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를 느낌표로…신인 지휘자 김선욱의 ‘합창’ [고승희의 리와인드]

2022. 12. 1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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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구원투수로 나선 김선욱
벤스케 감독 낙상사고로 대타 투입
인생 최대 고민, 긴박했던 일주일
지휘자 김선욱의 가능성 보여준 무대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김선욱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의 낙상사고로 투입된 악단의 마지막 정기공연 ‘합창’(12월 14~16일) 무대를 무사히 마쳤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마침내 모든 무대를 마치고, 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오자 ‘신인 지휘자’의 표정은 환해졌다. 청중에게 인사를 건낸 뒤, 김선욱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들어올리며 ‘만세’ 제스처를 취했다. 그의 얼굴은 후련해보였다.

긴박했던 시간이었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의 낙상사고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악단의 마지막 정기공연 ‘합창’(12월 14~16일) 무대는 ‘대타 지휘자’를 찾기에 분주했다. 김선욱은 지난 7일 한국에서의 공연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 가던 중 서울시향의 전화를 받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30분은 김선욱의 “34년 일생을 통틀어 가장 깊은 고민을 거듭한 시간”이었다.

‘신인 지휘자’에겐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콘서트의 ‘단골 레퍼토리’인 만큼 모두에게 익숙한 곡이었다. 그만큼 평가의 잣대가 까다로운 곡이다. 게다가 이번 서울시향의 ‘합창’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 87명, 성악가 4명, 합창단 119명 등 무려 211명이 무대에 서는 대편성으로 외양을 갖춘 만큼 수장의 역할은 중요했다.

지난 1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서울시향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울려퍼진 70분은 마치 7분처럼 흘러갔다. 세 번의 공연에서 마지막 날은 지휘자 김선욱이 그리고자 한 ‘합창’의 모습에 조금 더 다가섰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김선욱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의 낙상사고로 투입된 악단의 마지막 정기공연 ‘합창’(12월 14~16일) 무대를 무사히 마쳤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지난해 1월 KBS교향악단과의 만남을 통해 지휘자로 데뷔한 2년차 ‘신인 지휘자’ 김선욱은 올 한 해 서울시향의 광복절 음악회, KBS교향악단, 임윤찬과 연주한 ‘멘델스존 협주곡 1번’, 한국공연예술경영협회 창립 40주년 기념공연 등 다수의 연주를 통해 지휘자로의 역량을 키웠다. 올 한 해 마지막 지휘 무대였던 ‘합창’은 그간 김선욱의 지휘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세 번의 ‘합창’에서 김선욱은 암보(暗譜)로 지휘했다. 종종 심심하게 느껴졌던 김선욱의 지휘 스타일은 ‘합창’을 통해 색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다채로운 동작과 곡의 해석으로 음악은 한층 생동감을 입었다.

‘합창’ 1악장은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 얼마간 장엄하게’(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라고 악곡의 빠르기를 적어뒀다. 광활한 우주로 휩쓸리게 만드는 1악장의 특성을 살려 김선욱은 보다 다층적인 감정을 음악으로 투영하면서도 유려한 움직임을 강조했다. 1악장을 통해 ‘합창’을 완성하는 거대한 틀을 잡아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김선욱이 리허설을 통해 단원들에게 요청한 “다이내믹(셈 여림)과 템포의 차이”를 통한 긴장감이 네 개의 악장 내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다만 소리의 어우러짐이나 디테일이 1악장에선 아름답게 빚어지지 않았다. 2악장에 접어들면 빠른 스케르초가 등장한다. 기존 교향곡이 느린 2악장과 빠른 3악장의 구성을 쓴다면, 베토벤은 이를 뒤집은 혁신적인 실험을 ‘합창’에서 보여줬다. 때문에 2악장은 애초 ‘매우 빠르게’로 속도 지시어가 제시된다. 메트로놈으로 치면 분당 168~200박에 해당한다. 김선욱과 서울시향의 연주는 이보다 조금 더 빠르게 들렸고, 거침이 없었다. 때로는 절도있는 소리 대신 뭉뚱그려진 음표가 들렸고, 때로는 연주가 뒷걸음질친다는 느낌을 줬다. 워낙 울림이 큰 롯데콘서트홀의 특성도 영향을 미쳤다.

3악장으로 접어들면, 지휘자 김선욱과 ‘합창’의 진면목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노래하듯 이어가는 현악기의 선율에 따라 김선욱은 나비처럼 춤을 추듯 유연한 몸짓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지휘자의 뒷모습을 보면,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으나 이내 눈부신 밝음 안으로 슬픔의 감정도 비추는 연주를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김선욱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오스모 벤스케 음악감독의 낙상사고로 투입된 악단의 마지막 정기공연 ‘합창’(12월 14~16일) 무대를 무사히 마쳤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제공]

‘합창’은 단연 4악장이었다. 다소의 어수선함이나 정교하지 않은 어우러짐은 3악장을 지나 4악장을 위한 준비과정처럼 들렸다. 솔리스트와 합창단, 오케스트라의 어우러짐을 잘 풀어냈다. 특히 소프라노 황수미의 악단을 뚫고 객석 끝으로 안착하는 청량한 음색은 그야말로 짜릿했다. 저음 현악기가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4악장의 초반부, “별들 너머에 그가 사신다”며 장엄한 세계로 인도하는 구절은 압권이었다.

이 무대는 ‘신인 지휘자’ 김선욱의 시험대였다. 짧은 기간 준비한 인류 최대 히트곡 ‘합창’은 신인 지휘자의 손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무엇보다 김선욱과 서울시향 단원들의 서로를 향한 지지와 신뢰가 인상적이었다. 리허설 시간은 이틀에 불과했지만, 22년 전부터 시작된 이들의 인연은 무대 위에서 뛰어난 교감을 보여줬다.

김선욱의 ‘합창’이 해마다 울려 퍼진 이 땅의 모든 ‘합창’ 중 최고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흘 간의 연주가 다양한 귀를 가진 관객에게 모두 100점이었을 리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구원투수’로 나선 이 무대를 통해 김선욱에겐 새로운 가능성과 기대감이 생겼다는 것이다. 10년, 20년 뒤 지휘자 김선욱을 고대하게 됐다. 2022년 ‘합창’은 데뷔 2년차, ‘물음표’가 찍혔던 지휘자 김선욱에게 ‘느낌표’를 만들어준 연주의 시작이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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