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불량 잡고, 원전 개발까지 … 팔방미인 '디지털 트윈'
"대만 TSMC와 삼성전자의 기술 경쟁력은 '디지털 트윈'으로 판가름 날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연말 조직 개편을 통해 '디지털 트윈 태스크포스(TF)'를 신설할 계획으로 알려지면서 기술 초격차 확보를 위한 디지털 트윈 기술의 중요성이 조명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분야 1위 기업인 TSMC와 미세공정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을 높이기 위해 혈투를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가 TSMC보다 빠르게 미세공정 양산 안정화에 성공해야 글로벌 고객사를 더 끌어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삼성전자는 지난해와 올해 미세공정에서 안정적 수율 확보에 애를 먹었다. 급기야 지난 상반기에 부사장급 반도체연구소장을 비롯해 핵심 임원을 대거 교체하는 충격 요법을 써야 했다. 주목할 부분은 TSMC와의 경쟁에서 삼성전자가 고전하는 배경에 '디지털'이라는 뜻밖의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매일경제와 만난 국책 연구기관 인사 등 디지털 전환 전문가들은 매년 공격적 연구개발(R&D) 투자를 단행하고도 삼성전자가 TSMC보다 낮은 수율로 고전하는 것은 제조업 부문의 기본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닌, '디지털 트윈' 역량에서 차이가 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는 생산성을 높이는 부차적 변수로 치부된 디지털 트윈 기술이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처럼 안정적 수율을 이끄는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보다 먼저 디지털 트윈의 중요성을 간파한 TSMC의 디지털 전환 노력이 반도체 미세공정에서 안정적 수율 확보라는 지금의 경쟁우위를 만들었다는 평가도 흘러나온다. 최첨단 생산 현장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디지털 트윈 기술 고도화를 두고 벌이는 총성 없는 전쟁을 소개한다.
◆ 삼성과 TSMC의 수율 경쟁 변수로 부상
디지털 트윈은 일명 '디지털 아바타'로 불리며 자동차 생산라인, 반도체 공정, 제철소 고로 등 산업 현장에서 다양한 형태로 개발되고 있다. 생산 현장에 디지털 아바타가 필요한 것은 기술 공정의 복잡성 때문이다. 현실과 동일한 디지털 환경을 구축하고 사물인터넷(IoT) 등으로 이를 동기화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이다. 연결성이 완벽해질수록 생산성 향상과 작업 근로자 안전 증대, 최적의 수율 관리 등 막대한 혜택을 얻게 된다.
특히 700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둘러싸고 혈투를 벌이는 반도체 제조사들에 디지털 트윈은 시장 패권을 좌우하는 기술 요소로 급부상하고 있다. 반도체 공정의 경우 미세공정으로 진입할수록 어느 한 부분의 결함이 막대한 물적 피해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해당 기업의 기술 신뢰도까지 갉아먹는 치명적 위협 요인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4나노미터(㎚·1㎚=10억분의 1m) 파운드리 공정 수율이 부진한 이유를 묻는 주주들의 지적이 제기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국책 연구기관 고위 관계자는 TSMC와 삼성전자의 미세공정 수율 격차에서 디지털 트윈이라는 변수가 갖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관계자는 "특히 숫자를 붙이는 게 무의미할 만큼 복잡한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서는 디지털 트윈을 통한 수율 관리가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했다"고 설명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장악한 TSMC는 독일 테크 기업들과 손잡고 가상 공장을 통한 안정적 수율 관리 생태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모든 물리적 생산 시스템이 디지털 트윈과 맞물려 공정 전 과정을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가상의 값과 제조 흐름 내 값을 비교해 완벽한 수율을 구현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TSMC의 구체적인 디지털 트윈 기술력은 극비 사항으로, 단편적이나마 전자 설계 자동화 부문의 경우 3㎚ 공정이 마이크로소프트(MS) 애저 클라우드 환경에서 지멘스 기술력을 기반으로 관리되고 있다.
삼성전자 역시 구체적인 디지털 트윈 운용 상황이 외부에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독일의 유력 디지털 트윈 솔루션 기업과 삼성의 정보통신기술(ICT) 자회사들이 관련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개최한 'AI 포럼 2022'에서 인공지능(AI) 기반의 디지털 트윈 기술이 삼성의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소임을 확인시켰다. 당시 최창규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AI연구센터장(부사장)은 국내 반도체 공정에 AI 디지털 트윈을 구축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중임을 공개했다.
최 부사장은 "제조시설에 AI 모니터링으로 결함과 수율을 조기에 예측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할 계획"이라고 밝혀 현장의 불량 요소를 잡아내기 위한 돌파구로 디지털 트윈에 거는 삼성의 기대가 상당함을 시사했다. 그는 "반도체를 생산하기까지 1000개의 프로세스 스텝과 최소 3~6개월이 소요되는데,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면 제조 시간을 줄이고, 복잡한 프로세스를 단축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는 "고객사가 웨이퍼 물량을 1000장 늘리고 납기를 한 달 단축하기를 원한다면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경로를 학습한 후 생산에 들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1000여 개 공정을 디지털 트윈 기술로 투사해 복잡성을 줄이고 수율 향상을 극대화하겠다는 복안이다.
◆ 美, 디지털 트윈으로 韓·대만 추격 전략
지난 6일(현지시간) TSMC의 미국 애리조나 공장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장중머우(모리스 창) TSMC 창업자, 젠슨 황 엔비디아 CEO 등과 만난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이 자리에서 쿡 CEO는 자사 제품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전량 TSMC 애리조나 공장에서 조달하겠다고 약속했고,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 제조업의 부활을 외쳤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토종 반도체 종합기업인 인텔은 지난해 파운드리 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수년 내 TSMC와 삼성전자를 추월하는 1등 기업이 될 것임을 공언했다. 자국 내 제조업 부활에 사활을 건 바이든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업계 2위인 삼성전자부터 우선 추월한다는 전략이다.
파운드리 반도체는 크게 원료인 웨이퍼에 미세회로를 만드는 '전공정'과 이를 고객 요구에 따라 효과적으로 자르고 붙여 출하하는 '후공정'으로 나뉘는데 인텔은 후공정 부문에서 특히 강한 자신감을 표출하고 있다. 삼성과 TSMC가 웨이퍼 위에 칩을 잘 만드는 '전공정 일류 기업'이라면, 인텔은 이 칩들을 효과적으로 자르고 붙여 삼성·TSMC보다 더 나은 사양을 충족하는 '후공정 일류 기업'이 되겠다는 전략이다.
한때 전 세계 반도체 중 40%를 생산했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미국 제조업계가 똘똘 뭉친 상황에서 급부상하는 기술 부문 역시 디지털 트윈이다. 대만과 한국 기업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 혁신 디지털 트윈 기업과 반도체 제조사가 연대해 디지털 역량으로 제조 부문의 뒤처진 기술력을 좁혀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 러스트 클리어벤처스 창업자는 최근 포브스의 '디지털 트윈 기술은 어떻게 미국의 뒤처진 반도체 기술 격차를 좁혀주나'라는 기고문에서 램리서치, 보쉬,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등 디지털 트윈으로 반도체·재료 부문에서 혁신을 일구고 있는 기업들을 언급하며 "이들 회사는 최대 100만개의 대리 기계학습(ML) 모델을 사용해 기존 물리 기반 시뮬레이션보다 몇 배 빠른 성과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미국 반도체 제조사들이 디지털 트윈 고도화를 통해 물리적 의존도를 낮추면서 설계와 생산 프로세스를 더욱 간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디지털 트윈이 미국 반도체 기업의 기술 추격에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강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 스마트시티·차세대 원전 개발도 주목
디지털 트윈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네옴시티' 프로젝트 수주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급부상하기도 했다. 한국의 대표 테크기업인 네이버가 사우디를 방문해 디지털 트윈으로 무장한 자사 기술력을 소개하면서 미래 스마트시티 건설의 핵심 솔루션으로 부상한 것이다. 네이버와 LG CNS는 디지털 트윈 기술을 스마트시티 설계·운용에 접목하는 국내 최고 기술 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네이버는 채선주 네이버 대외·ESG 대표(사내이사)를 중심으로 '팀 네이버'를 꾸려 이달 초 사우디를 상대로 스마트빌딩 기술력을 소개했다.
뒤이어 네이버의 독보적 디지털 트윈 솔루션인 '아크아이(ARC eye)'를 공개하고 글로벌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아크아이는 도시라는 대규모 공간을 고정밀 매핑 및 측위 기술을 통해 클라우드상에서 쌍둥이처럼 복제하는 솔루션으로, 스마트시티 설계와 운용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LG CNS는 정부세종청사를 3D로 완벽히 구현해내는 디지털 트윈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 디지털 쌍둥이 공간이 완성되면 아바타 관리인이 청사를 돌며 시설물 상태를 점검하는 등 공공시설 관리에서 일대 혁신이 예상된다. 회사 관계자는 "최적의 공장 운영안을 가상환경에 적용하는 버추얼 팩토리 사업과 함께 스마트빌딩도 스마트시티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미래 스마트시티 사업에서 우리의 솔루션에 대한 많은 수요가 기대되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원전 기업들은 미래 에너지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부상한 소형모듈원전(SMR)에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접목할 계획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국내 24개 원전을 운영 중인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를 디지털 트윈 구축의 원년으로 삼고 원전 종합 상황을 아우르는 디지털 트윈을 구축 중이다. 황주호 한수원 사장은 최근 공개석상에서 "혁신형 SMR와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 분야, 그리고 원전 해체에도 디지털 트윈을 확대 적용할 계획"이라며 "관련 기술 선점으로 해외 원전 수출 경쟁력도 더 키울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자동차는 가상공간을 통한 생산 효율성을 꾀하는 '메타팩토리(Meta-Factory)'를 구축하고 있다. 싱가포르 글로벌 혁신센터(HMGICS)가 그것으로, 싱가포르 최대 통신사인 싱텔의 온라인 플랫폼(파라곤) 위에 디지털 트윈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현실과 가상에서 조합한 최적의 효율을 적용한다는 전략이다.
물리적 공장 내에 설치된 방대한 센서에서 수집한 데이터를 한곳에 모아 클라우드에 전송하고, 이를 분석해 가상 공장을 구현하게 된다. 임직원들이 파라곤 플랫폼에 접속해 원격으로 공장 상태를 확인하고 제어할 수 있다. 또 고객들은 자신이 주문한 맞춤형 차량이 생산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포스코ICT는 포스코와 손잡고 '디지털 트윈 제철소' 구축 작업을 벌이고 있다. 3D 시각화, 시뮬레이션 등 관련 기술을 접목해 현실 세계와 동일한 환경의 가상 공장을 마련하고 제철 산업에 일대 혁신을 꾀하고 있다. 현재 포항·광양제철소에 각각 1개 시범 공정을 구축 중으로, 2025년께 완벽하고 전면적인 디지털 트윈 팩토리 솔루션을 완성한다는 목표다.
[이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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