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계 첫 고준위 방폐장 가동 핀란드 “40년 신뢰의 결과물”
“핀란드 에우라요키시(市)의 온칼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건설은 지난 40년 동안 정부와 규제 기관, 원전 운영 기업, 국민들이 신뢰를 쌓은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투명한 정보공개와 주민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이 신뢰의 비결입니다.”
인구 1만명의 작은 도시 핀란드 에우라요키시는 세계 최초로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고준위 방폐장)이 곧 가동을 앞두고 있다. 1966년 영국에서 첫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된 이후 방사성폐기물 처분은 원전 보유국의 최대 난제다.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추진하던 많은 국가들이 주민과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히고 정치적 합의를 이루지 못해 번번히 실패했다.
한국에서 고준위 방폐장 건립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한국은 현재 원전 부지 내에 있는 임시저장시설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보관하고 있다. 고리·한빛·한울 등 초기에 건설된 원전의 경우 임시저장시설 포화까지 10년도 남지 않았다. 고리·한빛은 2031년, 한울은 2032년 임시저장시설 용량이 끝난다.
특히 고리 2·3·4호기와 한울 1·2·4·6호기, 월성 2·3·4호기는 포화율이 90%를 웃돌고 있다. 이밖에 신월성은 2044년, 새울은 2066년에 각각 임시저장시설이 포화된다. 원전의 지속적인 사용을 위해 고준위 방폐장이 반드시 건설돼야 하는 상황이다. 한국은 1986년부터 고준위 방폐장 건설 논의를 시작해 총 아홉 차례 부지 선정을 시도했으나 모두 무산됐다.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주한 핀란드 대사관에서 만난 베사 라까니에미 에우라요키시 시장은 고준위 방폐장을 지을 수 있었던 비결로 투명한 정보 공개와 적극적인 소통을 꼽았다. 베사 시장은 고준위 방폐장 건설 노하우를 한국 정부 기관과 원전 지역 주민들에게 공유하기 위해 최근 방한했다.
베사 시장은 “핀란드는 1977년부터 원전 가동을 시작했다. 원전 가동을 시작한 이듬해부터 원전 운영 기업들이 폐기물 처분장 건설을 위한 기금을 축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1983년 고준위 방폐장 건설 논의를 시작해 2001년 부지를 확정했고 2015년 처분 시설 허가를 받았다. 2016년에 건설을 시작해 2025년 최종 처분을 시작한다는 계획이다.
온칼로 고준위 방폐장은 로봇이 사용후핵연료를 철과 구리로 만든 캡슐에 넣은 뒤 450m 지하 터널로 옮겨 묻을 예정이다. 이렇게 6600톤(t) 분량의 사용후핵연료를 10만년 동안 봉인한다.
방사선 폐기물은 크게 고준위와 저준위로 나뉜다. 사용후 핵연료는 오랜 시간 방사선과 열을 방출하기 때문에 고준위로 분류된다. 소모성 장비나 작업복 같이 핵 물질의 영향을 받아 소량의 방사선을 배출하는 폐기물은 저준위다. 사용후 핵연료는 영구 처분까지 3단계를 거친다. 냉각시설을 갖춘 임시 저장시설에 보관해 3~5년간 상태가 안정되길 기다린다. 상태가 안정된 사용후 핵연료는 영구처분을 위한 중간저장시설로 이동한다. 영구처분은 곧바로 격리·보관하는 직접 처분과 재처리(재활용) 후 처분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온칼로 고준위 방폐장은 직접 처리 시설이다.
베사 시장은 고준위 방폐장 건립 논의 과정에서 국민에게 정보를 공유하고 건립 예정지 주민들과 오랜 기간 소통을 이어갔다고 했다. 40년 간 원전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안전하게 운영한 덕분에 국민이 정부와 원전 기업을 굳게 믿고 있다고 한다. 에우라요키 시민은 정기적으로 원전 운영 등에 관한 뉴스레터를 받고, 당국과 시는 정보 제공을 위한 세미나와 주민 공청회를 수시로 연다.
초기 원전 운영에 부정적인 국민 여론이 과반수 이상이었으나, 현재 원전 찬성 여론이 60%에 달한다. 베사 시장은 “핀란드는 암반 자체가 안정적이어서 지진 가능성이 낮다”며 “또 40년 동안 원전 운영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했고 안정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어서 일본 후쿠시마 사고에도 큰 동요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핀란드 정부는 온칼로 부지 선정 과정에서 주민 대상 공청회를 수시로 열고 주민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줬다. 40년 간 쌓은 신뢰와 당국·원전기업의 소통 노력으로 고준위 방폐장 건립을 위한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 베사 시장의 설명이다.
고준위 방폐장 주민 수용성을 두고 꾸준히 제기되는 문제는 지역 주민에 금전적인 혜택을 제공하는지 여부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3건의 고준위 방폐장 건립과 관련된 법안에는 모두 인센티브 제공 방안이 담겼다. 그러나 핀란드는 에우라요키 시민에 고준위 방폐장 건립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고준위 방폐장 건립같은 중대한 국가 사업을 돈으로 해결한다’는 인식 때문에 이런 혜택에 부정적이라고 한다.
베사 시장은 “시민들은 온칼로 건설로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지역 경제도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원전 기업과 직원들이 세금을 납부하면 시의 세수가 늘어난다. 이렇게 늘어난 세수는 다시 지역 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이런 안정적인 세수를 확보한 덕분에 에우라요키 시민들은 핀란드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지방세를 내고 있다고 한다.
핀란드는 고준위 방폐장 건립에 착수한 이후 정부의 입장이나 방향성이 바뀌거나 우선 순위에 밀려 사업이 지연된 경우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한국은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고준위 방폐장 건립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베사 시장은 당국과 원전 기업의 일관된 정책 방향성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기본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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