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주류 친문이 움직인다 '포스트 이재명' 대비하나
요즘 정치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미래'만큼 궁금해하는 게 있을까. 가깝게는 검찰 소환이 있다면 응할지 여부이고 멀게는 후년 총선 전까지 신상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이다. 더 멀게는 다음 대선에 나설 수 있을까. 이미 이 대표의 측근들이 기소됐고 검찰은 측근들과 이 대표를 '정치공동체'로 보고 있다. 여러 갈래의 수사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민주당은 '정치 보복·조작 수사'라고 항변하지만 이 대표 조사를 위한 소환은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이 대표의 '미래'는 국회 다수당이자 제1야당인 민주당의 '미래'와 직결된다. 당내 최고 리더십에 대한 사안이니 당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단일대오'를 내세우며 방어하고는 있지만 민주당 사람들을 만나보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태로 당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란 고민이다.
그리고 2022 월드컵이 마무리됐다. 많은 경기를 봤다. 덩달아 경기 해설을 풍부하게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축구 전문가 분석까지 접하다 보니 무언가 보이는 게 있었다. 축구에선 두 가지가 있어야 이긴다. 골을 먹지 말아야 하고, 골을 넣어야 한다. 당연한 소리인데, 이게 깊이 들어가면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선 첫 번째 조건. 내 땅을 철통같이 지킨다. 오프사이드 트랩을 잘 쓰는 팀을 보면 수비수 3~4명이 자로 그은 듯 일직선으로 움직인다. 흐트러지지 않고 선을 유지하는 덕분에 상대팀 공격수가 아무리 파고든들 반칙이다. 단일대오이고 조직력이다. 웬만해서는 골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하프라인을 넘어가서 골을 넣어야 한다.
두 번째 조건. 남의 땅에 넓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축구를 땅따먹기 게임에 비유하곤 한다. 일단 상대방의 땅으로 건너가야 한다. 수비수가 없는 빈 땅을 파고들어가 넓은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 슛을 하거나 패스를 할 공간이 열린다. 이때는 한 몸처럼 움직이는 단일대오보다는 넓게 보는 시야, 예측 불허의 발 빠른 동작이 중요하다. 장거리 패스 한 방으로 골키퍼와 1대1 상황이 되는 게 단적인 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공격이 신통치 않으면 선수 교체를 한다. 하프타임 뒤에 선수들의 포지션도 바꾸고 작전도 달리한다. 새로운 선수의 투입이 골로 연결되는 경기, 전반전과는 사뭇 다른 후반전 경기를 숱하게 봤다.
'내땅' 지키기에 급급한 야당
가만히 보니 정당과 선거도 축구와 교집합이 있다. 정당은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받아야 정치적 힘이 강해지고, 선거에서 표를 많이 받는다. 정당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평소엔 지지이고 선거에선 표다. 그러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우선 정당마다 갖고 있는 고정 지지층을 지켜야 한다. 이른바 집토끼 잡기. 충성 당원을 끈끈하게 유지하는 거다. 당원들이 단일대오가 되니까 외부 충격에도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고, 집권도 할 수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지지하는 유권자만으로는 다수가 될 수 없다.
다음은 표의 확장이다. 이른바 산토끼 잡기. 표밭을 넓혀야 한다. 그 정당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더 욕심을 낸다면 상대 정당 지지층 가운데 일부라도 가져와야 한다. 그러려면 뭐라도 새로워야 한다. 때로는 경쟁 정당의 정책·주장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호소해야 한다. 정치 지형에서는 양쪽 끝에서 가운데로 이동하는 거다. 집권을 꿈꾸는 정당이라면 더욱 파격적인 모습이 필요하다. 정당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외부의 인물을 영입하며, 새로운 노선을 밝히는 건 다 이런 맥락이다.
여당이나 제1야당이나 내 땅 지키는 데 급급한 건, 고정 지지층에 의존하는 건 매한가지다. 툭하면 나오는 표현이 대선 2라운드, 3라운드인데, 대선과 같은 모습이 여전하다는 거다. 박빙의 승부로 대선이 판가름 났다는 점, 대선에서 후보였던 한 명은 대통령이 됐고 다른 한 명은 제1야당의 대표가 됐다는 점 때문이다. 여전히 경쟁 관계라는 거다.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강성 지지층에 의존한다.
그런데 대통령과 여당은 '집권'을 하고 있다. 정부를 운영하고 있는 거다. 수비만 잘해도, 집토끼만 잘 잡아도 현재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이미 '집권'이란 득점을 한 상태라서 그렇다. 반면 민주당은 다르다. 수비만 해서는 달라지는 게 없다. 내 땅만 지킨다고 바뀌는 건 없다. '정권 연장 실패'란 실점을 한 상태라서 적극적으로 골을 넣으려고 해야 이길 수 있다. 집토끼를 넘어 산토끼를 잡아야 한다.
지금 민주당은 어떤가. 수비만 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골을 넣으려 하고 있는 건가. 모두가 '친명(친이재명)'이란 이름으로 단일대오를 외치고 있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마주한 채 밀리면 안 된다면서 내부에서 나오는 '다른 목소리'를 단속하는 분위기다. 그사이에 이 대표의 리스크가 그대로 전이돼 민주당의 리스크가 됐다. 더구나 윤석열 대통령과 그 측근인 한동훈 법무장관을 향한 질 낮은 공세는 되레 비난만 받았다. 지금까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이 갖가지 내홍과 잡음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는데도 민주당이 반사효과를 전혀 못 누린 건 이런 것들이 쌓인 결과다.
이 대표와 민주당의 처지를 상징하는 게 취임 100일 기자회견도 없었다는 거다. 100일의 성과를 설명하고 향후 구상과 포부를 밝히는 자리조차 갖지 않았다. 회견 때 한 발언과 답변이 혹여 있을지도 모를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음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게다가 사법 리스크가 오래 지속되다 보니 민주당 전체가 '부패' 프레임에 빠져버린 듯하다. 자꾸 해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훗날과 대안을 준비하는 친문
민주당의 옛 주류인 '친문(친문재인)'은 2017년 대선 이후 이 대표를 '비토'했던 세력이지만, 올해 대선에선 당의 후보인 이 대표를 지원했다. 당시 국민의힘 후보였던 윤 대통령의 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면서 이 대표를 밀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지금은 어떤 생각일까.
민주당 인사의 말이다. "친문을 '자극'한 일이 몇 개 있다. 대선 뒤 바로 열린 지방선거·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송영길 전 대표가 서울시장에 출마하고 이 대표가 송 전 대표의 지역구에 출마해 의원 배지를 단 것, 대선 패배 뒤에 민주당 사람 모두가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는데 그때 이 대표가 주식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실망을 넘어 좌절했다는 게 이 인사의 설명이다.
친문을 포함한 '비명' 인사들이 요즘 움직이고 있다. '훗날'을 대비하고 '대안'을 준비하는 거다. 이들은 사실관계를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당이 방어·옹호에 몰두하다간 당 전체가 휘말려 들어갈 수 있다는 걱정을 한다. 수렁에 빠질 수는 없다는 거다. 최근 김종민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이재명 대표가 죄가 있거나 이재명 대표 주변에서 범죄를 했다면 단일대오를 지키는 게 민주당 망하는 거 아니냐"고 말한 것은 이런 인식을 보여준다. 이미 친문은 '조국 사태' 당시 방어·옹호로 일관한 결과가 무엇인지 경험했다.
친문의 움직임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 가지는 잠재적 구심점과 접촉하고 있다는 거다. 최근 김동연 경기도지사를 찾는 친문 인사들이 늘고 있고 김부겸 전 국무총리와 당의 상황을 논의하는 인사도 많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두 정치인을 만나려고 연락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포스트 이재명'을 염두에 둔 거다.
이와 함께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의 사면·복권 여부를 주목하는 인사도 많다. 그가 족쇄에서 벗어날 경우 친문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는 기대다. 김 전 지사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메신저로 통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복권이 되면 당의 중심으로 자리할 수 있고, 복권이 없는 사면만 돼도 친문의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
또 다른 움직임은 비상 상황에 대한 대비다. 친문의 핵심으로 꼽히는 민주당 의원이 최근 지역을 순회하면서 당원들을 만나고 조직을 추스르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향후 이 대표의 신상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비대위 체제로 전환될 것을 준비한다는 거다.
'유기견 달력' 불매가 암시하는 것
그러나 친문의 대안 찾기와 대비가 극한의 내홍을 불러올 수 있다. 이 대표는 이미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아 기사회생한 전력이 있다. 2심에서 일부 유죄였는데 말이다. 이런 기억을 가진 이 대표와 친명 인사들은 당내의 압박에 버틸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대선을 계기로 형성된 강성 지지층의 지지는 여전하다. 검찰 소환, 기소, 판결 등의 절차가 진행되더라도 당대표에서 물러나는 대신 무죄를 입증하겠다면서 버틸 수 있다. 또 다른 민주당 인사의 설명이다. "이 대표가 걸어온 길을 보면 자신이 쟁취한 자리에 대한 애착이랄까 진념이랄까 하는 게 매우 강하다." 피상적 평가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인식이 당내에 퍼져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문 전 대통령이 등장하는 '유기견 달력'의 제작 모금을 둘러싸고 이 대표의 강성 지지자 일부가 보인 반응은 심상치 않다. 이 달력의 삽화가가 과거 이낙연 전 대표의 지지자일 수 있다면서 불매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민주당 내 친명과 친문(혹은 비명)의 관계가 어떤지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검찰이 소환조사 뒤에 이 대표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체포동의안이 국회로 올 경우 민주당은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올해 안에 검찰의 소환이 이뤄지고, 해가 바뀌어 영장 청구가 이뤄질 것을 배제할 수 없다. 민주당 안팎에서는 설 연휴 전후인 1월 말로 보는 시각이 많다. 친문의 불만이 임계점에 다다르는 시기가 이때일 수 있다.
당의 리더십 변화는 후년 총선에서 '공천' 지형이 달라진다는 걸 의미한다. 누가 총선에서 당의 후보로 출마할 것인가는 정치인의 최대 관심사다. 당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에서도, 공천이라는 실리에서도 친문은 압박을 강화할 것이고 친명은 저항에 들어갈 공산이 있다. 치열한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의 한 친문계 의원은 "지금으로선 민주당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외부의 충격이 변화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그때가 돼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비대위로 가는 거고, 여유가 없으면 전당대회로 새 대표를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물론 외부의 충격은 바로 검찰의 수사와 그 이후 사법 과정을 말한다. 지난 5년 동안 집권했던 민주당의 모습이 현재 이렇다.
[이상훈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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