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만이 누군가를 지켜주는 건 아냐…나한텐 빛나는 네가 그래[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종교에서
윤리에서
거리에서
빛을
발견하고
또
빛을
낼 거라는
믿음
올해 크리스마스는 일요일이어서 공휴일이 하루 늘어나는 즐거움이 사라졌지만 매해 크리스마스는 공휴일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인 게 그리 당연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성을 띠는 크리스마스와 부처님오신날을 국가에서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해당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그저 공휴일이나 축제일로 지낸다고 해도 말이다. 한국과 달리 실제로 이슬람교나 불교 국가, 과거 사회주의국가는 물론이고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 또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아니다.
크리스마스나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지정할 만큼 우리는 종교적일까. 우리 어린이들은 신이나 종교와 관련해 어떤 체험과 인식을 하며 성장할까. 2021년 한국갤럽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종교인 비율은 40%, 종교별 분포는 개신교 17%, 불교 16%, 천주교 6%다. 대부분 조사가 그렇듯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했기에 어린이와 청소년의 종교인 비율이나 종교 분포, 종교관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전 조사들과 비교할 때 종교인 비율은 2004년 54%에서 2021년 40%로 감소했고, 특히 20·30대의 탈종교 현상이 가속화됐으니 현재 어린이와 청소년 세대도 앞으로 비슷한 양상을 띠지 않을까 예상해볼 뿐이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종교 예식이나 종교 공동체 활동이 제한되면서 그 양상이 더 급격하게 변화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를 주제로 한 문학작품은 다수의 어린이와 청소년 독자에게 별 의미 없는 이야기에 불과해진 걸까. 여전히 종교를 어린이와 청소년 삶의 주요 주제로 다루는 서구 아동문학 작품을 읽다 보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종교에는 신과 믿음,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탄생과 죽음, 존재, 윤리의 문제 또한 담겨 있기에 형이상학적 삶의 깊이와 다양함을 말할 수 있다. 작품마다 작가의 종교관이 담겨 있긴 하겠지만 대개 종교를 말하는 작품은 특정 종교를 설파하기보다 종교와 신앙 자체를 질문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8시에 만나!>(울리히 흄 지음·유혜자 옮김·현암사·2010)는 종교 주제이면서도 어린 연령의 독자도 충분히 즐겨 읽을 만한 동화다. 2006년 독일 청소년 아동문학상과 아동극 대본상을 수상했는데, 극본 역시 유명해서 한국에서도 종종 어린이 연극으로 공연된다. 2016년 제12회 서울 아시테지(ASSITEJ) 겨울축제에서 연극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생각거리와 재미가 어우러져 어린이와 어른 관객 모두에게 큰 박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키가 큰 펭귄 둘과 키 작은 펭귄 하나다. 둘은 하느님을 믿지만 하나는 하느님을 모른다. ‘하느님이 누구냐’는 키 작은 펭귄의 질문에 키 큰 펭귄 하나가 대답한다.
“하느님은 힘이 무척 세고, 엄청 크고, 위대해. 하느님은 규칙들을 많이 만들어놨는데, 그 규칙들을 안 지키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나. 그것만 빼면 하느님은 마음씨가 아주 좋아.”
“딱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기는 하지.”
키 큰 펭귄 중 한 펭귄이 말했다.
“그게 뭔데?”
키 작은 펭귄이 물었다.
“하느님은 눈에 안 보여.”
“그것 참 엄청 안 좋은 점이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실제로 있는지도 알 수 없잖아!” <8시에 만나!> 8~9면
결코 난해하지 않은 펭귄들의 대화에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사상과 계율에 이어 신의 실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까지 담겨 있다. 계속되는 대화에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키 작은 펭귄은 “하느님은 세상에 없어. 그건 나를 겁주려고 너희가 꾸며낸 이야기야. 난 하느님 같은 것 필요 없어. 지금까지 하느님에 대해 생각 한번 안 하고도 잘 살아왔어. 너희도 그랬잖아”(<8시에 만나!> 16면)라고 화를 내며 떠나간다. 키 큰 펭귄 둘만 멍하니 남았을 때 돌연 비둘기 전령이 날아와 엄청난 소식을 전한다. 큰 홍수가 날 테니 8시까지 노아의 방주로 오라고 하며 오직 둘만 승선할 수 있는 표를 주고 간다. 자기들만 살겠다고 떠날 수 없던 키 큰 펭귄 둘은 고심하다 키 작은 펭귄을 가방에 담아 방주에 오르고……. 방주 안에 몰래 숨어 지내면서도 신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다가 무사히 뭍에 내린 펭귄들은 깨닫는다. “맞아, 우린 수영할 수 있었지!”(<8시에 만나> 83면)
동화 <8시에 만나!>가 그리스도교 문화권 어린이 독자에게 익숙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모티프로 그리스도교의 신에 대한 여러 질문을 쉽고 명확하게 제시했다면 청소년소설 <신이 없는 세상>(피트 호프먼 지음·곽명단 옮김·돌베개·2011)과 <신이 죽은 뒤에>(윌 힐 지음·이진 옮김·비룡소·2021)는 질문을 한층 확장한다. <신이 없는 세상>은 블랙코미디같이 다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종교의 본질을 냉철하게 꿰뚫고, <신이 죽은 뒤에>는 지극히 어둡고 무겁고 진지하지만 끝내 빛의 세계에 다다른다. <신이 없는 세상>은 2004년 전미도서상, 미국도서관협회 선정 청소년 부문 최우수 도서, 뉴욕타임스 올해의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됐고, <신이 죽은 뒤에> 역시 2018년 북셀러 청소년도서상을 수상하고 카네기상과 에드거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호평을 받았다.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마음
<신이 없는 세상>에서 독실한 가톨릭 가정의 제이슨은 친구들과 함께 ‘열다리교’를 창시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종교는 지역마다 있는 커다란 물탱크인 급수탑을 신으로 믿는다. 급수탑의 다리가 열 개여서 ‘열다리교’라고 명명했다니 더욱 터무니없지만 바로 그 터무니없음이 기성 종교를 신앙 이전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제이슨은 종교를 이루는 신, 의식, 교리, 계율, 성직자와 신자, 그리고 헌금까지 창안하는 과정에서 기성 종교 제도를 구성하는 요소를 파악하고 그것을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이슨과 친구들의 ‘열다리교’는 ‘만들어진 종교’를 끊임없이 상기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두 가지를 비교하기 위해 설정된 상황이라는 점에서 마치 실험실의 대조군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제이슨의 아버지는 <칠층산> 같은 가톨릭 고전들을 권유하며 제이슨의 신앙을 되살리려고 애쓰다가 결국 자유를 허용한다. “열여섯 살이면, 스스로 선택하고도 남을 나이지. 이젠 어느 것도 강요하지 않으마. (중략) 세상에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종교가 많지. 넌 똑똑한 아이다, 제이슨. 네가 찾고자 하는 길을 찾아내리라는 걸 아빠는 알아.”(<신이 없는 세상> 259면) 제이슨이 과연 아버지의 희망을 배반하지 않는 길을 찾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불안에 갇히지 않은 건 정말로 다행스럽고 바람직하다. 부모의 종교를 한 치 의심 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고 회의할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질 때 존재 깊숙이 가닿은 진정한 신앙의 기회가 열릴 테니 말이다.
<신이 죽은 뒤에>는 ‘주의 군단’이라는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종교 집단에 소속된 열일곱 살 문빔이 ‘주의 군단’의 실체를 인식하면서 거기에서 탈출하고 생존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아기 때부터 ‘주의 군단’에서 자라며 철조망 바깥 세계를 거의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온 문빔에게 ‘주의 군단’은 자신의 세계 전부다. 그러니 ‘주의 군단’이 폭력적인 통제로 성직자 한 사람의 안위를 추구한 조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자신이 믿고 몸담았던 종교의 실상을 확인하는 일일 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산산이 깨지는 일이다.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의 주춧돌부터 스스로 다시 세우고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극적인 상황으로 그려졌지만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기에 요청되는 과제와 근본적으로는 비슷할 것도 같다.
문빔의 서사는 정부 개입으로 ‘주의 군단’이 무너진 후 보호시설에서 지내는 ‘지금’ 상황과, ‘주의 군단’에서 지내던 ‘그때’의 회상이 계속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지금’ 헤르난데즈 박사의 심리 치료와 칼라일 요원의 조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매일 오전 상담에서 문빔은 ‘그때’를 회상한다. 문빔은 ‘주의 군단’을 의심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헤르난데즈 박사와 칼라일 요원을 처음부터 신뢰하지는 않는다. ‘주의 군단’의 또 다른 생존자인 허니가 “난 믿은 적이 없어. 나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생긴 뒤로는 다 헛소리라고 생각했어”(<신이 죽은 뒤에> 508면)라고 말하고 ‘주의 군단’에 잠입한 정부 요원 네이트가 “너 자신을 믿어. 네 눈과 네 머리를 믿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믿지 마”(<신이 죽은 뒤에> 380면)라고 강조했듯 탈출 이후의 세계에서 무엇을 믿고, 믿지 말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심한다. 상담 장면이 늘 문빔이 털어놓는 사실을 담은 대사와, 털어놓지 않는 진실을 담은 독백으로 구성되는 건 그러한 심리를 보여준다.
문빔은 탈출 직후에는 불신과 불안 때문에 “생각해. 생각을 하라고”(<신이 죽은 뒤에> 273면)라며 강박적으로 자신을 다그쳤지만 점점 새로 만난 세계를 신뢰해 나간다. “용기를 내. 적어도 너 자신에게만은 정직해야지. 지금까지 네가 들어왔던 거짓말들이 아닌, 진실을 대면하려면 강해져야지”(<신이 죽은 뒤에> 322면)라고 다짐하면서 자신을 신뢰할 때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안전한 세계로 들어간다. 이 책은 청소년이 주인공이기에 소위 ‘사이비 종교’의 실체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일에 그치지 않을 수 있었다. 종교를 포함한 세계를 회의적으로 인식하면서 안전한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고 구성하는 일은 청소년에게서 가장 뚜렷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 죽은 뒤에>의 종교 집단은 종교를 허울로 내세운 극단적인 경우지만 많은 사람이 믿는 오래된 종교조차 오늘날까지 여전히 사람들을 억압하고 옭아매기도 한다. 타인에게 폭력과 혐오를 일으키는 근거로 잘못 인용될 때도 있다. 물론 종교는 윤리로 환원될 수 없지만 폭력과 혐오의 근거가 되는 종교라면 옳고 그름을 떠나 우선 세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게 당연하다.
그림책 <당신의 빛>(강경수 글·그림·모든요일그림책·2022)에서는 종교와 윤리가 일치하는 장면을 중세 성화의 후광으로 상징한다. 무료 급식을 나누는 털보 아저씨의 머리에, 죽은 다람쥐를 묻어주는 여성 어린이의 머리에 달만큼 환한 후광이 비친다. “서로를 돕고 사랑한다면 모두 빛이 나는 존재가 될 거”라는 믿음, “밝은 빛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 빛이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거”라는 소망. 누군가는 종교에서, 누군가는 오늘날 시민 윤리에서, 누군가는 성탄을 앞두고도 춥기만 한 거리에서 그 빛을 발견하고 빛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어쩌면 그 빛에 대한 이야기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에게 더욱 필요할 것 같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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