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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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랑으로 구원되지 않는 사람들은 걷는다.
공간은 가끔 사람을 구원한다.
정보 있음과 없음이 적절히 조절되어있는 거리라면 산책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이나 생각하지 않아서 좋다는 사람들을 웃게 할 것이다.
대전 은행동 스카이로드 같은 이름의 거대한 아케이드 구조물 아래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이겠지만, 산책을 나서기로 한 날에는 외관이 특이한 동네의 건축물과 주인을 닮은 담벼락, 이런저런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쪽으로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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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울 말고] 서한나 | 보슈(BOSHU) 공동대표·<사랑의 은어> 저자
종교와 사랑으로 구원되지 않는 사람들은 걷는다. 공간은 가끔 사람을 구원한다. 도피처, 은신처로 삼을 만한 곳이 많을수록 도시는 애틋한 곳이 된다. 그런 곳이 어디 있었더라. 친구를 태워주러 부여에 갔던 날에는 적당한 곳에 차를 대놓고 골목을 걷는데 강이 나왔다.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고 했다. 추워서 콧물이 나왔고 주황색으로 밝은 찻집에 들어가서 <문어의 영혼>을 읽었다. 그런대로 좋은 날이었다.
군산 개복동에서 ‘영화로운 개복’이라는 이름의 영화제가 열리던 날 군산에 있었다. 상영 앞뒤로 걸었는데, 낮에는 칫솔 사러 다이소에, 저녁에는 샌드위치 사러 옆 동네에 다녀왔다. 오래된 건물과 간판과 사람들을 보았다. 밤에는 힐링 미역이라는 가게에서 술자리를 했고, 붉은색 벽면과 저음에 멋쟁이인 사장이 인상적이었다. 친구가 오늘 미역 좋다고 말하며 거들었고 사장은 오래 연구한 레시피라면서 상을 봐주고 갔다. 군산을 모르다가 군산에 산다는 사람, 군산에 돌아와 좋다는 사람, 일하러 군산에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전에서는 주말에 갈 곳 없을 때 장태산휴양림으로 간다. 입구에 체온 재주는 분이 있을 때였는데, 그분이 내게 말했다. 가방 열렸어요! 그 말에 아, 하고 돌아보았다. 한번 벌어지면 계속 벌어져요. 아무렇지 않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말한 사람이 장태산 휴양림에 있는 것이다. 입으로 산문을 쓰는 사람.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아 도쿄행 항공권을 샀다. 홍콩에서는 앉아있기만 해도 좋아. 삿포로에서는 ‘삿포로’가 쓰인 티셔츠를 사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하필 도쿄냐 하면, 반듯한 서체와 귀여운 간판이 많을 것 같아서. 운이 좋으면 기분 좋아지는 대화 몇 마디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성실한 사장의 자가제면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고작 그런 걸 기대하나 싶지만, 시간을 보내기에 좋을 것이다.
누군가 시간을 들여 가꾼 가게를 구경하면서 튀어나온 블록 없이 반듯한 길을 걷다가 공원이 나오고 더 걸으면 서점과 도서관이 나오는. 정보 있음과 없음이 적절히 조절되어있는 거리라면 산책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이나 생각하지 않아서 좋다는 사람들을 웃게 할 것이다.
왜 이렇게 밤만 되면 환락의 밤거리에서 산책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모르겠다. 목요일에 회식하는 것도 금요일에 친구 만나는 것도 내키지 않는데, 사람들이 노는 모습에서 생동감을 느낀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정신적 고향상실자”를 언급할 때 현대의 한국을 떠올렸다. 고향 아닌 데서도 향수를 느낀다. 연고 없는 군산에 대해서, 이미지나 이야기로 존재하는 니스와 하얼빈에 대해서, 지금은 사라진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서도 노스탤지어를 느낀다.
유년기의 기억은 자료가 되어준다. 도시를 사랑할 근거가 되냐 하면, 모르겠다. 현대인이 이주할 곳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면 긴 시간 머무르고 싶었던 여행지나 알 수 없이 끌리는 곳을 고를 것이다. 에어비앤비를 하면 잘될 것 같은 곳이나, 대형 빵집을 차리고 주차요원을 고용하면 대박 날 것 같은 교외나…
미래에는 모두 고향 선택자가 되든지 고향 없는 자가 되든지 그럴 것이다. 대전 은행동 스카이로드 같은 이름의 거대한 아케이드 구조물 아래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이겠지만, 산책을 나서기로 한 날에는 외관이 특이한 동네의 건축물과 주인을 닮은 담벼락, 이런저런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쪽으로 나설 것이다. 도시가 감흥을 준다면 친구도 미역집 사장도 한국의 쉼보르스카도 그런대로 괜찮은 날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콧바람 쐬고 돌아와 쉴 수 있는 곳을 미래 인간은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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