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팬데믹 때가 차라리 더 나았다”

이석 기자․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2022. 12. 19.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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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경제 전망에 돈줄 죄는 재계
“금융위기·팬데믹 때와 달리 돌파구 안 보인다”

(시사저널=이석 기자․엄민우 시사저널e. 기자)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때보다 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기자가 최근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이다. 새해를 목전에 둔 시점이지만 기업들은 희망보다는 위기를 얘기하고 있다. 내년에 예상되는 불경기 상황이 코로나 팬데믹 때보다 심각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투자보다 돈줄 죄기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외 주요 기관들은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일제히 2% 미만으로 낮춰 잡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발표가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최근 제시한 1.5%다. 기존 2.3%에서 1.5%로 3개월 만에 0.8%포인트나 하향 조정했다. 아시아 주요 국가 중에서도 최대 하락 폭이다. 골드만삭스 등 9개 주요 외국계 투자은행(IB)이 보고서를 통해 밝힌 지난11월말 기준 내년 한국 성장률 전망 평균은 1.1%에 불과했다. 일각에선 1%대 성장도 위태롭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국 경제가 내년에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재계의 목소리를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이유다.

ⓒ일러스트 신춘성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 줄줄이 하향 조정

실제로 기업들이 예측하는 내년 경제 상황은 코로나19 시국 때와 비교해도 절망적이다. 코로나 팬데믹 땐 그 자체가 사상 유례없던 사태였던 만큼, 예측불허의 불황과 함께 호황도 교차했다. 특히 대한민국의 효자 산업인 반도체 부문의 경우 '코로나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근무 등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증가하고 IT(정보기술) 기기나 데이터 사용이 늘면서 메모리 수요가 폭발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나란히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철강 부문도 나쁘지 않았다. 팬데믹이 엔데믹 국면으로 넘어가며 전방산업이 회복세를 보인 데다 중국의 감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공급이 타이트해지면서 철강 가격이 급상승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도 올해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안타깝지만 내년 경제 상황은 이 같은 변수조차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말 그대로 가계소비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상호 전경련 경제정책팀장은 "코로나19가 예상치 못한 위기였다면 내년도 위기는 눈앞에 보이는, 예측 가능한 분명한 위기"라면서 "IMF 외환위기나 글로벌 경제위기 때는 그나마 수출이 호황이었고 코로나 팬데믹 때는 특수를 누린 산업도 있었지만 내년도 경기 침체는 그런 것들조차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12월5일 전경련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023년 국내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응답에 참여한 기업 100곳 중 48%가 내년 투자계획이 없거나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고 답했다. 그나마 52%는 투자계획을 수립했으나, 투자를 축소할 것(19.2%)이라고 답한 기업이 확대하겠다(13.5%)는 답변보다 많았다. 투자를 꺼리는 주요 이유로는 금융시장 경색과 자금 조달 애로(28.6%), 원-달러 환율 상승(18.6%), 내수시장 위축(17.6%) 등이 꼽혔다. 한 4대 그룹 인사는 "지금 가끔씩 부각되는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 소식은 알고 보면 대부분 이전에 잡아놓은 것들"이라면서 "이전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는 것 자체도 부담스러운 게 현실이다"고 전했다.

11월24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6단체 공동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손경식 경총 회장이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대기업 10곳 중 5곳 "내년 투자계획 못 세워"

재고만 쌓여가는 상황에 투자를 늘리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는 분석도 있다. 리더스인덱스가 매출 기준 상위 500대 기업 중 재고자산이 전년 결산보고서와 비교 가능한 195개 기업의 재고자산 변동 현황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결산 때 121조4922억원이었던 재고자산이 올 3분기 말 기준 165조4432억원으로 36.2%나 늘어났다. 경기 침체 영향으로 연초 이후 매 분기 재고 규모가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던 수출 상황도 녹록지 않다. 지난 10월 우리 기업 수출액이 기존 최고 실적인 6444억 달러를 넘어섰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에도 2년 연속 수출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연간 무역 규모 1조 달러 돌파는 9월14일 일찍이 달성한 상태다. 수출 순위는 세계 7위에서 6위로 한 계단 올랐다. 겉으로 봐서는 나쁠 게 없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황이 다르다. 4분기 들어 수출 감소세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10월과 11월 연속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12월 역시 화물연대 파업 여파로 인해 수출 실적이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현재의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내년 수출액은 올해 대비 3.1% 감소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잿빛 전망이 지배적이다 보니 기업들 입장에선 결국 돈줄을 죄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게 됐다. 기업들은 돈 쓰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면서 현금을 확보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실제로 삼성과 SK, 현대차, LG 등 시가총액 상위 10대 기업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올해 들어 크게 증가했다. 지난 9월말 기준으로 현금성 자산은 97조6966억원으로 전년 말(79조8053억원) 대비 17조8914억원(22.4%)이나 증가했다. 특히 7~9월에만 10조원 이상 현금성 자산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계 생존 현금 쌓아 유동성 확보 총력

'생존 자체'가 목표가 되면서 기업들은 보유 자산 처분이나 계열사 매각에 나섰다. 최근 유동성 위기설이 나돌고 있는 호텔롯데는 지난 11월 롯데칠성음료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한화솔루션은 한화첨단소재와 에이치에이엠홀딩스 등 자회사 2곳의 지분 일부를 6800억원에 매각했다. 대한항공은 서울 종로 송현동 부지를 5579억원에 매각했다. 대우조선해양건설의 경우 보유 중이던 160억원 규모 전환사채(CB)를 매각해 유동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M&A 시장에 나온 상당수 기업이 현재 외면받고 있다. 글로벌 금리 인상 여파와 경기 침체로 팔겠다는 기업은 넘쳐나지만 사겠다는 기업이 없어서다. 이 같은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투자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재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지적한다.  

투자 축소가 채용 축소로 이어지면서 고용시장도 얼어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상당수 기업이 회망퇴직을 시행했거나 시행을 준비 중이다. 김용춘 전경련 고용정책팀장은 "글로벌 시장 자체가 축소되는 상황 속에서 기업들의 과감한 투자가 이뤄질 수 없을 것이고, 투자의 결과로 뒤따르는 고용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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