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 첫눈
기자 2022. 12. 19. 03:04
곡기를 끊고
누운 사람처럼
대지는 속을 비워가고
바람이
그 꺼칠한 얼굴을
쓸어본다
돌아누운 등 뒤에
오래 앉았는 이가 있었다
아― 해봐요 응?
마른 입술에
떠넣어주던
흰죽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허은실(1975~)
겨울은 살아 있는 것들에겐 시련의 계절이다. 생존을 위해 활동을 최소화하고 에너지 소모를 줄인다. 식물은 나뭇잎을 떨구거나 겨울눈으로, 동물은 잠을 자거나 알·애벌레·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난다. 생기를 잃은 대지는 “곡기를 끊고/ 누운 사람” 같다. 아니 스스로 곡기를 끊고 오래 돌아누운 사람. 죽을병에 걸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 많이 서운한 듯하다. 몸이 아프면 평소 아무렇지도 않던 말과 행동이 서운하다. 달래느라 진을 뺀다.
오랜 설득에 얼굴 꺼칠한 사람이 흰죽 한 숟가락을 받아먹는다. 한 번이 어렵지, 이후는 수월하다. 시인은 흰죽과 ‘첫눈’을 대비한다. 탁월한 감각이다. 첫눈은 서설, 즉 상서로운 눈이다. 흰죽을 받아먹은 환자가 금방 회복할 것임을 암시한다. 약속과 다짐도 오간다. 시인은 시 ‘반려’에서 “이제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 책임감으로 병과 서운함으로 드러누운 사람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곡진한 사랑에 병도, 서운함도 씻은 듯이 낫는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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