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459] 트래펄가의 예수 그리스도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2022. 12. 2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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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월린저, 이 사람을 보라, 1999~2000년, 대리석 수지, 런던 트래펄가 광장 설치 장면, 사진 존 리디.

8m 높이의 거대한 좌대 끝에 위태롭게 선 창백한 이 조각은 영국 미술가 마크 월린저(Mark Wallinger·1959년생)의 예수상, ‘이 사람을 보라’다. 유대인들에게 제소되어 그 앞으로 끌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다. 아무리 봐도 예수는 지은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군중은 당장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아우성쳤고 빌라도는 그들의 강요에 굴복해 예수를 처형했다.

월린저의 조각은 1999년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네 번째 좌대에 설치됐다. 광장은 넬슨 제독이 1805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에 압승을 거두고 전사한 트래펄가 해전을 기리기 위해 1840년경 재정비됐다. 중앙에는 52m 높이 기둥 위에 넬슨상을 세웠고, 사방에는 이처럼 커다란 좌대를 두고 각각 국왕의 기마상과 장군상 두 기를 세웠는데, 그중 하나가 자금 부족 등의 이유로 줄곧 비어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왕립예술협회 주도로 현대 미술가에게 광장을 대표할 조각을 의뢰해 매년 교체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월린저의 조각은 160년 만에 마침내 네 번째 좌대를 채운 첫 번째 작품이다.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진 예수상은 반대편에서 압도적 크기로 보는 이를 짓누르는 왕의 기마상이나 위풍당당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군들의 거대한 청동상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 그러나 가시관을 쓰고 두 손을 묶인 채 어리석은 군중의 함성 속에 눈을 감고 홀로 고요한 예수가 네 번째 좌대에 올라서자, 그 큰 좌대를 꽉 채우던 나머지 인물들의 위대한 업적이라는 것이 오히려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닫게 됐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눈에 보이는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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