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백만장자 미술가의 노년기

한겨레 2022. 12. 18.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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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이젤 앞의 자클린>, 1956, 백토, 화장토, 회색 파티나 장식 부분 유약, 42×42×3.4㎝,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 2022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곧 종영하는 인기 주말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는 재미 중 하나는 부자들의 일상을, 비록 허구라 할지라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다. 늘 돈 걱정하며 사는 보통의 사람들은 백만장자가 어떻게 집을 꾸며놓고 뭘 소비하며 사는지 궁금해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호기심이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평소에 모아왔던 미술품을 일반에 공개한 전시회는 언제나 줄을 서서 입장해야 하고, 그 열기는 1년이 훌쩍 넘도록 식을 줄 모른다. 미술품들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졌을 백만장자가 애지중지했다기에 더욱 보고 싶은 것이다.

미술계에서 드물게 살아생전 백만장자의 삶을 누렸던 이가 있는데, 20세기 현대미술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다. 빵값과 물감값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던 동료 미술가들과는 달리 피카소는 28살부터 돈 걱정으로 움츠러들 필요가 없을 만큼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38살에는 이미 부자였고, 65살 무렵에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 없이 백만장자 미술가로 불렸다. 돈의 여유가 생기기 전에도 피카소는 두둑한 배짱과 만족할 줄 모르는 의욕으로 만인의 부러움을 샀다. 마음만 먹으면 여인을 사로잡을 줄도 알았다. 그러나 이 매력 넘치고 재능 있는,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을 부유한 미술가에게도 노년은 찾아왔다.

피카소는 프랑스 남부의 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망 탁 트인 19세기 식 여름 저택을 사서 노후를 보냈다. 그 시절 피카소는 위 수술을 받은 뒤 평생 즐겨왔던 담배를 손에 댈 수조차 없었고, 먹고 마시는 데 극도로 조심해야만 했다. 호탕하던 성격이 소심하게 바뀔 수밖에 없었다. 남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도 시력이 떨어져 둔감해졌고, 청력도 나빠져 방문객과 재치 넘치는 논쟁을 벌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1961년 3월14일, 여든의 나이에 그는 결혼을 발표했다. 과거에 그랬듯 여인에게 엄청난 사랑을 쏟아붓고 그 에너지가 창작으로 이어지게 해서 노령의 무기력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서였다. 신부는 피카소의 연인이라기보다는 추종자라고 해야 정확할, 거의 50살 연하의 자클린 로크였다. 피카소는 예전처럼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밤새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자클린에게 의지하며 저택의 담장 안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자클린은 미술계의 거장인 남편을 세심히 보살피며, 저택의 안주인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의 뮤즈가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뮤즈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창조적 영감을 받아 한동안 과다하리만큼 흥분 상태로 지냈던 피카소지만, 자클린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심지어 작품도 과거에 선보였던 것을 복합적으로 재시도해보는 회고적 성격을 띠었다. 더 이상 피카소에게 뮤즈의 약발은 통하지 않았던 듯하다.

피카소가 노년에도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뮤즈에 대한 열정 때문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는 이건희 컬렉션 전시에 자클린을 그린 피카소의 도자기 그림이 있다. 1956년 작 <이젤 앞의 자클린>이다. 여인의 옆얼굴 위로 정면을 향한 커다란 외눈이 붙어있다. 이 외눈은 자클린의 것이 아니라, 마치 화가를 응시하는 초월적인 존재의 눈처럼 보인다. 화가가 모델을 그릴 때, 그림 쪽에서 어떤 당돌한 시선 하나가 화가를 향하는 셈이다.

피카소는 돈과 명성을 다 얻고 살아있는 신화로 추앙받았지만, 간혹 공허의 그림자가 어깨 위에 드리워진 듯 느끼는 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곡예사로 종종 그렸다. 곡예사는 극과 극의 감정 기복을 경험하는 자이다.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움을 무릅쓴 덕에 놀라운 묘기를 펼쳐 박수갈채를 받지만, 긴장했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떠난 빈 공연장에 철저히 홀로 남겨지고 만다.

나는 <이젤 앞의 자클린>을 보며 캔버스 너머로 고독한 곡예사, 피카소를 쳐다보고 있는 외눈을 상상한다. 노년의 피카소가 흐리멍덩해지지 않도록 감시하며 지켜보는 눈이다. 또한 열정 뒤에는 허무가 도사리고 있고, 웃음 배후에는 불안이, 찬란한 영광 다음에는 고독이 잠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눈이기도 하다. 인생의 이면까지 보게 하는 그 눈으로 인해 피카소는 백만장자의 풍요로운 삶에 안주해버리지 못하고, 끝까지 창조의 고뇌를 짊어진 미술가로 살아야 했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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