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세상을 행복하게 만드는 놀이죠"
샘표의 DNA를 바꾸다
발효장류 1등 넘어 한식 세계화 팔걷어
'연두' 뉴욕스튜디오 열 때 모두 말렸지만
지금은 '매직소스'에 세계인 열광
年매출 5% R&D 투자 … 전통의 맛 새롭게 해석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늘 가치에 대한 고민이 그를 따라다녔다. 전자공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에도, 가업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떠난 미국 유학 생활 중에도 그랬다. 그런 고민의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전공을 철학으로 바꿔 그 길로 교수가 됐다. 나름의 결론을 내렸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제서야 무너져가는 회사가 보였다. 늘 마음속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할아버지가 손수 세우신 회사를 다시 일으켜 가치 있게 사용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렇게 16년간의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지 35년째. 더딘 듯하지만 회사는 어느덧 그가 생각해왔던 가치를 조금씩 실현해가고 있다. 회장이란 직함이 더 어울릴 법한 지긋한 나이가 되도록 이를 고사하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사장님'으로 불리며 경영 일선에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박진선 샘표식품 대표이사 사장(72)의 이야기다.
"간장을 주로 팔던 회사가 간편식 등 다양한 제품들을 내놓으니까 외부에서는 샘표식품이 종합식품회사를 지향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으로 벌인 일들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먹는 것을 통해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우리도 당연히 제품을 만들어서 판매하지만 돈 자체는 목표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샘표식품 본사에서 만난 박 대표는 회사가 최근 여러 신규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경쟁 회사들과는 다른, 가치를 중심에 둔 목표가 분명하게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샘표식품은 장류를 제외한 제품의 매출 비중이 올해 처음 50%를 넘어서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다.
1954년 설립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상표(샘표)를 보유한 샘표식품은 현재까지도 국내 간장 시장 1위 업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이제는 전체 매출에서 간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45%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대부분 순식물성 요리에센스 '연두', 정통 이탈리안 수프·소스 브랜드 '폰타나', 정통 아시안 간편식 전문 브랜드 '티아시아', 간편 김치·반찬양념 브랜드 '새미네부엌' 등에서 나온다.
이들 제품에는 '우리 맛으로 세계인을 즐겁게' 하자는 사명(使命)이 담겨 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예컨대 연두는 간장에 익숙하지 않은 소비자들에 대한 문턱을 낮추기 위해 내놓은 제품이다. 박 대표는 우리 간장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일부 직원들 반대를 무릅쓰고 2018년 미국 뉴욕 맨해튼 한가운데 '연두 컬리너리 스튜디오'를 열었다. 그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돈이 많이 들었다. 당시 '미쳤다'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우리 제품을 써보지 않으면 알릴 수 없다는 생각에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덕분에 연두는 현지인 사이 '매직 소스'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현재는 미국, 스페인, 중국, 영국 등에 수출되고 있다.
새미네부엌 간편 양념은 '사람들에게 요리의 즐거움을 되찾아주자'는 생각으로 박 대표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제품이다. 최근 CJ제일제당도 유사 제품을 내놓을 정도로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달 초에는 해외 현지인들을 위한 수출용 김치양념 키트 '김치앳홈'도 내놨다.
티아시아는 '아시아의 맛(Taste of Asia)'의 줄임말로 상대적으로 익숙한 중국·일본 음식 외에 베트남·인도 등 아시아의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게 하자는 목표로 만든 브랜드다. 지난해 3월 출시 후 8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1000만개를 돌파한 데 이어 올해도 1000만개 이상을 판매했다.
이처럼 샘표식품이 혁신적인 제품을 잇달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매년 식품 연구개발(R&D)에만 연매출의 5% 이상을 투자하는 국내 유일의 식품회사로 오랜 기간 발효과학과 우리맛 연구를 발전시켜온 덕분이다. IMF 외환위기 시절에도 연구에만큼은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식품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식품과학은 완전한 바이오테크(생명공학기술)다. 미생물을 제어해 맛을 정밀하게 조절하거나 원하는 물성을 가진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물엿 대신 쌀 발효물을 사용해 만든 고추장으로 일반 고추장의 텁텁한 맛을 없앤 '조선 고초장'을 비롯해 전통의 맛을 살린 '조선 간장' '토장' 등도 오랜 발효기술 연구 끝에 탄생했다.
박 대표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우리나라가 성장하면서 고급 레스토랑이 많이 생겼지만 그에 비해 보통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의 수준은 아직 부족한 편이다. 간편식뿐만 아니라 식당 음식의 전반적인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송경은 기자]
▷박진선 대표는 △1950년 서울 출생 △서울 경기고 △서울대 전자공학 학사 △미국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석사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철학 박사 △1988년 샘표식품 입사(이사·뉴욕지사장) △1997년 샘표식품 대표이사 사장 취임 △2005년 환경친화경영 대통령 표창 △2015년 대한상공회의소 기업혁신대상 최우수CEO상 △2020년 금탑산업훈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그 많던 임의가입자 어디로…‘국민연금’ 어쩌다 이지경까지 - 매일경제
- 우승하면 ‘옷벗겠다’ 공약 논란…크로아티아 미녀 직접 입 열었다 - 매일경제
- 송혜교 옆 ‘이 남자’, 머스크 제치고 세계 최고 부자 - 매일경제
- ‘무적’ 신세 호날두, 월드컵 끝나고 어디 있나 했더니… - 매일경제
- 소속팀 복귀 이강인, 동료들에게 맞고 차이고…격한 ‘환영식’ - 매일경제
- “지방 사는 나도 서울 줍줍”...내년부터 ‘확’ 달라지는 부동산 제도 - 매일경제
- 증시한파 뚫고 목표주가 ‘高高’...오르는 이유 따로 있네 - 매일경제
- 삼성전자보다 시총 적은 이 나라…개미들 70억 들고 달려갔다 - 매일경제
- “전세금 안주는 나쁜 집주인”…재산 가압류는 이렇게 - 매일경제
- 안우진, 태극마크 무산 유력...추가 발탁 논의 없었다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