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기 황실의 위엄 세운 ‘궁중예술의 정수’ 무대에

이강은 2022. 12. 18.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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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진연’ 120년 만에 재연
고종 재위 40년 맞아 1902년 개최
온종일 잔치 100분 공연으로 재구성
당대 최고의 궁중무용·음악 선보여
객석 위치를 황제의 어좌로 설정해
고종의 시선으로 공연 관람케 구성
“황제 폐하께 말씀 올립니다. 명년(내년)은 폐하의 성수가 ‘망륙(육순을 바라보는 나이, 51세)’이 되시고 보위에 오르신 지 40년이 되는 두 가지 경사가 겹친 경사스러운 해입니다.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명년에 내진연 및 외진연의 절차를 전례대로 마련하도록 명하시어 주시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빕니다.”
국립국악원이 조선왕조 500년과 대한제국 시기를 통틀어 마지막 궁중 잔치인 ‘임인진연’을 120년 만에 공연 작품으로 재연해 무대에 올렸다. 관객이 옛 고종황제의 시선에서 잔치를 즐기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공연의 한 장면. 국립국악원 제공
1901년 11월12일(음력) 황태자(훗날 순종)는 고종황제가 겹경사를 맞는 이듬해 진연(進宴·성대한 궁중 잔치)을 개최하자고 예소(황태자가 올린 상소)한다. 하지만 나라는 열강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백성 삶도 어려운 대한제국 처지를 감안해 고종황제는 이렇게 말린다. “너의 상소를 보고 너의 정성을 잘 알았다. 수명은 하늘이 준 것이요 우연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지금은 백성들에 대한 일이 황급하니 이처럼 여유 있는 일을 할 겨를이 없다. 청한 일은 윤허하지 않으니 헤아리기 바란다.”

하지만 황태자는 다음날 두 번째 예소를 올리고 역시 거절당하자 그 다음날 신하들을 거느리고 거듭 간청한다. 그렇게 다섯 번째 예소가 올라오자 고종황제는 11월15일 ‘간소화’를 조건으로 마지못해 진연을 윤허한다.

이후 1년가량 지난 임인년 11월8일(1902년 12월7일), 조선왕조 500년과 대한제국 시기를 통틀어 마지막 궁중 잔치인 진연이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열렸다. 급변하는 개화기에 황실 위엄을 세우고, 엄격한 위계질서를 드러내는 대규모 국가 의례를 통해 대한제국이 자주 국가임을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도 담겼다고 한다.
이 잔치가 120년 만에 처음 재연됐다. 지난 16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막한 ‘임인진연’은 우리나라의 마지막 궁중 잔치에 예술적 가치와 의미를 담아 무대에 올린 것이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개막 전날 기자간담회에서 “임인진연은 120년 전 황제에게 올린 우리 민족의 최고로 정제된 예술작품”이라며 “그 당시 최고 예술가들이 만든 수준 높은 궁중예술을 국민 모두가 함께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무대 공연용으로 재창조했다는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임인진연’은 120년 전 잔치 내용이 상세하게 담긴 기록유산 ‘진연의궤’와 병풍화 ‘임인진연도병’ 등을 바탕으로 엄격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졌다. 1902년 당시 온종일 치러졌던 잔치를 100분 분량으로 재구성했다. 관객이 음악과 무용에 집중하도록 지나치게 복잡하고 긴 의례와 음식을 올리는 절차 등은 생략했다. 국립국악원 정악단과 무용단은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 예법에 맞춰 공연을 선보인다. 궁중무용은 봉래의, 헌선도, 몽금척, 향령무, 선유락, 궁중음악은 보허자, 낙양춘, 해령, 본령, 수제천, 여민락, 헌천수 등이 펼쳐진다. 옛 궁중에서만 선보였던 무용과 음악이라 요즘 관객들에겐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왕가의 잔치를 눈앞에서 보는 경험 자체가 색다른 맛으로 만족감을 준다.

주렴(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 등을 활용한 무대와 황태자 및 황태자비, 영친왕, 좌·우명부, 종친, 척신 등이 착용한 화려한 의상은 실제 진연을 보듯 정교하고 생생하다.
특히 이번 공연은 객석을 황제의 어좌(御座)로 설정해 관객이 마치 고종황제가 된 듯한 기분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박동우 연출(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은 “관객분들이 당시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볼 수 있도록 했다”며 “이는 당시 대한제국과 달리 현재의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는 뜻을 담았다”고 말했다.

당초 ‘임인진연’은 지난 3월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확산에 8월로 미뤄졌다가, 공연 직전 폭우로 국립국악원 시설 일부가 침수되면서 12월에 열리게 됐다.

박 연출은 “120년 전에도 콜레라 창궐과 행사 장소의 시설 문제로 임인진연이 두 번 연기됐다가 12월에 진행됐다”며 “이번에도 (우여곡절 끝에) 12월에 공연을 올리게 돼 참으로 기묘한 우연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공연은 오는 21일까지.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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