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터치] 아무튼, 오타
오타가 났다. 도대체 어디 숨었다가 이제 나타난 걸까. 그것도 딱 펼치니 책의 서문에서 보란 듯이 당당하다. ‘읽기’라고 친다는 것이 ‘읽지’가 되어 있다.
서너 번 종이 교정지와 최종 화면 교정을 보는 동안에도 ‘기’ 자에 달린 거스러미 같은 사선의 정체와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필이면 가장 마지막에 덧붙인 그 낱말이 외면당한 서러움을 앙갚음이라도 하듯 내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게 할 줄이야.
잘못된 한 획의 위력은 대단했다. 출간된 1000권의 책을 거실 바닥에 줄줄이 펼쳐놓고 이틀 동안 커터 칼로 긁어내기 시작했다. 내 꼴이 마치 문자를 제대로 받들지 못한 불경죄를 저지르고 독방에 구금된 죄수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알량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남의 오타나 쪽쪽 집어내고 틀린 문장이나 지적해대던 형벌을 오지게 받은 것인가. 일상의 과업을 뒷전으로 미룬 채 정신일도하여 하사불성을 되뇌며 오타의 티끌을 걷어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이런 내 신세를 위로해 준 어느 작가의 오타 요정설이다. 오타 요정은 자간과 행간뿐만 아니라 자판이나 모니터 속과, 심지어 긴 손톱과 뚱뚱한 손가락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평소 숨어 있길 즐기다가 오케이 사인 후에 저절로 나타나서 어마무시한 위력으로 작가의 등골을 서늘하게 때리고 만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오타 자연 발생설이라는 가설이 잡초 자연 발생설의 이론과 병행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없던 글자가 감쪽같이 자라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저장한 최종파일은 이미 최최종이 되었음에도 다시 ‘최’ 자가 그 앞에 더해졌다.
하기야 누구처럼 시부모님께 문자 드리면서 ‘오래 사세요’를 ‘오래 사네요’라고 했다든지 ‘엄마’를 ‘임마’라고 치고 ‘인감증명서’를 ‘인간증명서’라고 오타 낸 사연들은 일순간 피가 식지만, 즉시 말이나 글로써 사죄와 수정이 가능하다. 반면, 출력된 인쇄물은 끈질긴 생명력을 드러낸다. 폐기가 아닌 이상 백 년이고 천 년이고 한 번 박힌 오타는 본문 깊숙이 굴을 파고 뿌리를 내린다. 그러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 세상에 오타 없는 책은 없다고 하는 말도 있지 않은가. 베스트셀러인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에도 아이스크림을 아이스트림이라고 해 놓은 것을 보았다. 이걸 처음 발견했을 때 마치 라디오 프로그램 경품에라도 당첨된 것같이 짜릿했던 기분은 또 무슨 이유였을까.
맞춤법이 틀린 것은 두뇌가 모르고 저지른 잘못이 크지만, 오타는 알고서도 방심한 손가락의 실수가 대부분이다. 맞춤법 오류는 무식이라는 죄명으로 글쓴이를 비난하겠으나, 문장의 오타는 오히려 글자가 뭇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오타 섞인 글을 읽는 자들은 저마다 퍼즐 게임을 하듯 이리저리 문맥을 맞추어 뜻을 해독해낼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동안 인간으로부터 구속되고 부림을 당했던 글자들의 저항과 탈주가 아닐는지. 흡사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인 우리의 바틀비 씨가 상사의 요청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고 단언하는 것처럼.
하지 않겠다, 못하겠다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안 하는 편을 선택한 나의 왼손 두 번째 손가락도 몸의 주인이 시킨 단어를 능청스레 ‘안치는 것’으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밤낮으로 혹사당한 손가락들의 반란이다. 그것을 왜 또 네 번째 손가락이 나서서 엉뚱한 자음을 쳤느냐고 따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그 손가락 역시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고 할 게 분명하니 그냥 한숨이나 푹푹 내쉬는 수밖에.
아무튼 자신이 저지른 오타는 공포 그 자체지만 잘난체하던 인간을 고개 숙이게도 만든다. 아집을 내려놓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 개의 오타를 고치고 난 뒤에 한 편의 글감까지 건져냈으니 이 또한 손해만 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의 왼쪽 손가락처럼 안 하는 것을 선택한 세상의 모든 용기 있는 바틀비들에게도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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