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권의 시론>참사 악용하는 ‘못난이 정치’
유병권 사회부장
삼풍 붕괴 후 희생양 논란 없어
여야 李 해임 놓고 꼴불견 싸움
세월호 참사처럼 정치화 우려
“자기 일 대충해서 벌어진 일”
철저한 진상 규명이 여야 속죄
‘용서하지 마라’ 글 돌아보길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사망하자, 8일 뒤 이계익 교통부 장관과 염태섭 해운항만청장을 전격 경질했다. 초속 10m 이상의 강풍이 몰아치고, 파고도 2∼3m에 달해 운항이 불가능한 기상 조건 속에서 정원(221명) 외에 무려 141명이나 초과 승선한 여객선 출항을 허가하는 등 관리·감독을 하지 못한 책임을 물었다. 그로부터 1년 뒤 1994년 10월 32명이 사망하는 성수대교 붕괴사고가 일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사고 당일 이원종 서울시장을 곧바로 인사 조치했다. 참사가 인재(人災)에서 비롯됐다는 분노와 원망이 정부로 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시장을 희생물로 삼은 정치였다.
김 전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 참사에 시달렸다. 충주호 유람선 화재(25명 사망),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101명 사망), 대한항공 801편 추락(228명 사망) 등 육·해·공·지하를 가리지 않고 참사가 일어났다. 단일 사고 중 역대 가장 많은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1995년 6월 일어났을 때 김 전 대통령은 희생양 카드를 쓰지 않았다. 참사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대책이 막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 붕괴 이후 국가 재난에 대비하는 중앙119구조본부가 창설됐고, 119구급대에 제대로 된 외상 응급처치 장비, 자동심장충격기 등 전문 응급처치 장비가 보급됐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도 참사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정치권이 진상 규명보다 꼴불견 싸움에 매달리는 일은 없었다. 사고에 책임 있는 사람들은 경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 처벌받았다.
세계에서 치안이 가장 좋다던 서울 한복판에서 158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는데 정치권 논의는 희생양을 찾던 30년 전으로 퇴보했다. 이태원의 내리막 골목은 길이 45m, 폭 4m 내외로 180㎡(약 54.5평) 정도다. 사고 발생 장소는 골목 중간 지점으로 18.24㎡(약 5.5평) 공간에 300여 명이 겹겹이 쓰러졌다. 이런 믿기지 않는 비상식적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경찰은 왜 인파를 통제하지 않았고, 112 구조 요청을 무시했는지, 구청은 사전 안전 대책을 마련했는지, 119구급대는 제때 현장에 도착했는지, 심정지 상태에서 구조된 사람 중 회복된 사람이 얼마나 됐는지, 정부와 경찰의 지휘 통제는 제대로 작동했는지 등 수많은 궁금증과 의혹이 나오고 있다. 철저한 진상 규명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야 재발을 막는 대책도, 합당한 책임자 처벌도 이뤄질 수 있다.
이태원 유가족협의회는 13일 “수사는 법 위반 여부에 대한 단순한 사실관계를 드러낼 뿐 맥락을 풍부하게 드러낼 수 없다”고 했다. 위법성을 따지는 경찰 수사로는 참사의 총체적 문제점을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국정조사를 촉구했지만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은 내용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여야는 거꾸로 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 장관 해임건의안을 강행 처리하면서 이태원 참사의 정치화가 우려된다. 경찰, 국회, 검찰, 특검, 3번의 공식 기관 조사 등 8년간 9번 조사한 세월호 참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참사 발생 다음 날 한국에 온 로마 교황청 성직자성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은 회견에서 “어쩌면 자기 일을 대충대충 해서 벌어진 일”이라며 “국민 전체를 비롯해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우리 사회가 안전 불감증에 취해 있었던 건 아닌지, 주어진 내 일만 하면 된다는 공무원의 무사안일과 관료주의가 도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따져보고 짚어봐야 한다. 무엇보다 대형 참사가 왜 끊이지 않는지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남 탓을 하며 정국 주도권을 잡으려 장관 해임과 탄핵을 밀어붙이는 민주당이나, 거야의 횡포에 맞서 국정조사를 보이콧 하려는 국민의힘이나 모두 못난이 정치를 하고 있다. 공정하고 철저한 조사를 통해 참사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산 자들의 도리이고 속죄다. 이를 저버린다면 21대 국회의원들은 2024년 총선에서 재앙보다 더한 낙천·낙선 참사를 겪게 될 것이다. 49재를 하루 앞둔 15일 참사 현장을 다시 찾았다. 벽면 가득 채운 추모글 중에 ‘용서하지 마라’는 글이 가슴에 와 박혔다. 그날 내린 새하얀 눈이 슬픈 영혼들을 감싸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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