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주백의 사연史淵] 군사유산으로서 일본군 시설의 역사성과 장소성

기자 2022. 12. 20.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과거의 경험과
그에 따른 의미가 누적된
공간이 놓이게 된 터로
맥락과 이야기가 있는 곳
개발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공간의 역사·장소성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저런 논란과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문화재청은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은 역사 속서
그 공간과 관련된
사람과 자연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사천에는 경남 서남권의 항공운송을 책임지는 사천공항이 있다. 이 비행장은 1940년 문을 열었다. 일본군은 2년 후에 변변한 장비도 없이 몸으로 때우는 확장 공사에 주민과 학생을 동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장에서 통영중학교의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사소한 시비로 싸움이 붙어 조선인 학생이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 학생이 훗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이다. 1995년 장쩌민 주석과의 대화 도중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 강제동원으로 지어진 비행장과 동굴

김영삼처럼 동원된 학생은 부지기수였다. 해방 직전에는 ‘통년동원(通年動員)’이란 이름으로 노동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던 때도 있었다. 이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노무 작업장은 비행장이었다. 울산, 밀양, 포항, 경주, 부산 수영의 비행장은 그들의 땀이 배어 있는 곳이다. 심지어 포항의 토박이 가운데는 비행장 공사에 동원된 포항 사람이 많아 다른 지역에 비해 해외 징용 희생자가 적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도내(道內) 중심의 강제동원은 제주의 알뜨르와 교래리, 전남의 여수, 무안, 광주, 담양, 전북의 군산, 경북의 대구, 영천, 경기의 수원 비행장 등지에서도 확인된다.

동원된 이들은 사람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비인간적 처우에 항의하다 죽은 사람도 있었다. 형충이란 이름의 소년은 무안비행장 신설 공사에 동원된 지 3개월 만인 1943년 5월 사망했다. 배식이 부족한 현실에 항의하다 ‘구보다’라는 관리인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그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일본군은 비행장의 활주로를 중심으로 여러 시설물을 비밀스럽게 분산해서 은닉한다는 원칙이 있었다. 활주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 여기저기에 석굴 또는 콘크리트동굴 형태로 시설물을 지었다. 그러다보니 도시화된 오늘날에는 시설물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10여개나 되는 옛 광주비행장의 동굴이 대표적이다.

한 장소로만 치자면 충북 영동에 동굴이 가장 많다. 확인된 것만 89개다.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경성이 위태로우면 일본군이 전쟁 지휘부로 사용하려고 뚫었다. 경기도 부평에는 일본군 조병창이었다가 주한미군 보급기지였던 곳이 있다. 확인된 동굴 24개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미군의 공중 폭격이 있으면 무기를 만드는 시설을 옮기기 위해 경성의 학생까지 동원해 뚫었다. 이러한 동굴의 분포는 남·서해안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울산에서부터 부산, 거제, 진해, 남해, 여수, 해남, 진도, 목포와 그 일대의 섬들, 고창 그리고 군산까지 수백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 식민지 조선, 전략적 지위가 바뀌다

그런데 이들 시설물에 대한 공사는 특히 1944년 10월경부터 급속히 추진되었다. 대부분의 공사는 패전으로 미완성인 채 끝났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이때에 이렇게 많은 군사 시설물을 만들려 했을까.

핵심은 전쟁의 와중에 식민지 조선의 전략적 지위가 바뀐 데 있었다. 일본군은 전쟁터가 본토에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각도에서 식민지 조선이 필요했다.

사실 일본군은 1942년 미드웨이해전에서 패배하며 바다에서 미군에 확실히 밀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과달카날섬을 둘러싼 육·해·공 싸움에서도 미군에 패배함으로써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후 전쟁의 흐름은 바뀌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를수록 전선이 일본 본토에 가까워졌다.

이제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과 물자를 동원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이 건재하면 중국 대륙과 본토를 연결하여 본토의 고립을 막을 수 있었다. 또 일본군에게 식민지 조선은 본토의 항공기지와 부대들이 미군과 계속 싸울 수 있게 지원하는 후방 거점이었다.

한데, 1945년 들어 상황이 더 급박해졌다. 미군이 본토에 상륙할 현실적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일본군 대본영은 본토를 지키기로 결정하고 ‘본토결전’을 선언했다.

일본군이 예측하기에 미군은 한반도를 일본 본토 공격의 거점으로 활용하고자 제주도와 남·서해안의 군산, 목포, 여수, 부산에 상륙할 수도 있었다. 일본군은 어떻게든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고자 7개월 만에 75배나 늘린 7만5000여명의 병력을 제주도에 배치했다. 남·서해안에 동굴이 많은 이유도 접근해 오는 미군의 상륙함을 감시하고 저지할 기지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목포항과 여수항에 가면 그때의 기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행장 건설을 서두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본토의 항공부대가 보조로 활용할 수 있는 후방 기지가 필요했다. 해군만 해도 매년 3만명 이상의 조종사를 배출해야 했듯이, 일본군은 안정된 훈련공간이 필요했다. 광주와 군산 비행장은 거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 현대사와 얽힌 군사유산의 역사·장소성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은 38선 이남의 일본군 시설을 모두 인수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일본과 영국 제국의 식민 시설을 인수함으로써 세계 군사네트워크를 신속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미군은 용산의 캠프서빙고를 비롯해 자신이 운용하는 전국의 기지에서 한국군 창설을 지원했다. 그 결과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공군과 민간에서 사용하는 비행장 가운데 식민지 시기가 공간의 기원인 곳이 많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은 대부분의 비행장은 흔적이 없어지고 있다. 비행장 터는 애초부터 사유지였던 곳이 많아 견고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면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거용 고층 건물을 짓는 데 방해가 된 부산 남구의 거대한 해안포대나 여수의 수상(水上) 비행장 활주로처럼 우리 스스로 파괴한 것도 있다. 동굴은 거의 대부분 방치되고 있다. 이곳을 와인과 젓갈 저장고이자 관광지로 활용하는 충북 영동군의 사례는 예외적이다.

흔적이 미약한 곳일수록 역사적 기원조차 불분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한국공군교육사령부가 있었던 옛 대전비행장조차 ‘1945. 8·15 직전 일본군이 건설하여’라는 정도만 안내 간판에 쓰여 있다. 옛 광주비행장의 동굴은 1952년부터 1994년까지 육군 장교 80만여명이 교육을 받은 상무대의 훈련장이었지만, 그곳이 왜 언제 만들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2015년까지 없었다. 향토사, 지역사를 말하고 애향심과 지역의식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말해줄 장소의 흔적을 지워버리거나 해명하는 데도 태만했던 것이다.

장소는 과거의 경험과 그에 따른 의미가 누적된 공간이 놓이게 된 터를 말한다. 맥락이 있고 그래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공간이 놓이게 되는 장소 그 자체의 역사성을 제대로 알아야 장소성을 드러낼 수 있다. 장소성은 특정한 공간을 연출한다고 해서 표현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혼동하고 있거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지점이다.

공간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은 군사유산이 독립운동 관련이 아닌 데다 일본이나 미국, 곧 외국(인) 시설이라며 시비를 건다. 한국사인데도 외국사처럼 취급한다. 그래야 개발을 정당화할 수 있으니까. 특히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 도시 공간의 외로운 섬처럼 존재하며 도시인의 일상을 왜곡하는 곳이 자치단체에 반환될 때 자본의 유혹이 매우 강렬함을 자주 볼 수 있다. 역사를 제거해 버린 춘천역 앞의 레고랜드, 제거하려는 사람과 지키려는 사람이 갈등하고 있는 부평의 캠프마켓. 이와 달리 개발을 거부했지만 역사성을 지나치게 지워버린 부산시민공원과 맥락도 없이 용산국가공원의 역사성을 과다하게 강조하려는 일부의 움직임도 있다.

논란과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문화재청은 2013~2015년 때처럼 개괄 조사하지 말고 자기의식을 갖고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 우리의 시선은 역사 속에서 그 공간과 관련된 사람과 자연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집중하는 태도가 과정을 중시하는 자세이고, 현재의 시제를 반영해 기억을 재구성하며 그곳의 문화예술과 만나 미래를 말하는 접근이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