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으면 죽음의 관짝, 펼치면 삶을 담은 책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백색 공간 속에서 덩어리가 되어 떠돌고 있다. 이 공간은 억대의 미술품을 구경하고 팔고 사는 국내 굴지 메이저 화랑의 전시장. 이곳 한 귀퉁이에 덮으면 죽음을 담는 관짝이 되고 열면 세상의 삶과 말을 담는 책이 되는 설치작품이 관객을 맞는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지난달 17일부터 열리고 있는 중견작가 이기봉씨의 근작전 ‘당신이 서 있는 곳’을 대표하는 작품은 <천개의 페이지들―하양>이란 설치작품이다. 서로 연결된 채 수직과 수평 방향으로 배치된 두쪽의 화폭 판을 덮은 하얀 안료층 위에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명저 <논리철학 논고>의 텍스트 글자들이 한가득 찍혀있는데, 시각적으로 긴장감이 가득하다. 한눈에도 글자체들은 휙 불면 날아갈 듯 부스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데다, 두쪽의 화폭 판은 당장이라도 합쳐져 안료들을 사방에 흩뜨릴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작가는 “두 판을 덮으면 관짝이 되고 펼쳐놓으면 삶과 죽음 사이에 걸친 세상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자나 관짝 모양의 조형물 옆으로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채 텅 빈 화폭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이를 두고 “제발 좀 보지 마, 이젠 의미를 두고 보지 말라는 뜻”이라고 덧붙여 말한다.
한국 미술판에서 주목받는 스타 작가 중 한명으로 통하는 이씨가 2000년대 이후 벌여온 작업을 눈여겨본 애호가라면 짐작하겠지만, 그의 작업들은 지난 세기 세계 지성계를 풍미했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1920년대 전반기에 쓴 명저 <논리철학 논고>에서 펼친 담론을 작품에 표현해온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도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불완전성과 세상의 불가해성에 대해 깊이 천착해온 작가의 평면, 설치작품들이 케이1, 케이2 두곳의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다. 감각적인 겹침 화면으로 펼쳐내는 안개 속 자연풍경과 글자들이 명암을 이루며 빚어내는 추상적 화면, 부질없이 겹쳐지고 바스러지는 듯한 글자 찍힌 안료 덩어리들을 담은 책 형상의 설치작품들이 나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할지어다’란 경구로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와 우주의 실상을 논리적인 이상적 언어로 파악하려다 결국 좌절하며 삶을 접은 불가지론자였다. 그 자신이 언어철학자였지만 지극히 한정적인 언어의 한계를 말년에 절감하면서, 우리가 우주와 세계의 온전한 실상을 절대로 알 수 없으며 언어로는 극히 일부만을 묘사하고 제각기 의미를 심으며 바라볼 수 있을 뿐이라고 갈파했다. 언어는 참과 진리를 가르는 도구가 아니라 의미를 다루는 게임이라는 게 그가 인식한 깨달음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과 서적을 수십년간 탐독해온 작가 이기봉 또한 불가지론자로서 철학 거장의 생각과 그가 받아들인 깨달음을 화폭에 표출한다. 비트겐슈타인이 견지했던 세계의 난해함과 이해할 수 없음을 모호한 이중막의 화폭에 표현하는 작업을 지난 30여년간 집요하게 시도해왔다. 국제갤러리에 20년 이상 전속된 작가는 전시에서 불가지론적인 작가의 철학을 지극히 감각적이고 세련된 이중 화면의 안개 낀 숲과 강의 형상으로 계속 변주하는 기묘한 패턴을 보여준다. 사실 이런 이미지들은 이기봉의 심상이나 심연의 철학적 미학적 세계를 생각한다면 지극히 일면적인 대목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를 의식한듯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텍스트 글자나 원들이 우둘두툴한 질감으로 튀어나올 듯 화면에 붙어있으면서 그림자처럼 자연의 풍경을 구성한 근작들을 갤러리 개인전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중이다. 작가는 텍스트 글자 작업과 안료 설치작업을 두고 “수년 전까지 멋있게 보이려 했던 작업을 해왔는데 이번에 정말 반성하고 새롭게 작가의 자세를 다지려 했다”면서 “공짜로, 맨입이 아니라 제 살을 내어야 하는 작업들을 실현한 것”이라고 했다. 3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붕어빵 값, 손님이 정해준 대로…“학생이 2천원에 5마리 좋대요”
- 2살 동생이 “아빠~” 하고 따르던 17살, 장례엔 친구 수백명이…
- ‘축구 신’ 리오넬 메시, 마지막 춤은 불멸의 역사와 함께
- 내년 상반기 ‘경제혹한’ 온다…재고 쌓이고 부자 지갑도 꽁꽁
- 우리집 도어락도 ‘수리비’만 주면 열릴텐데…믿을 건 양심뿐?
- 여기서 더 추워진다고…‘영하 15도’ 화요일 아침까지 강추위
- 인사 담당자들 “주 52시간 안 지켜도 되면? 당연히 인력 감축”
- 최악 오프닝을 최고 피날레로…메시의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
- 스쿨존에 이름 남기고 떠난 ‘동원이’…부모 “재발 방지 힘쓸 것”
- “내년 집값 더 떨어진다”…금리 인상 끝나도 경기 둔화 ‘2차 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