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에 스며든 ‘안개’처럼… 영화인에 영감주고 싶다”

이호재 기자 2022. 12. 1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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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각본집 ‘안개’ 내
영화 ‘헤어질 결심’은 영화 ‘안개’처럼 안개 낀 도시에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CJ ENM 제공
“저를 서울로 데려다주시겠어요?”(하인숙)

안개가 짙게 깔린 무진의 밤. 서울 소재 제약회사 상무 윤기준(신성일)은 무진중학교 음악교사 하인숙(윤정희)에게 호감을 느낀다. 하지만 윤기준은 서울에 있는 아내 때문에 하인숙에게 다가가기를 망설인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하듯 안개 속 둘의 대화는 공허하게 울린다. 윤기준이 도망치듯 무진을 떠나는 장면에서 노래 ‘안개’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소설가로 유명한 김승옥 작가는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며 영화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김승옥 작가 제공
김수용 감독(93)이 1967년 연출한 영화 ‘안개’다. 김승옥 작가(81)가 1964년 발표한 단편소설 ‘무진기행’이 원작이며 각색도 김 작가가 했다. 김 작가의 첫 시나리오 작업으로, 영화는 서울에서만 15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안개’에서 윤기준(신성일·오른쪽)과 하인숙(윤정희)이 바닷가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을 계기로 ‘영화인 김승옥’이 재조명받고 있다. ‘안개’의 무진처럼 ‘헤어질 결심’도 안개가 가득한 바닷가 소도시 이포가 배경이다. 정훈희가 부른 노래 ‘안개’는 ‘헤어질 결심’에 나와 다시 화제가 됐다. 영화 말미에는 ‘안개’를 1975년 리메이크한 송창식이 정훈희와 함께 부른 ‘안개’가 흘러나와 감탄을 자아냈다.

김 작가의 각본집 ‘안개’, ‘도시로 간 처녀’(스타북스)가 10일 출간됐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 작가는 말하기가 수월하진 않지만 글과 말로 일상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최근 허리 수술을 받고 집에서 치료 중인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

―각본집을 낸 이유가 궁금하다.

“올해는 단편소설 ‘생명연습’(1962년)으로 등단한 지 60년이 되는 해다. 이를 아는 스타북스 대표가 출판하고 싶다고 했고 의미가 있겠다 싶어 수락했다.”

―‘영화인 김승옥’은 요즘 세대에겐 낯설다.

“서울대 불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60년대, 유럽을 강타한 영화 사조 ‘누벨바그’(새로운 물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의 ‘감자’를 직접 각색하고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1968년 상영했다. 같은 해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1934∼2022)의 소설 ‘장군의 수염’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로 대종상 각본상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영화 작업이 부담되지 않았나.

“각색한 작품들 상당수는 문학이 원작이다.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문학의 길’에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다. 영화인이 되고 싶은 젊은이가 내 각본을 보고 영감을 얻는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단편소설 ‘무진기행’을 바탕으로 영화 ‘안개’ 각본을 썼다.


“각색은 감독의 요구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감독이 원하는 쪽으로 작업했다.”

―‘헤어질 결심’을 계기로 영화 ‘안개’도 주목받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노래 ‘안개’가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가 됐다”고 말했다.

“노래 ‘안개’와 관련해 선명한 기억이 있다. 당시 작곡가 이봉조 선생(1931∼1987)이 곡을 만든 뒤 색소폰 연주를 전화로 거듭 들려줬다. 곡을 들으며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가사를 썼다. 발표된 노래를 보니 제가 작사한 원문을 약간 손질했더라.”(※‘안개’ 작사가는 박현으로 나온다. 김 작가는 이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1981년 각본을 쓴 영화 ‘도시로 간 처녀’도 각본집을 출간했다.

“버스 회사에서 벌어지는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는 버스 안내양의 분투를 그린 영화다. 원작 없이 바로 시나리오를 썼다. 수시로 버스 회사에 가서 살피고 종일 버스에 앉아 운전기사와 안내양을 관찰했다.”

―각본집을 계속 펴낼 계획인가.

“집필한 각본 16편을 모두 출판하고 싶다. 내가 각본을 쓰고, 배우 윤여정(75)이 주연한 영화 ‘충녀’(1972년) 각본을 특히 펴내고 싶다.”

―집필 중인 작품이 있는가.

“건강 때문에 소설이나 시를 쓰는 게 쉽지 않다. 지인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몸이 회복되면 개인전을 열고 싶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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