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팔레트] ‘도덕적 모험’을 넘어
[이현석의 팔레트]
이현석 | 소설가·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인도의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는 2015년 시카고대학에서 기후위기와 문학의 관계에 대한 특강을 했다. 강연 내용은 책으로 나왔고, 국내에도 <대혼란의 시대>(2021)로 번역·출간됐다. 책에 따르면 고시는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역에서 보낸 유년기부터 기후변화를 체감해왔다. 그러나 기후위기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온 그도 이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쓴 적은 없었다.
작가의 관심사는 작품에 투영되기 마련이나 고시는 기후변화를 배경 이상으로 등장시키지 못했다. 괴리를 곰곰이 따져본 그는 이 간극이 호오의 문제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형식에 내재한 저항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고시는 소설이,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다양한 픽션이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서사에서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고 말한다. 예컨대 아무 복선 없이 헤어진 연인을 갑자기 만나는 장면을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다고 가정해보자. 극에 몰입하던 우리는 이것을 너무나 있지 않을 상황으로 여기게 된다. 현실의 우연은 그저 받아들일 뿐이지만 극에서 우연을 보여주려면 작가는 그것을 능히 있을 법한 일로 만들어야 한다.
기상관측 이래 최장기간 이어지는 장마, 전례 없는 무더위, 느닷없는 홍수, 지루한 가뭄과 도로까지 뒤덮는 산불, 그리고 세계를 뒤덮는 역병까지. 이 모든 재난은 인간이 몸소 경험하기 전까지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피부에 닿는 현실이 된다 해도 지나고 나면 예외적인 일인 양 금세 잊힌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은 이렇게 서사에서 배경으로 밀려나고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개별적인 인간이다.
근대 서사에서 이야기의 요체는 개인이 겪는 삶이다. 인물이 가진 욕망은 사건을 형성하는 중심축이다. 고시는 미국의 문학가 존 업다이크가 현대 소설의 특징을 ‘개인의 도덕적 모험’이라고 말한 것을 빌려와, 이 욕망 중에서도 ‘양심’이 이끄는 내적 여행이 소위 순수문학이라 불린 소설의 장르적 문법이 됐다고 말한다. 전면화하는 개별자의 내면에 발맞춰 서사는 개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내러티브가 되어갔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서사구조는 밀접히 관련된바, 고시는 이런 경향이 정치와 조응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나 팬덤 정치에서 엿보이듯 정치는 지금 개인들에게 정체성과 진정성을 표출하는 주요 수단이 됐다. 기후위기를 알리는 기획 또한 정치화를 거치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서도 ‘도덕’이라는 이슈가 덧대어진다. 참여하지 않는 자의 죄의식을 끌어낸다든지, 개인에게 기후변화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감수했는지 심문하는 방식 등으로 양심에 호소한다. 고시는 이를 두고 ‘다른 모든 민주적 통치 자원이 동나고 오직 그 찌꺼기인 도덕만 남은 형국’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기후변화의 규모는 더없이 방대하다. 이에 큰 영향을 미친 국가나 기업에 책임을 묻겠다는 집단적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선택은 무용지물이다. 외려 개인의 도덕과 양심을 겨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오랜 전제,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같은 논리라면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개인의 작은 불편감이 더 크다고 소리친대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외침은 거세게 힘을 얻어가고 있으며 개인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방식이 성공할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고시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생각 일부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기후변화의 사악한 측면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는 믿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흔들리는 믿음은 우리가 오랜 시간 갇혀온 ‘개인’이라는 상상에서 벗어나도록 촉구한다.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겠지만 이제는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을 아우른 ‘우리’의 서사를 쓸 차례다.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같이 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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