량 팔렸다.

지난 10월 글항아리에서 나온 르포 소설 ‘황 노인 실종사건’도 등단 작가 작품이 아니다. 저자 최현숙(65)씨는 구술생애사 작가이자 요양보호사. 노인문제·돌봄노동에 대한 논픽션을 주로 써 왔다. 이번엔 소설을 통해 관심 주제를 확장시켰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은 “웹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소설 시장의 기존 문법이 깨졌다. 새로운 시장이 열린 만큼 새로운 작가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했다.

전통적인 문학관을 고수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비판적으로 보기도 한다. 에세이 작가들의 소설이 한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재가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느냐는 것이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이야기의 소비 방식이 바뀌고 있지만, 엄숙한 작품들이 설 자리가 좁아지는 데 대한 아쉬움을 보이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고 했다. 하지만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에 있는 작품을 써온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대,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시각이 출판계에선 우세하다. 출판평론가 한미화씨는 “사회 모든 분야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는데 소설이라고 해서 피해갈 순 없다. 이러한 흐름이 독자들에겐 다양한 선택지를, 한국 소설에 새로운 활기를 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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