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준의 돈 이야기 <12>] 빈 살만과 페트로 달러

신상준 2022. 12. 1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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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셔터스톡
신상준 한국은행이코노미스트 연세대 법학 학·석사,서울시립대 법학 박사,‘중앙은행과 화폐의 헌법적 문제’ ‘돈의 불장난’‘국회란 무엇인가’ 저자

지난 11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공식적 발표가 없음에도, 영국의 일부 매체들은 왕세자의 개인 재산을 8500억파운드(약 1247조원)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빈 살만 왕세자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부자인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1310억달러·약 147조원)보다 9배나 더 재산이 많은 셈이다. 빈 살만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큰돈을 갖게 된 것일까.

왕세자가 보유한 거대한 부(富)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페트로 달러(석유 달러)의 형성 과정을 이해해야 하고, 페트로 달러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가의 형성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사우드의 사우디아라비아 창건

사우디의 왕세자 ‘빈 살만’의 본명은 ‘무함마드 빈 살만’이고, 그 뜻은 ‘살만의 아들인 무함마드’다. 빈 살만 왕세자의 아버지는 현 국왕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이며, 그 뜻은 ‘사우드 가문 압둘아지즈의 아들 살만’이다. 여기서 우리는 빈 살만 왕세자의 조부가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라는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라고 불리며, 오늘날 사우디를 창건한 인물이다. 1932년 이전까지 지구상에는 사우디아라비아라는 나라가 없었다. 단지, 아라비아반도의 다양한 부족과 종파로 구성된 헤자즈 왕국, 라시드 왕국, 네지드 왕국 등과 같이 다양한 왕국이 존재했을 뿐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우디라는 말과 아라비아라는 말의 합성어다. 아라비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아반도를 의미하는 지명이고, 사우디는 아라비아반도의 한가운데 있는 가장 척박한 지역인 네지드를 통치하던 지방 토호 가문의 성씨를 의미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과 동맹을 맺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사우드 가문의 숙적이던 라시드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븐 사우드는 자연스럽게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영국은 그에게 라시드와 싸울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었으나 아라비아반도에서는 소규모 왕국 간 전쟁이 지속하고 있었다. 1920년 이븐 사우드는 영국의 무기로 중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숙적 라시드 왕국을 정벌하고, 1925년 아라비아반도의 맹주인 헤자즈 왕국(메카, 메디나)을 점령했다. 1927년 영국은 이븐 사우드를 네지드와 헤자즈의 왕으로 인정해주고, 이븐 사우드는 그 대가로 왕국 일부를 요르단에 양도한다. 이를 계기로 이븐 사우드는 ‘성스러운 사원(이슬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1932년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창건한다. 사우드라는 성에서 나라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븐 사우드는 급조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이슬람 고위 성직자 및 피정복 부족의 딸들과 결혼했다. 이븐 사우드는 20명이 넘는 아내로부터 100명이 넘는 자녀를 얻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4명의 아내만 허용되지만, 강력한 수니파 지도자인 이븐 압둘 와하브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와하브가 창시한 와하비즘에 의하면 모든 무슬림은 절대적으로 정치 지도자에게 충성해야 하고, 정치 지도자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국민을 통치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우디의 건국 이념을 제시했던 와하비즘은 오늘날 가장 강경한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의 종교적 신념이 되었고,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을 배출하게 된다. 


세계 최대 석유 회사 아람코의 출범

1935년 사우디에서 석유가 발굴되기 시작했다. 당시 사우디 왕실은 영국의 석유 회사들을 미심쩍어했다. 식민주의 성향을 버리지 못한 영국 정부가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스탠더드 오일(SOCAL)에 석유 채굴권을 넘겨주었다. 스탠더드 오일을 창시한 석유왕 존 록펠러와 미국 자본주의의 잔혹한 성격은 업턴 싱클레어의 소설 ‘오일’에 잘 묘사돼 있다.

아라비아반도 전역에서 석유가 넘쳐났지만, 대부분의 돈이 스탠더드 오일로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는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스탠더드 오일의 지분을 잠식해 나갔고, 마침내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세계적인 석유 회사 아람코(Aramco)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우디는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최대의 총력전이자 자원전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탱크 250대로 이루어진 미국의 기계화사단이 북아프리카 전선을 160㎞ 이동하기 위해서는 9만5000L의 휘발유가 필요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이븐 사우드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2월 수에즈 운하의 미군 전함 위에서 실용주의자였던 두 사람이 만났다. 이븐 사우드는 미국에 석유 사용권을 보장해 주고, 루스벨트는 사우디 왕가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했다. 이븐 사우드에게 메카와 메디나를 빼앗긴 하심 가문이 여전히 이라크와 요르단을 통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3년 이븐 사우드는 78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아라비아의 유목민들은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험’을 중시했다. 따라서 왕의 큰아들이 아니라 왕족 중에서 최고 연장자가 왕위를 잇는 전통이 있다. 이븐 사우드 사후 6명의 아들이 연장자 승계 전통에 따라 왕위를 이어 나갔지만, 그중 1명은 낭비벽 때문에 추방당했고, 또 1명은 급속한 서구화 정책을 도입하려다 극단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이번에 방한한 빈 살만은 조선시대 이방원 같은 인물이다. 기존 왕위 승계 순위를 무시하고 무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세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닉슨 불태환 선언과 페트로 달러의 등장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자 파이살 국왕은 소규모 병력을 요르단에 파병했다. 그러나 이들은 힘 한번 못 쓰고 이스라엘 군대에 괴멸당했다. 1971년 닉슨이 달러 금 태환 정지(불태환) 선언을 하자 서구 문명에서 금본위제가 사라지고 전 세계의 모든 화폐가 종잇조각으로 변했다. 이런 국제적 혼란 속에서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자, 파이살 국왕은 아람코의 유전을 폐쇄했다. 그 결과 국제 원유 가격이 세 배나 올랐고 전 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를 동반한 물가 상승)의 늪에 빠졌다. 

수세에 몰린 닉슨 대통령은 미군의 사우디 주둔을 제안했고, 군사적 안전 보장을 약속받은 파이살 국왕은 미 해군에 다시 석유를 공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페트로 달러 시스템’이 자리 잡게 된다. 미국은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시아파 이슬람, 특히 예멘과 이란으로부터 사우디 왕실을 보호하고, 사우디는 이에 대한 대가로 아람코의 원유는 달러로 결제하되 원유 판매 대금을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1945~71년 달러의 국제적 지위가 금에 의해 유지되었다면, 1973년 이후에는 석유에 의해 지지된 것이다. 

오늘날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달러 가치가 상승하고, 달러로 결제되는 원유 가격이 자동으로 인상되기 때문에 여타 국가들은 밀려드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자국의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이러한 알고리즘의 한가운데에는 페트로 달러가 존재하고, 페트로 달러의 중심축에는 사우디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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