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인력 7000명, 메모리 집중…정보 얻기는 ‘하늘의 별 따기’[아듀 2022 송년기획 - 기로에 선 K반도체]
전 세계 설계 엔지니어 18만7000명
경쟁 국가 대만도 1만명이나 돼
스마트폰 등장 이후 ‘칩 통합’으로
한국 유망 기업들은 설 자리 잃어
수도권 대학 전자공학과 4학년생 이경훈씨(25)는 올해 9월 반도체 설계회사인 팹리스에 설계(RTL회로 설계)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전자회로에 쓰이는 하드웨어 언어인 ‘베릴로그(Verilog)’를 이용해 반도체 작동 방식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이씨의 대학에서는 설계 강의가 많지 않았다. 대학 선배 중 설계 엔지니어로 취업한 이들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는 인도의 설계 엔지니어가 만든 유튜브 강의를 보며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다. 영상 속 설계 프로젝트 하나 하는 데만 2~3개월이 걸렸다. 그는 “인도와 달리 국내에선 설계 관련 정보를 얻는 게 쉽지 않다”며 “대학교수진 중에도 설계 실무를 아는 분이 없다보니 답답해도 물어볼 곳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19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와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세계 반도체 설계 엔지니어는 모두 18만7000명으로, 이 가운데 3분의 1인 6만명이 미국에 있다. 중국과 인도에선 각각 5만2000명, 3만5000명이 설계 엔지니어로 활동한다. 그러나 ‘반도체 강국’이라 자평한 한국은 7000명 수준으로 일본(4000명)보다는 많지만 대만(1만명)보다 적다. 게다가 국내 설계 엔지니어의 상당수는 시스템 반도체가 아닌 메모리 반도체 인력으로 추정된다. 한국에는 왜 비메모리 설계 인력이 적을까.
한때 국내에도 전도유망한 팹리스들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설립된 코아로직, 엠텍비전 같은 팹리스들은 삼성전자의 ‘연아의 햅틱’ 같은 피처폰에 들어가는 각종 카메라용 반도체 등을 설계하며 2000년대 초중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다양한 종류의 칩이 통합되면서 이들 기업의 칩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과거 잘나갔던 팹리스들이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적응에 실패하거나 투자 기회를 놓치면서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말했다. 국내 팹리스 산업이 성장하지 않으니 설계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이들도 줄었다. 한때 퀄컴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인 스냅드래곤보다 더 나은 성능을 보여줬던 삼성전자의 엑시노스도 2015~2016년을 끝으로 스냅드래곤에 밀리기 시작했다. 국내 팹리스 관계자는 “설계 인력 수에서 엑시노스를 만드는 삼성전자 시스템LSI사업부가 퀄컴에 크게 못 미친다”며 “쪽수가 좁혀지지 않는데 엑시노스가 더 낫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내 ‘디자인하우스’ 인력 태부족
수요 크게 늘어도 공급 못 따라가
반도체 설계 관련 정보 수집하려고
인도 유튜브 강의 보며 독학하기도
팹리스가 설계를 마치면 설계도는 ‘디자인하우스’로 넘어간다. 디자인하우스는 팹리스의 설계도를 TSMC나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공정에 맞도록 디자인하는 곳이다. 예컨대 디자인하우스의 설계(P&R 설계) 엔지니어들은 팹리스가 설계한 반도체 기능(중앙처리장치, 그래픽처리장치 등)들이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배치한다. 발열을 막고 전력 소모를 최소화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실제로 엑시노스는 발열 문제로 종종 홍역을 치러왔다.
과거에는 공대 전자공학과 등의 학부를 졸업한 이들이 약간의 훈련을 거치면 P&R 설계 업무에 투입될 정도로 난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반도체 선폭이 줄고 칩 하나에 다양한 기능이 들어가면서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업무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부엌에 싱크대와 식탁, 냉장고를 가까이 배치해 동선을 줄이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더 작아진 부엌에 김치냉장고와 식기세척기, 오븐, 인덕션, 정수기, 음식물처리기, 전기레인지 등까지 몰아놓는 일을 하게 된 셈이다. 이에 P&R 설계 등에 사용되는 설계 자동화 프로그램(EDA)도 고도화했다. 미국의 시놉시스나 케이던스가 만든 고가의 EDA 없이는 P&R 등 반도체 설계도 못할 정도가 됐다. 미국 상무부가 올 8월 최첨단 반도체 설계에 사용되는 EDA의 중국 수출을 금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디자인하우스의 설계 능력은 파트너십을 맺은 파운드리의 경쟁력을 결정한다. TSMC의 디자인하우스 파트너인 대만 GUC나 Alchip 등의 설계 인력은 삼성전자 디자인하우스 파트너인 코아시아나 가온칩스 등의 2~3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병찬 코아시아 전무는 “국내 디자인하우스가 1년에 커다란 칩 2~3개를 겨우 만들어내는 동안, 대만 업체들은 대여섯개를 만드는 수준”이라며 “설계 수요는 크게 늘었지만 공급되는 인력은 한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국내 팹리스와 디자인하우스 등에서 설계 교육을 위한 별도의 기관을 운영하는 곳은 대기업 정도를 빼고는 코아시아뿐이라고 한다. 지난해 말 신입공채로 설계 엔지니어 70여명을 선발한 코아시아는 신입직원들을 업무에 투입하는 대신, ‘지덱(GDEC)’이라는 자체 교육기관에서 8개월간 RTL부터 P&R까지 설계 실무를 배우도록 했다. 설 전무는 “설계 엔지니어에 대한 투자는 3~4년 앞을 내다보며 가야 한다”며 “설계 인력 풀을 늘리는 일에 투자하는 기업이 늘어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실무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 빈약
한국전자통신연구원 SoC센터 등
방학마다 졸업예정자 100명 교육
“인력 양성에 산업·학계 힘 모아야”
국내에서 대학 학부 출신들이 설계 실무를 배울 수 있는 곳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경기 판교에서 운영하는 ‘서울SW-SoC융합R&BD센터’(SoC센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이곳에서는 방학 때마다 4년제 대학 전자공학과 졸업예정자 100명을 선발해 10주간 반도체 설계 실무 교육을 진행한다. 이씨도 이곳을 통해 취업에 성공했다.
대학교수들은 SoC센터의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팹리스 관계자들은 수업 강사로 나선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SoC센터에 공정 데이터베이스(PDK)를 제공해 학생들이 전문적인 P&R 설계를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
노예철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인력양성실장은 “팹리스와 설계 엔지니어들은 책을 쓰는 작가와 같다”고 비유했다. 노 실장은 “아직 퀄컴이나 애플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뒤흔들 엄청난 작품을 쓸 수 있다”며 “가능성 있는 인재를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도록 산업계와 학계, 연구소 등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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