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에세이] 1㎏ 질량의 새로운 의미
어린 시절 우연히 다비식을 보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한 생을 마감한 이의 몸이 발화하는 장면은 슬픔과 허무, 현실과 신화가 공존하는 초현실적 풍경이었다. 육신의 불꽃이 하늘로 타올라 텅 빈 우주 속 빛이 될 것 같았다.
물리학도 몸의 질량이 빛이 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빛과 물질이라는 두 실체는 겉으로는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다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에너지에 의해 소통할 수 있다. 식물은 태양 빛을 전자의 질량으로 바꿔 생의 동력을 유지하지만 수많은 빛 알을 쏟아내며 소멸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다비식도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반인들은 E=mc²에 익숙하지만 아인슈타인은 m=E/c²을 통해 질량(m)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질량은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무게 합 같은 것이 아니다. 질량은 에너지(E)가 보여주는 물성의 한 측면이다. 예를 들면, 초침이 회전하는 시계는 작동이 멈춘 시계의 질량과 다르다. 시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둘 다 같지만, 부품들의 운동에너지, 응축된 용수철의 잠재에너지, 부품의 마모에서 발생하는 열에너지의 합은 엄밀히 말해 시계의 총질량을 변화시킨다. 질량은 내적 에너지 변화에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다.
반면 물리학자 플랑크는 파동으로 알려진 빛을 에너지 덩어리(quantum)로 취급하면서 양자론을 태동시켰다. 즉, 특정 주파수(f)로 떨고 있는 붉은 빛의 총에너지는 N개로 분절되어 있다. 따라서, 붉은빛의 총에너지(E)는 한 알의 에너지가 hf인 광자 N개로 덩어리져 있다(E=N·hf). 주파수와 에너지를 연결하는 플랑크 상수 h는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비록 광자는 질량이 없는 입자지만, 상대론과 양자론은 에너지의 관점에서 빛의 질량을 새롭게 부여한다(m=E/c²=N·hf/c²). 따라서, 빛을 가둔 통도 저울의 눈금을 움직일 수 있고, 지구도 사과처럼 빛의 질량을 당긴다.
흥미롭게도 에너지가 질량의 모습으로 드러나거나, 파동적 빛의 주파수 떨림이 입자적 덩어리로 바뀌는 식에는 광속(c)과 플랑크 상수(h)라는 우주적 불변의 값이 매개하고 있다. 상대론에 의하면 공간의 ‘길이’나 ‘시간’도 상대적으로 변하므로 불변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대신,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진공의 전자기적 물성을 대변하는 c가 새로운 불변의 기준이 된다. h는 미시세계 속에서 분절된 물리량의 최소 덩어리를 정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인간적 관점에서 c와 h가 불변의 기준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다. 경험에 의존하는 인간은 지구의 크기, 태양과 달의 주기, 견고한 금속 같은 숭배의 대상을 기준으로 길이 시간 질량의 기본단위를 정했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들도 변한다. 변하는 존재를 부여잡고 변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인간적 어리석음은 과학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라가 된 등신불의 육신을 숭배하듯 과학자들도 1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1㎏의 기준이 되는 합금 덩어리를 지켜왔다. 당연히 그 덩어리의 질량도 긴 세월 동안 변했다.
2019년 마침내 낡은 프랑스제 합금 덩어리를 버리고 ㎏의 새로운 기준이 정해졌다. ‘푸른 하늘’을 의미하는 세슘 원자 속의 전자가 뿜어내는 변하지 않는 특정 색깔(f=9,192,631,770㎐)의 빛 알 N=1.4755214×10
개를 통 속에 가두면 1㎏이 된다(m=N·hf/c²). 이 새로운 기준은 특정 국가의 권위에 대한 복종이나 변하는 물질 대상에 대한 집착이 아닌 원자 빛 c h 같은 중립적이고도 객관적인 우주적 불변에 기반을 두고 있는 셈이다.
삶에도 질량과 에너지가 있을까? 진리의 빛이 일상에 아무런 무게를 주지 못하는 삭막한 세상에서 우리는 외형적 물질 대상에만 집착하고 있지는 않을까? 역동성의 운동에너지, 침묵의 잠재에너지, 믿음의 결합에너지, 열정의 열에너지 같은 내면의 무형적 존재와 그 가치를 잊고 있지는 않을까? 또 한 해가 끝나가고 있다. 변하고 사라질 물질적 허무를 채워 줄 삶의 에너지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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