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몸에 맞는, 어린이가 쓸 때 즐거운 글씨체는 따로 있다

한겨레 2022. 12. 1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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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글자란?
어린이의 악력·소근육 운동은 달라
독일에선 어린이 글씨체 따로 있어
어른이 보기에 예쁜 글씨 강요 말고
어린이 몸이 즐거운 글씨체 연구해야
글문화연구소가 국민대학교 운동역학연구실과 협업하는 연구 모습. 글씨 쓰는 어린이의 신체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중이다. 유지원 제공

글자는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쓴다. 몸과 반응한다. 글씨 쓰기 교육에서 어른들이 놓쳐서는 안 될 점은 어린이의 몸과 인지가 어른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다른 몸에는 다른 글자가 필요하다.

보는 글자, 읽는 글자가 ‘눈을 위한 글자’라면, 쓰는 글씨는 ‘손을 위한 글자’다. 예를 들어, 우리 몸은 수평선을 반복해서 반듯하게 긋기 힘들기 때문에 글씨의 ‘ㅡ’는 오른쪽이 위로 살짝 들리는 경향이 있다. 글자를 주로 기계로 타이핑하는 디지털 시대에도 어린이들이 처음 글자를 배울 때는 일단 몸으로 익혀야 한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학습은 여전히 문자를 습득하는 교육적인 단계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어린이 한글쓰기 교재와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종이와 글씨체 표본의 선택에 있어 어린이의 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일 때가 있다.

먼저 종이의 문제를 보자.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주로 필기도구로 연필을 쓰게 한다. 연필은 흑연이 종이의 미세하게 거친 표면에 갈려서 그 가루가 종이 섬유의 틈에 달라붙는 원리로 글씨가 써진다. 유리 같은 재질의 매끈한 표면에는 연필로 글씨를 쓸 수 없는 이유다. 코팅된 종이를 쓴 교과서는 인쇄는 선명하지만, 그 위에 글씨를 쓸 때는 연필로 꾹꾹 힘을 주어 뒤에 배길 정도로 눌러써야만 자국으로 박힌다. 종이가 받아주어야 했던 힘이 어린이의 작은 몸에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글씨체 표본을 살펴보자. 인쇄체도 적절치 않지만, 어른의 고도로 노련한 필체를 따라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 피아노 학습으로 치면, 이제 바이엘과 체르니를 시작할 단계에 쇼팽과 베토벤부터 연습하는 격이다. 어른의 몸과 어린이의 몸은 다르다. 어린이는 몸도 작고, 손의 악력도 약하고, 소근육을 제어하는 운동 신경도 아직 미숙하며, 글자를 읽고 쓰는 데에도 익숙하지 않은 단계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왜 이런 종류의 궁체 기반 글씨체가 표본으로 적용되어 왔을까? 앞선 시대의 명필이 쓴 좋은 글씨를 규범삼아 본받아온 한자문화권 교육의 오랜 관습에서 온 것이라고 보인다. 조금 더 성장한 후에 결국 이런 방향의 글씨체로 나아가는 것은 괜찮지만, 처음 글씨 쓰기를 익힐 때에는 어린이의 몸에 보다 적절한 글씨체가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어른들이 쓰는 글씨체(위)와 처음 글씨를 배우는 어린이를 위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적용된 네 종류의 글씨체(아래). 아랫쪽이 확연히 단순하다. 유지원 제공

독일의 경우, 초등학생이 따라 쓰기 쉬운 네 종류의 글씨체가 교과서에 적용되고 있다. 어른의 글씨체로 이행하는 단계라는 뜻으로, ‘중간과정 글씨체(Ausgangsschrift)’라고 부른다. 지난 세기 내내 타이포그래피 연구자들과 교육자들이 함께 어린이 글씨체를 연구한 결과로서 반영되었다. 일본에서 최근 개정된 초등학교 글씨 쓰기 교과서에는 저명한 안무가이자 무용가가 합류했다. 글씨 쓰기를 익힐 때 몸의 즐거운 움직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교육계가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글씨 쓰기를 처음 배울 때에는 쓰기의 어려움과 지루함을 극복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고 읽히기 좋도록 신경 쓰는 마음을 갖추게 하는 것도 중요한다. 그런 한편, 어린이가 신체 발달과 학습 단계에 맞게 과제를 무리 없이 이행할 수 있도록 적절한 살핌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한글 글씨체가 어린이의 몸에 적당하고 글씨쓰는 어린이를 행복하게 할까? 단순하면서도 친숙함을 곁들인 고딕체 계열일까? 몸의 움직임이 적극 반영된 필체 계열일까? 어린이가 글씨를 쓰는 동안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글문화연구소는 국민대학교 운동역학연구실과 협력해서 글씨 쓰는 어린이 몸의 운동과 힘을 측정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어른 관점에서 모범적이고 예쁜 글씨를 처음부터 쓰라고 다그치기보다는, 글씨 쓰는 어린이의 몸이 기분 좋은 리듬을 타기를 바라고 있다. 글씨 쓰기가 어딘지 부담되어 속상한 어린이가 줄어들기를, 글씨를 쓰는 경험이 즐거운 기억으로 몸에 새겨지기를 바라고 있다. 과학적으로 타당한 근거로 글씨 쓰는 어린이의 몸이 돌보아지기를 바라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글자에 접근하려면 어린이의 작은 몸, 작은 손, 작은 힘, 작은 근육 운동을 이해해야 한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래서 어린이 글씨 쓰기 연구는 타이포그래피와 교육학뿐 아니라 언어학, 운동역학, 심리학 등 여러 전문 분야의 복합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 어린이의 몸은 어른이 될 미래를 위해 봉사하는 데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못지 않게, 지금 처한 상태 그대로도 이해되고 존중받아야 한다.

유지원 글문화연구소장(타이포그래피 연구자, <글자 풍경>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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