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법을 무시하는 사회…법다운 법이란 무엇일까
<정글북>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은 “법이 없는 종족은 열등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복잡다단한 세상에 법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키플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도 되고, 타인의 신체를 해쳐도 되고, 허락 없이 주거지를 침입해도 되는 사회는 틀림없이 열등할 겁니다. 법의 보호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평화롭게 생산하고 소비할 수 없을 터이니 문명은 퇴보를 면치 못할 겁니다.
우리는 키플링의 말에서 아쉬운 점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는 왜 “법은 있지만 지키지 않는 종족은 열등하다”고 덧붙여 놓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키플링은 오늘날처럼 법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해질지 몰랐을 겁니다. 법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자들, 목적을 위해 불법·편법·떼법에 기대는 사람들, 자기는 언제나 예외여야 한다는 압력단체들, 목적이 숭고하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투쟁가들을 그가 목격했다면 틀림없이 ‘법의 위기’를 말했을 겁니다.
실은 법이 만능인 것도 문제입니다. 무엇이든 법으로 뚝딱 정해 그때그때 사용하는 ‘입법 만능주의’는 법을 풀빵이나 소시지처럼 하찮게 대하도록 만듭니다. 국회가 너무 많은 법을 만든다면 누가 법을 존중하겠습니까?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19대 국회에서 1만6000여 개, 20대 국회에서 2만3000여 개의 법이 발의됐다고 합니다. 키플링이 살아 있다면 “법을 너무 많이 만드는 나라도 열등국가”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법이 흔들리는 현장과 법철학 속으로 가봅시다.
지하철 운행 방해 시위, 확성기 소음 집회…스스로 예외가 되려 할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퇴임 뒤 경남 양산에서 생활하고 있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그제 “확성기 소음과 욕설이 함께하는 반(反)지성이 시골 마을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략) 주민들이 여러 차례 신고했으나 소음 기준을 위반하지 않는 수준이어서 경찰은 야간 확성기 제한만 통고했다. 용산 대통령실 주변도 연일 시위와 확성기 소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략) 어제는 한 장애인 단체가 출근 시간대 차도를 점거해 시위를 벌이면서 극심한 교통혼잡까지 빚었다. 앞으로 용산은 ‘떼법 시위’의 천국이 될 판이라는 주민들의 하소연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물론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하지만 법과 상식의 범위 내여야 한다. 집회·시위가 다른 주민들의 기본권을 해칠 경우 자제하는 게 마땅하다. 관련 법에서 ‘재산 피해나 사생활 평온을 해칠 우려가 뚜렷한 경우’ 집회나 시위를 제한할 수 있다고 한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막무가내식 떼법이 고질화한 지 오래다. 툭하면 시위대가 대기업 본사 앞을 점거해 확성기에 장송곡까지 틀어 직원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청와대 부근 주민들은 지난 5년 내내 집회 때문에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호소했다. 서울 광화문광장이 시위대에 무단 점령당하기 일쑤였고, 도심 곳곳은 귀청을 찢을 듯한 확성기 소음과 구호, 현수막으로 어지럽다. (중략) 소수에 의해 다수 시민의 일상과 법치가 짓밟히는 일이 있어선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다. (하략)
-한국경제신문 사설-
윗글은 우리나라 법질서가 몹시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헌법이 보장한 집회결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상업할 자유가 불법·편법·떼법으로 인해 퇴색되고 있다는 우려가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사설은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독자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첫째 사례가 확성기를 이용한 시위입니다. 주말 광화문이나 용산에 가보면 정말 시끄럽습니다. 민주주의라는 게 원래 시끄럽고(noisy) 혼탁하고(messy) 복잡한(complicated) 것이지만 도를 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시위 전용차와 크레인, 대형 스피커를 이용하는 시위는 고막을 찢을 듯하죠. 요구 사항을 적은 피케팅(picketing) 시위는 너무 점잖아서 집회 밈(meme)에서 도태돼버린 지경입니다.
대로(大路)를 점령하는 시위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도로 점거 집회는 원래 허가가 나지 않습니다. 수많은 차량과 운전자의 자유가 침해되기 때문입니다. 시위 참여자가 늘어나면 도로에 인파가 넘칠 수밖에 없다는 측면이 있지만, 요즘 시위는 처음부터 도로 점거로 시작합니다. 제3자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출퇴근 시간대라도 피해서 집회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운전자와 시위자 사이의 실랑이는 다반사(茶飯事)가 되었습니다.
최근엔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도 자주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촉구하는 시위는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위 장소를 지하철로 잡는 것은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이면 법질서는 설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출퇴근 시간대에 맞춰 지하철 운행을 방해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 미흡하다면, 시위대는 국회나 정부 부처 앞에서 집회를 하는 게 합당합니다. 지하철 문 위에 드러눕는 시위는 동정·동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불법·편법·떼법 행위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합니다. 이런 행위에 굴복하면 “너는 법을 지켜라. 나는 어겨서라도 목적을 성취하겠다”는 풍조가 생겨납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고 했습니다. 이 최소한조차 지키지 않는 공동체의 미래는 어떨까요? “가장 나쁜 사람은 스스로 예외가 되려는 사람이다”란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NIE포인트
1. 집회결사,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2.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상관없다는 주장을 비판해보자.
3.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말의 의미를 토론해보자.
칸트·하이에크·몽테스키외·애덤 스미스…'공동체를 위한 법'을 고민한 철학자들
이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몽테스키외, 알렉산더 해밀턴,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정치·경제·도덕 철학자들은 법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수많은 사람이 엉켜서 사는 사회에서 법이 맡은 역할은 무엇일까요? 이들의 중심 사상을 엿보면서 답을 찾아봅시다.
○이마누엘 칸트
“어떤 행위가 법적인 행위인가”라는 물음에 이 독일 도덕철학자는 “누구의 자유와도 공존할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게 법적 행위라는 것이죠. 자기 권리를 위해 남의 자유를 경시한다면 그것은 도덕심에 반한다는 얘기입니다. 조용한 휴식을 즐기는 주택가나 평화로운 거래로 분주한 상가에서 시위하는 것은 타인의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여서 제한돼야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법은 이런 행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그는 정언명령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너에게 해주기를 네가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도 행하라”는 겁니다. 내가 불법적인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듯, 너도 그런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요즘 주변에는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법, 입법 그리고 자유>에서 법이 법답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을 자주 경시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법다운 법에 의한 통치를 법의 지배(rule of law), 법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저 절차적으로 통과된 법으로 통치하는 것을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로 구분했습니다. 법의 지배를 법치주의, 법에 의한 지배를 법실증주의라고 했습니다.
법치주의의 법은 일반성, 추상성, 확실성을 띠고 있지만, 법실증주의의 법은 그런 성격이 없습니다. 특정 집단에 유리한 법, 이해관계를 고려한 법, 애매모호한 내용을 가진 법은 법다운 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조가 불법 파업해도 배상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는 법, 150여 가지의 계산법을 가진 종합부동산세법은 일반성, 추상성, 확실성을 갖지 못한 법이므로 하이에크가 말하는 법다운 법, ‘법치주의 법’이 아닙니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을 쓴 이 프랑스 사상가는 권력자들이 다수의 지지를 앞세워 법을 타락시킨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는 주권재민이라는 원리에 따라 투표를 통해 다수표를 얻는 자가 권력을 잡습니다. 권력의 원천이 유권자, 즉 국민에게 있다는 겁니다. 문제는 다수를 획득한 권력자는 제한 없는 권력을 행사해서 법을 자기 뜻대로 마구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독재자들이 흔히 이렇습니다. 그는 법의 타락을 막기 위해 권력을 나눴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입법, 사법, 행정 3권분립입니다. 문제는 입법부가 법을 함부로, 너무 많이 만들어서 ‘입법 독재’라는 말이 나오는 데 있습니다. 다수를 차지한 입법권력이 독재를 행사한다는 겁니다. 그는 “모든 권력자는 끝까지 간다”고 책에 썼습니다. 법의 위기는 권력에서 온다고 봤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
최초의 성문헌법이라는 미국 헌법 제정을 주도한 그도 입법부의 독재성을 간파했습니다. 전국에서 선거로 뽑힌 이들은 국민을 대표한다는 이유로 과도한 열정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지금의 우리나라 국회 모습을 우려한 겁니다.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인데도 급히 법을 만들어 통제하려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입법부를 상원과 하원으로 나눴습니다. 입법부 내에서도 상하원이 서로 견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애덤 스미스와 밀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국가와 사회가 잘 굴러가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제3의 공평한 관찰자’에 비춰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이 관찰자는 극한으로 치닫는 이기심을 억제하도록 도울 뿐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상호이타주의가 작동하게 해준다고 봤습니다. 밀은 교육을 통해 지식을 쌓아야 호들갑 떨지 않는 민주주의, 즉 숙의민주주의를 달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NIE포인트
1. 칸트가 말한 정언명령의 개념을 알아보자.
2. 법의 지배와 법에 의한 지배의 차이점을 토론해보자.
3. 애덤 스미스가 말한 ‘제3의 공평한 관찰자’가 무엇인지 찾아보자.
고기완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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