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철 칼럼] 전환기의 국가정보
김연철 | 전 통일부 장관·인제대 교수
구체제는 붕괴하고 있지만, 새로운 세계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전환의 시대’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안갯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부가 미-중 관계에서 추구하는 ‘균형 지점’이나, 인도 모디 정부가 추구하는 ‘전략적 자율성’은 흔들리는 정세에서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이념은 딱딱하지만, 실용은 유연하다. 균형은 중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환경 변화를 예측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정보력이 국가의 생존을 좌우한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한반도 질서가 변화할 때, 광해군 외교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정보의 중요성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몸으로 겪으며 변방의 사정을 알았고, 언제나 정보 수집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전쟁이 벌어져도 사신이 항상 왕래해야 한다”는 광해군의 입장은 유화가 아니다. 교류를 적의 동향을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신하들이 명에 대한 사대를 주장할 때, 광해군이 후금에 대한 기미, 즉 어르고 달래는 대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념의 차이가 아니다. 정세 평가의 차이이고, 분석 능력의 차이였다.
언제나 과거의 정보 실패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정보 실패는 전쟁의 늪으로 인도하거나, 국력의 손실로 나타나고, 국제적 영향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 슬기롭게 대응한 것은 ‘피그만 침공작전’이라는 직전의 정보 실패에서 교훈을 찾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정보 역량은 발전했다. 그러나 기술정보가 진화해도, 정보 실패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정보 실패는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권위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비밀주의다. 권위적 결정은 편견을 가진 지도자가 합리적인 반론을 봉쇄할 때 일어난다. 권위적인 분위기에서 정보는 지도자가 선호하는 방향으로 쏠린다. 실무자들은 실패의 징후를 알아도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침묵한다.
비밀주의 역시 문제다. 정보는 인체에서 피와 같다. 피가 돌지 않으면 동맥경화가 나타나듯이, 비밀주의와 칸막이는 언제나 전체 조직의 역량을 감소시킨다. 미국의 정보기관 개혁의 사례처럼, 다양한 정보기관들 사이의 역할 분담과 정보 통합의 효율성을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정부 내부, 정부와 의회,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정보가 공유되어야 민주적인 정책 결정이 가능하다.
건강한 정보 생태계는 국가의 신뢰 자산을 키운다. 몇년 전 ‘김정은 사망설’이라는 정보전염병(인포데믹)이 어떻게 발생해서, 유통되고, 증폭되는지를 지켜본 적이 있다. 외교 안보 분야의 정보 판단에서 정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탈진실의 시대와 정보전염병의 시대일수록 정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해줄 필요가 있다. 정치권은 무책임하고, 언론은 자극적인데, 정부조차 소극적이면 언제든지 소모적인 가짜뉴스가 번질 수 있다. 외교 안보 분야에서 정부의 정보 판단을 신뢰해야 하고, 동시에 정부 역시 국민의 합리적 의심을 해소해줄 의무가 있다.
올바른 분석을 위해서는 언제나 결론을 열어두어야 한다. 수많은 첩보를 거르고, 부족한 정보의 체계를 잡고, 예측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열린 토론의 과정이 필요하다. 정보기관 내부에서 동시에 여러 부처의 정보 부서 사이에서 칸막이를 열고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소통해야 한다. 북한이 7차 핵실험을 언제 할지를 예측할 때, 핵실험 장소인 풍계리에서의 준비 정황을 위성 정보로 파악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언제 핵실험을 할지는 북한의 군사기술의 수요, 국내 정치의 필요, 외교적 수요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불확실하고,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다. 당연히 정확한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분석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현재 정보기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중요한 전환기에 국가정보기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전환의 진통’은 매우 우려할 만하다. 정치가 개입하면 정보는 오염된다. 정치적인 이유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잔혹한 복수극을 반복하고, 전임 정부에서 고위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무직도 아닌 행정직을 전부 잘라낸다면, 과연 국가의 정보 역량은 괜찮을까? 권위적인 조직문화는 분석 과정을 닫고, 정보의 편향으로 이끌고, 결국 정보 실패로 이어질 것이다. 정보가 살아야 국가도 산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단독] 국힘 ‘당원투표 100% 당대표 선출’ 룰 개정 19일 의결한다
- 내일 출근 어떡하지, 배달음식은 언제 와…강추위 ‘집콕의 주말’
- 학교·식당 실내 마스크 해제 유력…“이르면 설 전에 될 수도”
- “비정한 윤 대통령, 유족 헤아린다면 49재에 웃고 농담하겠나”
- 2살 동생이 “아빠” 하고 따르던 17살, 장례엔 친구 수백명이…
- 붕어빵 값, 손님이 정해준 대로…“학생이 2천원에 5마리 좋대요”
- 오죽하면 안철수·주호영이 훌륭해 보이겠냐고
- 대한민국 대통령인지, 태극기부대 장군인지
- 24시간 돌리는 베이징 화장장…“중 내년 최대 100만명 사망”
- ‘축구 신’ 메시의 마지막 퍼즐…이제 딱 한 경기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