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발사체 있어야 발사장도 의미”…나로우주센터장도 사퇴
누리호 3차 발사·민간 기술이전 현장 책임자 물러난 격
항우연 조직개편 둘러싼 내홍 확대일로인데
주무부처 장관은 ‘관망’만 ...“내부에서 협의하고, 필요하면 조언은 가능”
고정환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에 이어 옥호남 항우연 나로우주센터장도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 조직개편에 반대하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나로우주센터장은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누리호 3차 발사와 산업체 기술이전 등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자리다.
고 본부장 사퇴로 시작된 항우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모습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발표한 우주경제 로드맵의 첫 단추부터 어긋날 상황이지만, 정작 주무부처는 항우연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뒷짐만 지고 있다.
옥호남 나로우주센터장은 19일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발사체가 있어야 발사대도 의미가 있고, 발사장도 의미가 있는 것”이라며 “발사체개발사업본부를 사실상 해체하는 조직 개편에 반대하는 의미로 이달 16일 사퇴서를 항우연 원장에게 제출했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5일 한국형발사체(KSLV-2) 누리호 성공 주역인 고 본부장이 사퇴하겠다고 밝힌 사실이 알려지며 큰 논란이 됐다. 고 본부장은 사퇴서에서 “항우연의 조직개편으로 발사체개발사업본부의 연구개발 조직이 사실상 해체됐다”며 “이대로는 누리호 3차 발사와 산업체로의 기술이전 등 산적한 국가적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문제의 발단이 된 건 항우연이 지난 12일 발표한 조직 개편이다. 누리호 개발을 이끈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는 항우연 안에서도 독자적인 조직처럼 움직였다. 항공분야나 위성분야가 연구소 체제로 전환한 이후에도 사업본부 체제를 유지했다. 조광래 전 항우연 원장은 “위성과 항공의 핵심부품은 해외구매가 가능하지만, 발사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독자적으로 국산화 개발을 해야 한다”며 “누리호 같은 거대복합 체계종합 시스템 R&D는 조직체계가 탄탄할수록 성공 확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조직개편에서 항우연은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를 항공·위성처럼 연구소 체제로 전환했다. 기존 사업본부에 있던 5부·16팀 체제를 발사체연구소를 신설한 뒤 그 아래 2실, 6부, 2사업단을 두는 식으로 바꿨다.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는 발사체 연구소 하부조직으로 들어가고, 본부장 1명과 행정요원 5명만 남게 됐다. 기존의 팀제도 폐지했다.
항우연 관계자는 “누리호 개발사업을 성공적으로 끝냈기 때문에 후속 사업 대비 및 연구·조직 효율성 제고를 위해 발사체 연구 분야 조직개편에 나선 것”이라며 “누리호 하나만을 맡고 있던 단일사업 전담조직을 누리호 고도화사업, 차세대발사체개발사업 등 복수사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개편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조직개편에 누리호 성공을 이끈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 구성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고 본부장이 “발사체 연구개발 조직을 사실상 해체한 것”이라며 사퇴서를 낸 이유다. 사업본부 내 5명의 부장들도 모두 사퇴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와 별도 조직인 나로우주센터를 이끄는 옥호남 센터장까지 사퇴에 동참한 것이다. 옥 센터장은 “조직개편 시행을 누리호 3차 발사 이후로 늦춰만 달라고까지 했지만 이 원장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나로우주센터의 책임자로서 죄송스러운 마음에도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나로우주센터는 내년 상반기 누리호 3차 발사와 한화에어로스페이스로의 누리호 기술이전이 진행되는 현장이다. 나로우주센터장이 지금 시점에서 공석이 되거나 교체되면 당면 과제들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한 항우연 관계자는 “고 본부장의 사퇴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면 옥 센터장의 사퇴는 당장 내년 항우연 주요 업무에 실질적인 차질이 생기는 현실적인 의미가 크다”며 “조직개편을 추진한 이상률 원장 입장에선 옥 센터장의 사퇴가 더 뼈아플 것”이라고 말했다.
항우연에 따르면 이상률 원장은 옥 센터장의 사퇴를 적극 만류하고 있다. 이 원장은 옥 센터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지난 16일 조선비즈와의 통화에서 “누리호 3차 발사에 지장이 생겨서는 안 된다”며 “나로우주센터는 3차 발사를 위해 준비하던 것들이 있는 상황인 만큼 설득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직개편을 둘러싼 항우연 내부 갈등은 봉합이 어려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항우연은 이날 신설되는 발사체연구소의 부·실장 인사를 냈다. 지난주 사퇴서를 낸 고 본부장은 이날 연차를 내고 이상률 원장이 주재하는 임원회의에 불참했다. 이 원장과 고 본부장은 지난주 과기정통부의 주재로 만남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이 원장은 본부-부-팀 체제를 매트릭스 체제로 개편해야 제한적인 발사체 연구개발(R&D) 인력으로 다양한 국가 R&D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고, 고 본부장은 발사체 R&D의 특성상 매트릭스 체제는 사업의 실패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양측의 입장 차이가 워낙 커서 조율은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게 항공우주업계의 관측이다.
항우연 내부에서도 조직개편을 놓고 입장차가 뚜렷하다. 한 항우연 관계자는 “위성이나 항공 분야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로 운영된다면 발사체는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위계를 갖추고 있는 조직”이라며 “발사체 관계자들 입장에선 이번 조직개편이 발사체 개발 조직의 전통을 무시하고 해체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발사체 조직은 누리호 1차 실패 이후 정부 차원의 지독한 감사를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며 “이번에 누리호 발사가 성공했는데도 오히려 조직이 해체된다는 사실이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신명호 항우연 노조위원장은 “발사체 조직의 연구원들도 대부분 노조에 가입돼 있지만 이번 인사 발령에 대한 반발은 크지 않은 상황”이라며 “젊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단일 과제만 할 게 아닌데 유연한 구조가 낫지 않냐는 의견도 있다”고 말했다.
항우연 내부 갈등이 누리호 3차 발사에도 영향을 끼치는 상황까지 됐지만, 주무부처인 과기정통부는 여전히 뒷짐만 지고 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항우연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절차나 방법상에서 이견이 있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며 “내부에서 가능한 최선 다해서 협의하고, 그 과정에서 과기정통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조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직접 발표한 우주경제 로드맵의 한 축을 차지하는 발사체 개발사업이 차질을 빚게 된 상황인데도 주무부처 장관은 ‘엔지니어의 이견’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항우연과 관련업계에선 더 늦기 전에 과기정통부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다른 항우연 관계자는 “항우연은 출연연 중에서도 보수가 낮은 편에 속하는데 조직개편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니 격앙된 연구원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과기정통부가 뒷짐만 지고 볼 것이 아니라 항우연 내부 상황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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