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나지 못해"…日 경제의 딜레마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정영효 2022. 12. 19.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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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산시장의 그늘②
기시다 '신자본주의' 구체안 속속 발표
투자로 자산소득 2배 늘려 디플레 탈출
NISA 영구화..면세 기간도 무제한으로
20년 염원 '저축에서 투자로'..성사돼도 문제
'부의 유출 가속화로 엔폭락' 예상밖 부작용
1경원 국가부채 지탱하던 구조 붕괴 가능성도
이 기사는 국내 최대 해외 투자정보 플랫폼 한경 글로벌마켓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일본은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30년'의 장기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일본을 장기침체의 늪에서 끄집어 낼 비책으로 '아베노믹스'를 내세웠다. 기시다 총리의 카드는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다.

기시다 총리가 세계 금융중심지 런던에서 "인베스트 인 기시다"라고 연설한 것도 지금부터 자신이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테니 믿고 일본에 투자해 줄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자본주의는 그동안 '말은 거창한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다행히 최근 새로운 자본주의의 세부 방안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기시다의 경제정책을 함축하는 표현은 '저축에서 투자로'이다. 2000조엔이 넘는 가계 금융자산을 투자 분야로 유치해 성장의 물꼬를 튼다는 계획이다. 

작년 말 일본의 가계 금융자산은 2023조엔으로 처음으로 2000조엔을 돌파했다. 이 가운데 54%(1092조엔)가 예금과 현금 형태로 잠자고 있다. 주식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가계 금융자산의 10%만 투자 분야로 끌어들여도 기업에 200조엔의 새로운 모험자본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게 일본 정부의 계산이다. 

'저축에서 투자로'를 실현시키기 위한 핵심 방안으로 기시다 총리는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를 대폭 개선하기로 했다. NISA는 투자차익에 일정 기간 세금을 물리지 않는 개인 투자자 활성화 대책이다. 영국의 ISA라는 제도를 본뜬 것이다.

개별 종목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일반형과 투자신탁을 통해 간접투자하는 적립식 두 종류가 있다. 일반형은 5년, 적립식은 20년간 투자차익에 대한 세금을 면제받는다. 일본 정부는 NISA 제도를 2042년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었다.

이 제도를 영구적으로 운영하고 면세 기간도 무기한으로 늘리기로 했다. 일반형은 120만엔, 적립식은 40만엔인 연간 투자 상한도 높이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NISA 개선을 통해 6월말 현재 1703만 개와 28조엔인 계좌 수와 투자금액을 5년 내 각각 3400만 개, 56조엔으로 두 배로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가계 자산이 늘면 소비가 증가해 잃어버린 30년의 근본원인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이즈 마사노부 노무라증권 선임 리서치 펠로는 “가계 금융자산의 10%인 200조엔만 저축에서 투자로 옮겨도 가계 자산이 10조엔 불어날 것”이라고 추산했다.

'저축에서 투자로'는 2003년 일본 금융청이 슬로건으로 내건 이래 20년째 일본 정부가 반복하는 구호다. 같은 구호가 20년째 반복된다는 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고민은 일본의 가계 금융자산이 20년 간의 바람대로 저축에서 투자로 움직여도 문제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일본인들이 엔화 자산을 팔아 달러 등 외환자산을 사들이고 있어서다. 국내외 개별 종목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일반형 NISA의 연간 투자한도는 120만엔이다.

지금도 투자자들은 한도 대부분을 미국 증권에 투자하고 있다. NISA를 영구화하고 투자한도를 늘리면 미국 쏠림현상이 더 심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개인 투자가들이 엔을 팔아서 달러 자산을 본격적으로 사들이면 엔화 가치는 더욱 무섭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인들의 소득을 늘려 소비와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려는 정책이 거꾸로 엔화 가치를 더욱 떨어뜨리고, 무역적자를 증폭시켜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일본 금융회사들은 고객들이 예치한 예금으로 국채를 구입한다. 현금과 예금 형태로 묶여있는 일본의 가계 금융자산 규모(1092조엔)는 현재 일본 정부부채(1255조엔)와 비슷한 규모다. 결과적으로 매년 늘어나는 일본 정부의 천문학적인 빚을 가계 예금이 매우는 구도다.

일부 전문가들은 '저축에서 투자로'가 실현돼서 예금이 줄어들면 일본 금융회사들의 국채 수요에 의지해 정부 빚(국채)을 소화해오던 구조가 붕괴되는 시나리오를 우려한다. 예금이 줄어 새로 발행한 국채를 자국에서 소화하지 못하면 일본 정부는 해외 투자가들에게 국채를 사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해외 투자가들은 "채권을 사줄 테니 2016년 이후 마이너스인 기준금리부터 올리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금리를 올리면 채권 가격이 떨어져서 더 싼 값에 살 수도 있고, 채권을 보유하는 동안 이자수익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기준금리 인상은 자칫 재정파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다. 금리가 오르면 1255조엔에 달하는 정부 부채의 이자도 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본 정부는 국채 이자로만 매년 8조엔을 낸다. 금리가 1~2% 오르면 2025년부터 연간 이자부담이 3조7000억~7조5000억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 5%를 조금 넘었던 외국인의 일본 국채 보유 비율은 지난해 13.4%까지 늘었다. 보유 비율이 높아질 수록 외국인의 입김도 커질 수 밖에 없다. '저축에서 투자로'가 실현돼도 문제, 실현되지 않아도 문제인 이유다.

늪에 빠진 자동차의 가속페달을 있는 힘껏 밟는데 브레이크가 같이 걸리는 골치아픈 상황. 아무리 몸부림쳐도 좀처럼 디플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 경제의 딜레마다. 그리고 일본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는 한 번 디플레이션과 침체에 빠진 경제를 되살리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웃 한국에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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