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용산의 힘에 멈춰선 ‘정책결정자 겸 정책집행감시자’

이창곤 2022. 12. 19.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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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곤의 정담]이창곤의 정담 14 _국회

민주주의 체제에서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있듯이 입법권과 예산심사권, 국정조사권 등은 헌법에 명시돼 있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견제를 통해 권력남용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거론하는 헌법과 법치(국가)의 대원칙이다. 이런 대원칙을 뒤흔드는 행위는 국회와 정당의 책임정치를 가로막고, 민주주의 발전을 거꾸로 되돌리는 반민주, 반법치의 퇴행일 뿐이다.

김진표 국회의장(가운데)이 지난 16일 오후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와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를 의장실에서 만나 내년도 예산안 협상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정책은 입법과 예산으로 실행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법을 만들고, 예산을 심의하는 국회 또는 국회의원은 시민의 안전한 삶과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하는가?

과거 개발독재 시대 국회는 ‘통법부’ 혹은 ‘거수기’로 불렸다. 스스로 법을 만드는 게 아니라 대통령의 지시와 행정부가 제출한 법을 통과시켜주는 노릇만 한다는 오명이었다.

민주화 이후엔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회 의안정보시스템과 국회미래연구원에 따르면, 1948년 제헌의회부터 1987년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인 12대 국회까지 39년 동안 접수된 법안 건수는 총 4563건이었다. 행정부가 제출한 법안이 2583건으로 의원이 발의한 법안(1980건)보다 많았다. 그런데 민주화 직후인 1988년 13대에서 2020년 20대 국회까지 32년 동안 접수된 법안은 6만9663건으로, 무려 15배 이상 늘었다.

이 가운데 의원 발의 건수는 민주화 이전 1대~12대 국회 때 1980건에서 민주화 이후 13대~20대 국회에서는 6만2330건으로 30배 이상 늘었다. 가장 가까운 20대 국회에서는 전체 접수된 법안 2만4141건 가운데 의원 발의(2만3047건) 비중이 96%에 달했다. 이 정도면 ‘의원 입법 폭증’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국회 스스로 내린 입법활동 평가는 부정적이다. 국회미래연구원이 2020년 말 ‘더 많은 입법이 우리 국회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연구보고서를 내어 이런 입법 폭증을 ‘과잉 입법’이라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과잉 입법은 △부실 발의와 졸속 심사 △비쟁점 법안 위주의 처리 경향△친분에 따른 편향 심사 △정당 내 정책논의 기능 상실 및 의회정치의 사인화(私人化) 등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요한 입법’은 피하고 ‘많은 입법’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만난 여야 의원들과 몇몇 보좌관들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 야권의 한 보좌관은 “심지어 의원실 사이에 법안 베끼기도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실제 20대 국회 윤소하 의원(정의당)이 2019년 대표발의한 ‘농어업인 기본수당 법안’과 21대 국회 윤준병 의원(민주당)이 2020년 대표발의한 ‘농어업인 공익수당 지원법안’은 이름만 다를 뿐 제안 이유와 주요 내용은 거의 똑같다. 법안 이름 변경에 따른 일부 문장 자구만 고쳤을 뿐, 1장 총칙에서 6장 벌칙까지 구성에서 세부조항까지 복제한 전형적인 베끼기 사례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한 의원은 “일부 시민단체들이 법안 발의 건수로 의원 평가를 하고, 그 결과가 공천기준에도 반영되다 보니 발의 건수를 무분별하게 늘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라며 “발의 건수를 아예 제한했으면 좋겠다”고 허탈해했다. 더불어민주당 한 의원은 “과도한 법안 발의는 의원 잘못이지만, 한국 국회의 결정적인 문제는 중요 정책결정 과정에서 국회가 대통령실의 여의도 분원이나 출장소나 다름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 대한민국 국회는 지금 ‘용산의 힘’에 의해 멈춰있는 형국이다. 헌법에 규정된 법정시한(12월2일)을 훌쩍 넘기고도 여야 극한 대치로 처리되지 못하는 ‘2023년도 예산안’ 문제도 거대양당 소속 의원들 사이 이견보다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강한 ‘그립’ 때문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행정부의 국회 예산심사권 침해 행위다. 민주화 이후 35년이 흘렀어도 국회가 정책 및 정치과정에서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인 ‘통법부’란 오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힘에 종속된 집권여당과 그에 따른 국회의 의사결정 파행 또는 종속은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민주화 이후의 역대 행정부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본질에서 다르지 않았다. 여야의원들이 공히 국회를 두고서 “대통령실의 여의도 분원이나 출장소”라며 자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행정권은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에,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있듯이 입법권과 예산심사권, 국정조사권 등은 헌법에 명시돼 있는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견제를 통해 권력남용을 방지하고자 하는 것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거론하는 헌법과 법치(국가)의 대원칙이다. 이런 대원칙을 뒤흔드는 행위는 국회와 정당의 책임정치를 가로막고, 민주주의 발전을 거꾸로 되돌리는 반민주, 반법치의 퇴행일 뿐이다.

행정부의 국회 권한 침해는 입법권 행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로 과도한 ‘행정입법’이다. 국회가 법을 만들면 행정부는 법률의 위임에 따라 대통령령∙총리령∙부령, 즉 시행령 및 시행규칙 같은 ‘행정입법’을 통해 세부적인 내용을 규정하게 된다.

박선민 국회 보좌관(정의당)은 저서 <국회라는 가능성의 공간>에서 “이들 행정입법은 어디까지나 국회가 만든 법률의 틀 안에서 법의 시행을 위한 하위규정이지만, (이로 인해)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며 “예컨대 행정부가 관련 법 개정안을 냈다가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시행령 개정을 통해 추진해버리거나 모법의 취지와 다른 하위 법령을 만든다거나, 만들어야 하는데 만들지 않거나 하는 식”이라고 밝혔다.

<사회보장법과 의회> 저자인 이신용 교수(경상대)도 “기초생활보장법을 비롯해 숱한 사회보장법은 급여대상자의 범위, 수급조건, 급여범위 및 수준, 재원마련 방안 등과 같은 국민의 기본권 실현과 관련한 핵심사항을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행정입법에 위임하고 있다”며 “이는 본질에서 권위주의 시대의 (행정부의 입법권 침해) 행태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체제에선 어떤 정부가 집권해도 사회복지지출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들어 내기 어렵다”며 “적어도 기본권과 관련한 사항은 행정입법이 아닌 국회가 만드는 모법에 담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물론 행정입법 또한 헌법에 따른 행정부 권한이다. 현대사회가 세분화하고 전문화함에 따라 행정절차 집행영역의 구체적인 부분까지 모법에 세세하게 규정하기 어렵기에 ‘핵심사항은 법률로 정하지만, 지엽적이고 가변적인 사항은 법의 범위 안에서 행정부가 정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변화하는 사회 흐름에 신속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행정부가 정치적 목적이나 편의를 앞세워 기본권을 침해할 정도로 행정입법을 남용, 악용하는 경우다.

이에 우리가 분명히 상기해야 하는 것은 이런 입법권 침해는 결코 관행일 수 없으며, 법치국가와 민주주의의 의회유보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의 권리와 의무, 기본권에 해당하는 사안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입법부에 의해 규정돼야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흔히 ‘시행령 정치’라고도 불리는 행정입법 남용의 결정적 문제점은, 이해당사자나 전문가들의 이견과 의견을 듣고 조정하는 국회에서의 ‘정책의 정치’가 원천봉쇄된다는 점이다. 정책의제 공론화 과정이자 시민 정책학습 과정이기도 한 이 과정은 행정부의 자의적 의사결정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현대 복지국가는 자유권은 물론 시민의 삶의 질과 직결되는 기초생활보장 등 사회권을 보장하는 나라를 말한다. 이런 나라를 만들고 가꿔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정책을 만드는 ‘정책 결정형 의회’로서 국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국회가 시민의 절박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결정자이자 정책집행 감시자의 역할을 분명히 할 때 제대로 된 복지국가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책임정치를 전개할 수 있도록 힘과 전문성을 갖추고, 헌법이 보장한 고유 권한을 시민 기본권을 온전히 보장하는 데 오롯이 행사하는 것에서 그 첫걸음을 떼야 한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한겨레> 편집국에서 팀장과 부장, 논설위원, 부국장 등을 거쳤고,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영국편>,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진보와 보수 미래를 논하다>(편저), <어떤 복지국가에서 살고 싶은가?>(편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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