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찻사발 3000점 통째 사겠다고 하지만 … 절대 안팔 겁니다" [명사와 걷다]

신익수 기자(soo@mk.co.kr) 2022. 12. 1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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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8대째 찻사발 장인 김선식 사기장

"제가 잘되는 거 필요 없어요. 우리 전통의 도자가 알려지는 게 훨씬 중요하지요."

평생 남만 배려하는 이타적 삶이란 게 있을까. 그런 숙명을 타고난 게 있다. 흙이다. 무릇 흙이란 것이 그렇다. 평생을 남만 본다. 아이들이 만지면 찰흙 장난물이 되고 꽃을 가꾸는 주부의 손이 닿으면 화분에서 싹을 틔운다. 꽃·나무·사람이 편하게 그저 품고 밟힐 뿐이다. 그 흙만 평생을 만져서일까. 대한민국 최고의 백토가 난다는 흙 좋은 곳 경북 문경의 한국다완박물관(경북 문경시 문경읍 온천5길 2-1). 무려 8대째 찻사발 대를 이은 8대 장인 김선식 사기장 겸 박물관장(52)은 기자를 보자마자 주기부터 한다. "여기 다완박물관 1층(투썸플레이스) 커피 한잔부터 투어 프로그램이 시작하죠. 멀리서 오셨으니 커피부터 한잔 드시고 천천히 우리 찻사발의 역사를 훑어가 보도록 하지요." 다르다. 한국관광공사와 명사 투어를 진행한 게 벌써 세 번째. 대부분 명사들은 자신의 이야기부터 꺼낸다. 그런데 김선식 사기장은 다르다. 남부터, 취재를 온 기자부터 본다. 이타적인 숙명을 타고난, 마치 흙을 닮은 느낌이다.

다완박물관에서 직접 소장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선식 사기장.

1대 사기장 역사는 173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자 취자 정자를 쓰신 영조시대 김취정 사기장이 말하자면 시초다. 낡은 목재 발물레를 돌리며 평생을 산 것도 모자라 조선의 질 좋은 백토를 찾아 충북·경북 일대를 휩쓴 분이다. 생명도, 사람도, 도자도 속성이 그렇다. 근본이 되는 흙이 핵심이다. 그 흙을 만지며 8대째 이어진 300여 년의 세월. 충북 단양과 경북 상주로 가마(도자 굽는 가마)를 옮겼고, 3대 김영수 사기장이 19세기 초 문경읍 관음리 가마터에 정착한 것이 문경 관음요의 출발이다.

그 뿌리가 8대 김선식 사기장까지 총 5대에 걸쳐 이어진다. 그 역사가 지금의 한국다완박물관이 있는 관음요에 배어 있는 셈이다.

아들 김민찬 군(왼쪽)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 김선식 사기장.

"작고하신 부친은 생계를 위해 여름에 농사, 농한기에는 도자기를 만들어 도자의 맥을 이으셨죠. 기름병, 요강, 유병, 타구(가래나 침을 뱉는 도구), 꽃병 등 각종 생활 도자기를 장작가마로 만들었지요. 저를 포함해 둘째 할아버지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습니다."

인터뷰 도중 전화벨이 울린다. "어, 아들. 그래. 아빠가 지금 보내줄게." 마치 찰흙처럼 찰박찰박 정이가는 말투. 아들 민찬 군의 전화다.

"지금은 이 녀석이 9대째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에휴~ 잘 해낼지, 뭐, 걱정투성이죠."

김선식 사기장의 아들 걱정에는 이유가 있다. 본인 역시 도자 한 우물만 판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8남매 중 막내둥이. 어릴 때야 부친이 워낙 예뻐해 옆에 달고 물레만 돌렸으니 자연스럽게 기술을 익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기업 반도체 회사 공채로 들어가면서 직장 생활을 한 것이다.

돌연 고향으로 내려온 건 2년 만이다.

"철이 든 걸까요. 어느 날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띄게 되더라고요. 힘겹게 일하면서도 도자의 전통을 잇는 그 모습. 늦둥이로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줄 때라는 생각이 절로 든 거지요."

그가 도자기에 올인한 건 1992년부터다. 하루에 수천 개의 도자를 가마에서 꺼냈고 쪽잠을 자면서 도자기 완성도를 높여갔다. 그러다 위기가 온다.

"아버지가 69세 나이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죠. 그때 멍했습니다. 도자기를 900도로 굽는 초벌 단계와 그림까지 아버님이 손수 맡으셨거든요. 위기였죠. 그런데 삶이란 게 그래요. 긴 흐름에서 보면 그런 위기가 터닝포인트가 되거든요. 마음을 다잡고 초심으로 돌아간 거죠. 고문헌을 보고 수련하며 스스로 길을 찾았습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문경 도자기 투어 코스를 둘러볼까요."

오, 드디어 시작이다. 단 한 명이 신청해도 그가 직접 마이크를 달고 투어를 진행해준다는 '히든 마스터 투어-문경 도자기유니버스'다. 투어 진행 과정은 이런 식이다. 문경 도자 역사의 뿌리가 된 한국다완박물관 1층 투썸플레이스에서 현대식 커피를 마시며 담소로 시작한다. 그리고 다완박물관 찻사발 관람·체험·스토리 트래킹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이곳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다완박물관이다. 이 공간이 놀랍다. 그가 만져온 흙의 속성처럼 그저 도자의 역사와 뿌리를 통째 주기 위해 만든 곳이다. 당연히 사비를 들였다. 전시장과 체험장을 한곳에 붙여 만든 것도 이색적이다. 압권은 전시관의 전시품이다. 전시된 찻사발은 전국 명인들의 낙관이 찍힌 진품 찻사발 3000여 점 중 세정이 완료된 1000여 점이다. 청화백자 당초문 다기부터 13세기 고려청자완과 17세기 조선백자완,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기장의 다완과 일본 도예가의 찻그릇까지 도예가의 개성과 지역색이 드러난 다기를 한곳에서 보는 행운을 잡을 수 있다.

"우리 고유 민간 찻사발을 다 보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리지요. 이곳에서는 한 방에 다 볼 수 있거든요. 이게 행운이죠. 여기 보이는 것이 민영기 선생의 산청요, 이건 이방자 여사의 찻사발이죠. 개당 500만~1000만원 이상은 가는 것들이죠."

그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역사물보다 생활물에 더 애착이 간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다완들이야 경매에서 돈만 들이면 손에 쥘 수 있지만 생활 다완은 구할 수조차 없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가장 매력적인 건 이런 생활 보물들을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 촉감으로 느끼는 여행의 추억은 시각만으로 눈에 담는 경험 여행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순간의 경험을 감각으로 각인시킨다. 여운이 길게 남는 법이다.

"지키기만 하면 뭐하나요, 세상이 몰라줄 텐데. 알려야죠. 그래서 저는 아예 현대식 편안함을 담아 K도자 같은 열풍이 생겼으면 합니다."

그가 주목하는 곳은 일본 시장이다. 일본의 국보 16호가 찻사발이다. 이미 알음알음 일본 분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투어를 하며 체험을 하고 간다. 대한민국 생활 속에 스며든 전국의 생활 찻사발 1000여 점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다. 이게 K컬처, K도자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음 목표도 있다. 문경을 경북의 '남이섬'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일본의 국보를 품고 있는 다완박물관의 존재가 알려지면 남이섬으로 향하던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문경에 닿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금도 일본의 많은 재력가들이 우리 전시관에 있는 대한민국 전역의 생활 찻사발 3000여 점을 통째로 살 수 없냐고 의사를 타진해오고 있죠. 우리 건데 절대 팔지 않습니다. 이것만큼은 대한민국 찻사발의 얼이고 역사거든요. K도자의 힘을 알려준 뒤에는 다 나라에 돌려줄 겁니다. 소중한 문화유산을 개인이 지니고 있을 순 없지요."

[문경/신익수 여행전문기자]

▷찻사발 나눔잔 만들기 체험=이곳 찻사발 체험은 독특하다. 무형문화재 김선식 사기장의 낙관이 찍힌 찻사발(다완)에 직접 청화 연필을 사용해 문양을 그리고 소장하는 체험이다. 명인의 손길 90%에 나머지 10%로 체험자의 흔적을 담으니 명품이 나올 수밖에. 게다가 명인의 낙관이 그대로 찍혀 있는 것도 새롭다. 체험투어도 명인이 직접 진행해준다. 시청각 자료와 함께 김선식 사기장의 강의로 한국 전통 문양과 청화 도자기의 이야기를 듣고 찻사발의 역사와 사용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체험한 작품은 명인이 유약에 구워 작품으로 만든 뒤 배송해준다. 전국에서 수집한 지역 명장들의 찻사발 3000여 점을 한자리에서 관람하는 것도 매력. 한국다완박물관(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온천5길 2-1 지하 1층) 홈페이지에서 신청(월 8회 예약제). 비용은 찻사발 만들기 7만원, 나눔잔 만들기 2만5000원 (10세 이상, 최소 6인 이상, 최대 30인).

▷김선식 사기장은 … 1971년 2월 1일생. 1991년 7대 도예가 부친 김복만에게 도예기법 일체 전수. 2005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부문 신지식인 선정. 2014년 경상북도 최고장인 선정. 2016년 경상북도 문화상 수상. 2019년 무형문화재 사기장 지정. 2022년 한국관광공사 지역명사 문화여행 명사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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