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강철서신' 김영환 "北민주화에 수십명 총살돼…고통스럽다"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붕괴로 신념 뿌리째 흔들려"
"1986년 안기부서 고문받을 때 고통으로 짐승 상태였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기자 = 김영환(59)은 집요한 혁명가다. 대학교 입학 이후 10년간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몸을 던졌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25년간 북한 민주화 혁명을 위해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하고 있다.
40년 가까이 '혁명'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지난 13일 서울 영등포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에서 북한의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북한 활동가 등 수십 명이 총살돼 고통스럽다고 했다. 남한에는 1990년대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라도 지하당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그는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제로에 불과하다면서 강경일변도보다는 협상할 것은 협상하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1982년 서울대 법학과에 들어간 그는 학생운동에 투신해 주체사상 학습서라는 '강철서신'을 작성해 운동권에 배포했다. 주사파의 대부로 부상한 그는 1991년 밀입북해 묘향산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돌아와서는 1992년에 북한의 지시를 받는 민혁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80년대 후반 동구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기존 사회주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상태였다. 그는 정통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노골적으로 공표하다가 급기야 1997년에는 민혁당을 해산했다. 이어 1999년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만들어 북한 인권 개선과 북한 정권 붕괴에 나섰다. 그는 중국에서 탈북자 등을 대상으로 북한민주화운동을 전개하다 2012년에 114일간 중국당국에 구금됐다. 이 기간에 그는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경상북도 안동시에 태어나 4살 때 대구로 이사 왔다가 중학교 2학년 말께 서울로 옮겼다. 지방의 교육환경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고, 경제활동도 쉽지 않아서 부모님이 이사하신 것 같다.
--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나.
▲ 전화번호와 전화기를 함께 매매하는 일을 하셨다. 당시에는 전화번호가 제한적으로 발급되면서 그 사업이 상당히 활황이었다. 아버지는 그 이후에 이런저런 사업을 하셨는데. 뚜렷하게 성공하신 것은 없다. 집안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재산이 많았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있었고 부모님이 검소하게 사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전업주부였다.
-- 할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기에 돈이 많았나.
▲ 농기계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셨고, 농업근로자를 고용해 농업도 하셨다.
-- 초중고 시절 어떻게 지냈나.
▲ 나는 주로 책을 읽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에 책이 700∼800권 정도 있었는데, 전부 읽고 시립도서관까지 가서 다른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 때는 소설책을 많이 봤고 중학교 때는 데카르트를 비롯한 철학책도 읽었다. 물론 철학을 잘 이해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 초중고 시절 학업성적은 어떠했나.
▲ 거의 탑(1등) 수준이었다.
-- 부모님의 성격은 어떠했나.
▲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인자하신 분이었다. 자식 일에 관여하시지 않았다. 어머니도 인자하신 분으로 나는 기억하는데, 동생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엄격한 분이었다는 게 동생들의 주장이다. 나는 종일 책만 읽으니 상대적으로 관대하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부모님은 학생운동을 반대하지 않았나.
▲ 부모님은 박정희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나한테 시위하지 말라는 말씀을 안 하셨다. 학생운동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해 말리거나 적극적으로 비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김일성주의에 경도됐다는 것을 알았다면 뭐라고 하셨을 것이다. 나는 그 사실(김일성주의 경도)을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활동했다.
-- 부모님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데.
▲ 아버지가 이승만 정권 시절에 대학을 다니셔서 비판 의식이 강했고 정직성을 중시하는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대의를 알지만 너의 안위를 생각해서 조심하라"는 말을 못 하신 것 같다.
-- 부인은 학생운동을 하다 만났나.
▲ 아내도 학생운동을 했지만, 그때는 서로 잘 몰랐다. 청년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다 알게 돼 결혼했다.
-- 아내는 무슨 일을 했나.
▲ 아내는 직업을 계속 갖고 있었다. 결혼할 때는 만화 가게를 운영했고 그다음에는 무역회사 운영 등 여러 일을 했다. 우리 집 생활비는 주로 아내가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 흡연은 안 하나.
▲ 흡연한 적이 없다. 당시 학생운동권 사람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거의 모두 담배를 피웠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가 담배를 자주 피웠는데, 어머니가 이를 싫어하셨던 영향도 있을 듯하다. 술은 체질상 못 마신다.
-- 태어나서 한 번도 욕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 중국 감옥에 있을 때 중국인 재소자들이 한국의 가장 대표적 욕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평생 욕설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건 내가 못 하겠다"고 했다.
-- 건강은 어떤가.
▲ 2001년에 위암 수술을 했다. 지금은 괜찮다. 건강관리를 위해 등산, 평지 트레킹을 하고 가끔 수영과 요가도 한다. 하루 루틴은 오전 5시에 일어나 명상, 신문보기 등을 하고 오후 11시 30분에 잠든다.
--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은 무엇인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이다. 늘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회를 바라보려 한다. 일상생활에서 나는 정직함을 중시한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생각해보는 습관은 장점인 것 같다. 신중한 성격은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사람들은 내 인생 역정에 대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느냐고 하는데, 좀 더 결단력 있게 행동했었으면 하는 과거 순간들이 있다.
--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 북한 주민, 아프리카 사람들을 비롯해 극단적인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런 쪽에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다.
-- 인생에서 역경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989년 전후가 가장 큰 역경이었다. 나는 투철한 사회주의 운동가라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그 신념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전에 헝가리, 폴란드 등에서 소요가 있었지만 그럴 수 있다고 봤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정신적) 동요가 엄청나게 심해졌고 루마니아가 붕괴하면서 극단적 상태로 갔다. 당시 우리는 사회주의가 흔들리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이었던 루마니아는 건재하지 않느냐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는데, 그 나라는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무너졌다.
-- 고문도 받았나.
▲ 2012년 중국에 구금됐을 때보다는 1986년에 한국의 안기부(현 국정원)에서 고문받는 게 고통스러웠다. 47일간 조사를 받았는데, 이 중 27일간 고문을 받았다. 주로 구타였다. 물고문도 당했다. 일반 사람들은 그 고통을 상상하기 힘들다. 일시적 고통이 반복되다 보면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든 상태에 빠진다. 나중에는 거의 짐승처럼 된다. 고통을 받고, 안 받고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전기고문도 당했는데, 몸이 찌릿찌릿한 게 아니고 온몸에 통증이 온다.
-- 고문받는 사람의 비명을 듣는 것도 무섭다고 하는데.
▲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나는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를 몇 번 들었다. 옆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비명을 들은 것은 내가 들은 것의 20∼30배는 됐을 것이다. 나는 고문당할 때 비명을 많이 지르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거의 매일 고문을 받았기에 옆방에서 나의 비명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언제였나.
▲ 북한 인권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2012년 전이다. 당시는 북한 내부의 혁명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활발하게 뛰었던 시절이다. 일부 사람들은 주사파가 최전성기였던 시절을 나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
▲ 그런 일은 수없이 많다. 북한 인권운동 과정에서 제대로 판단했다면 그 사람이 잡히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북한에서 워낙 인명 피해가 컸다.
-- 남한에 주체사상을 공급한 것은 후회하지 않나.
▲ 주체사상을 공급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것에 대한 반성도 여러 차례 했다. 내가 쓴 친필 반성문 사진이 조선일보에 1면 톱으로 실린 적도 있다. 후회는 반성과 다르다.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주의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던 시기였다. 주사파라는 명칭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흐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흐름에서 내가 리더 역할을 한 게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그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데 데 내가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대학교 운동 서클(동아리)에는 스스로 들어갔나.
▲ 서울대에 입학하자마자 포스터를 보고 고전연구회에 들어갔다. 자발적으로 갔다. 운동서클인지 모르고 들어갔지만 금방 운동서클인 것을 알았다. 어차피 시위에 참여할 생각이 있었기에 잘 됐다고 생각했다.
-- 주체사상 학습서라는 '강철서신'은 북한 방송을 듣고 썼나.
▲ 그렇지 않다. 방송을 듣기 전에 썼다. 강철서신에는 주체사상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강철서신이 북한 방송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북한 방송을 꾸준히 들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강철서신은 주로 나의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 주체사상은 어떻게 접하게 됐나.
▲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선배들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때 북한은 거론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면서 북한을 빼놓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북한과 손을 잡든지, 아니면 북한을 대체해야 하든지 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결국,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도서관에 있던 관변 단체들의 자료를 열람하다 북한, 소련, 동유럽을 전공하는 연구자들만이 볼 수 있는 자료집을 구해 읽었다. 레닌과 스탈린, 김일성, 김정일 이름으로 된 글들이 거기에 있었다. 도움이 됐다.
-- 주로 들었던 북한 방송은 무엇인가.
▲ 단파 라디오를 통해 북한 방송을 들었는데, 구국의소리 방송은 뻔하고 식상했다. 평양방송 중 김일성방송대학이라고 있었는데, 깊이가 있는 내용도 나왔다. 남한의 혁명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이었다.
--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붕괴가 뚜렷했는데, 1992년 지하당인 민혁당을 만든 이유는.
▲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개인적으로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레닌 또는 스탈린식 사회주의는 안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북한 방식도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새로운 모델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연구만 할 수는 없었다. 실천하면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판단해서 민혁당을 만들게 됐다. 민혁당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교조주의적으로 북한식 이념을 추종하지는 않았다. 하영옥(당시 민혁당 중앙위원)이 검찰에서 진술한 것을 보니, 민혁당을 처음 만들 때부터 내가 정통 공산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민혁당 강령 등을 보면 공산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 본인 생각과 달리, 민혁당 전체 분위기는 북한을 지향한 것이 아닌가.
▲ 그래서 갈등이 생겼다. 나는 민혁당 내부 기관지, 외부의 잡지 등을 통해 점점 더 노골적으로 정통 사회주의를 비판했다. 그랬더니 (하영옥이) 자기 조직원을 시켜서 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 그들은 사회주의가 무너졌는데도 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인가.
▲ 당시에 북한 말고는 남아 있는 사회주의가 없었다. 그들은 북한 사회주의에 대해 신뢰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내가 북한에 간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북한이 이질적인 사회주의여서 그들과 토의하다 보면 새로운 사회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 김일성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나.
▲ 1991년 북한에 밀입북했다. 김일성은 업무를 거의 김정일한테 넘겨주고 묘향산에 주로 가 있었다. 만나 보니 김일성은 평소에 많이 들었던 대로였다. 인자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냉혹하고 냉철한 스타일이다. 그는 여러 차례 잔혹한 숙청을 했다.
-- 북한에서 돌아올 때 미화 40달러와 권총 두 자루를 갖고 왔다고 하는데, 권총은 어디에 쓰는 것인가.
▲ 내가 직접 가져오지 않았다. 남한의 드보크(주로 땅속에 묻어놓는 방수 처리 케이스)를 통해 받았다. 내가 권총을 휴대한 적은 없다. 그냥 묻어놨다. 북한의 공작원은 드보크를 발굴할 때도 호신용으로 권총을 앞에 두고 작업을 하라고 권하는데, 그것은 더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갑자기 도주할 때는 권총을 갖고 있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 한국에 아직도 지하당이 있다고 보는가.
▲ 지하당이 있을 것이다. 민혁당 같은 대규모는 불가능하지만, 소규모 지하당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 주사파 잔존 세력이나 그들의 자녀들이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 북한 민주화 운동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북한 실태가 참혹했다. 어마어마한 분노가 일어나서 참을 수 없었다. 이런 끔찍한 체제를 방관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 그런 운동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 국가도 하고, 민간도 해야 한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는 미국의 기금이나 단체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도 하고 국내의 독지가나 개인들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한다. 한국 정부로부터 받는 것이 있지만 비중이 크지 않다. 과거에는 기업들의 지원도 있었으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태 이후 사라졌다.
-- 북한 인권 문제는 심각한가.
▲ 반체제 인사로 찍히면 잔인하게 처형된다. 북한이 소련에서 전투기를 사 올 때 인수하러 갔던 조종사들 가운데 누군가가 반체제로 보이는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발각돼서 발언 당사자는 물론 암묵적으로 동조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까지 총살됐다. 그 인원이 20명이나 됐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독서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몇 마디 나왔다고 해서 모임에 가담한 사람들 모두가 희생된 적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본 사람들에 대한 처벌 수위가 높아졌다. 한 편을 보면 징역 5년, 두 편을 보면 징역 10년 등의 처벌을 받는다. 직업적으로 드라마를 판매하면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 선고될 수 있다.
-- 탈북자에 대한 처벌은 어떤가.
▲ 과거에는 남한행 목적이 없는 단순 탈북자의 경우 단련대(노동과 교육을 실시하는 수용소)에 6개월 정도 수용하는 처분이 대부분이었다. 이제는 처벌이 강화됐다. 특히 코로나 기간에는 국적을 묻지 않고 무조건 현장에서 총살했다.
-- 탈북한 사람이 다시 북한에 들어가는 이유는.
▲ 가족을 빼내기 위해서 또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 다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한국에서 빚을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입북하는 사례도 있다. 한국 내 범죄와 연루돼 돌아가기도 한다. 다시 입북하는 경우 북한당국이 죽이지는 않는다. 선전 활동 강연에 끌고 다닌다.
-- 좌파 진영이 북한 주민 인권에 관심이 많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 북한 정권과의 협상을 위한 전술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강경 주사파와 척지기 싫어서 그러는 측면이 더 큰 것 같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우파에 대한 굴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북한 정권이 붕괴하면 한반도에 혼란만 심해지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본다. 내 생각은 다르다. 혼란으로 인한 희생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면 역사발전은 있을 수 없다. 혼란을 고려해서 잔혹한 독재정권을 못 본 척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일이다.
-- 북한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방해받은 적은 있나.
▲ 좌파 정부 시절에 정부나 정부 외곽 기관으로부터의 지원이 대부분 끊겼다. 내가 하는 강연도 80% 이상 줄었다.
--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다 희생된 사람이 많은가.
▲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총살당한 사람이 수십 명에 이른다.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분들은 생사를 알 수 없다.
--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어떤 곳인가.
▲ 그렇게 극단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곳에서 10년간 살다가 나오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 6개월, 1년 정도 생활을 하다 보면 적응이 되고 요령도 생긴다. 개구리도 잡아먹는데, 어디에 가면 개구리가 많은지 알게 된다. 체질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일찍 죽게 된다.
-- 수용소에서 개구리를 잡아먹어야 하나.
▲ 개구리는 양호한 편이다. 쥐도 잡아먹는다. 제공되는 밥이 너무 적고 옥수수 외의 다른 부식은 없기 때문이다.
-- 북한 핵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 밸런스가 중요하다. 북한에 비핵화 원칙을 분명히 천명할 필요가 있는데, 강경 일변도로 가서는 안 된다고 본다. 협상할 때는 협상을 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야 한다는 게 나의 일관된 주장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할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전제로 협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김정은의 리더십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김정일 시절에는 여러 분야가 방치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김정은이 일일이 챙기다 보니 좋아지는 측면이 있다. 시장에서 관료들의 횡포가 줄었다. 시장에서 장사하기가 편해진 것이다. 경제도 좋아졌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최고 수준으로 발동돼 있는데도 공장 가동률이 높아졌다. 과거에는 경공업 제품의 90%를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는데, 지금은 60∼70%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사회 곳곳에 공포 분위기가 형성돼서 우리 단체의 활동이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이 5분의 1이나 10분의 1로 줄었다. 과거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다 발각돼도 뇌물로 해결하면 됐는데, 이제는 안 통한다.
-- 김영환이 변절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 사람은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생각이 변했는데도 오히려 그걸 감추고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게 변절이다. 그들이 세계 변화나 문명 발전에 눈을 열고 끊임없이 학습하고, 새 시대에 발맞춰 가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 정계에 나갈 생각은 없나.
▲ 2008년부터 보수당으로부터 정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지난 총선에서도 국민의힘 공천위원장이 지역구에 출마하라고 권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정치에 익숙하지 않고 늦은 나이에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 윤석열 정부에 바라는 것은.
▲ 북한 문제는 평소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북한 문제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민들도 북한 인권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 서울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엄청나게 아프고 인권이 좋지 않은 동포들이 있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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