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집회에도 알바생 목숨값이 30만 원”···영화·문학으로 본 비참과 모멸의 노동
독립연구자 조형근은 계간 <문학인> 겨울호 특집 ‘우리 시대 노동, 양상과 저항’에 ‘노동이 무너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연대하는가?’를 써냈다. “자본과의 싸움보다는 노동자와 노동자의 다툼이 더 부각되는 상황을 직시하자”는 취지의 글은 벨기에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을 주요하게 다룬다.
우울증으로 쉬던 노동자 산드라(배우 마리옹 코티야르)가 복직하려던 참 그만두라는 연락을 받는다. 사장은 아시아와의 치열한 경쟁으로 사업이 위기에 처해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소속 팀 16명에게 1인당 1000유로의 보너스와 산드라 복직 중 무엇을 선택할지 물었더니 두 명만 복직을 택했다고 했다.
보너스로 결정난 첫 투표에서 하자가 발견된 뒤 재투표를 진행한다. 산드라는 주말 이틀 동안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복직에 투표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처럼 “자본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해고의 권리”를 노동자들에게 넘긴다. 영화에서 복직과 보너스는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어떤 선택이든 모두 모멸감에 빠지고 상처”받게 된다.
영화는 실직 위기에 처한 산드라의 분투기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와 동료들이 함께 만든 노동자 착취에 대한 보고서 <세계의 비참> 1권에 실린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조형근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2017년 11월 16일, 서울교통공사 군자차량기지에서 차량검수원으로 일하던 무기 계약직 김모씨가 자취방에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연결한다. 앞서 서울메트로의 무기계약직의 정규직화 작업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이 무기계약직들이 무임승차한다며 반발했다. ‘평양교통공사로 꺼지라’ 같은 폭언들도 나왔다. 지인들은 “(고인이) 무기계약직에 대한 근거 없는 인격모독에 힘들어했다”라고 진술했다.
https://www.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1810261641005
2016년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승강장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용역업체 은성PSD 소속 김군 사망 사건도 이어낸다. 조형근은 김군이 2017년 후반기 정규직화를 앞둔 서울메트로 무기계약직처럼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2011년 12월 설립된 은성PSD는 서울메트로에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이 대거 들어가 만들었다. “서울메트로의 구조조정 추진 과정에서 자본과 조직노동이 결탁한 결과로 생겨난 편법의 산물”이었다.
조형근은 2006년 당시 서울시장 오세훈의 ‘2010년까지 서울시 공무원 14% 감축’ ‘서울 메트로 20.30%’ 감축 등 대대적인 ‘공공부문 구조개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은성PSD 같은 ‘위장 하청업체들’이 이 과정에서 생겨났다. “(2017년 김씨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 정치인의 날 선 욕망이 나타난다. 그를 지지한 보통사람들의 비용 절감을 향한 거친 욕망이 똬리 틀고 있다.”
보수만의 문제인가. 김군 죽음 한달 뒤 2016년 6월 말 당시 서울주택도시공사 사장 변창흠이 내뱉은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걔만 조금만 신경 썼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될 수 있었는데 이만큼 된 거”라는 발언도 거론한다. 그는 “김군 부주의로 박원순의 서울 시정이 어려워졌다고 분노”했다. 이 발언은 변창흠이 2020년 12월 문재인 정부에서 국토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 밝혀진 것이다.
조형근은 “소위 민주진영의 전문가로 알려진 인사의 사고방식”을 두고 “그가 예외일까?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비용 절감의 욕망에서 보수와 얼마나 다를까? 자문하게 된다”고 했다. “우리 시대 노동의 비극은 일부 악의 세력이 대다수의 선한 의지를 무릅쓰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좁은 진영론의 이편저편을 넘어 함께 자본의 편에 선 욕망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조형근은 노동의 세계에서 ‘미래’라는 단어가 사라진다는 점도 지적한다. “85% 정도 불안정노동의 세계에는 아예 체계도 미래도 없다.” 그는 용접공 출신 작가 천현우의 <쇳밥일지>(문학동네, 2022) 중 “이 일만 해서 정년까지 벌어 먹고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출근했더니 부스에 다른 사람이 일하고 있는 꿈을 세 번쯤 꾼 것 같다”는 말을 인용하며 “저임금, 고용 불안정, 하청과 원청, 노조 원청과 비노조 원청 간의 이중 갈등, 탐욕스러운 하청업체 사장, 저임금과 과노동에 시달리는 외국인 노동자까지 모든 문제들이 미래라는 단어들을 지운다”고 했다.
조형근은 10년을 일해도 최저임금만 받는 이주노동자들 사례에 이어 “열악한 이주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저변에서 일”하는 난민 문제를 살핀다. “이들 없이 지역의 영세 공장과 농장은 굴러가지 않는다. 이들이 오늘날의 전태일이자 시다들이다. 전태일과 시다들 앞에서는 미안하고 아파했는데, 오늘날의 난민들에게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연대를 이룰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대공장 조직노동자들이 이기적으로 변했다며 냉소하는 고학력 중상층 엘리트들이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프레카리아트와 연대하는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조형근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동일한 노동과정 속에서 함께 일할 때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에 대해 연대하려는 성향이 높아진다. 반대로 노동과정이 분리되어 있거나 위계화되어 있을 때면 배제 성향이 높아진다”고 했다. “동일노동을 향해, 더 많은 접촉면을 향해 애써 실천해야” 한다고도 했다.
영화평론가 송경원도 ‘나의 존엄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복원’에서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이란희 <휴가>(2020) 함께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을 다룬다. 송경원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문제를 두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윤리적 선택을 강요하는, 약자와 약자가 서로 싸우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자유의지가 일종의 환상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영화 속 공장 노동자들은 얼핏 산드라의 복직과 보너스 사이 윤리적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에겐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통제되지 않는 자본의 욕망이 이 모든 상황을 제어할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복직이라는 미끼, 희망 고문을 통해 해고자와 노동자 양쪽 모두를 길들인다.”
송경원은 2022년 대우조선해양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파업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과정이 영화를 빼다 박았다고도 했다. “원청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서로의 생존을 두고 다투는 사이 정작 부조리한 노동환경을 만들어 놓고 이익을 취한 이들의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다. 그렇게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다는 소박한 요구는 자본가가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설치한 복잡한 미로 속에서 쉽게 무력화된다. 그리하여 미디어에 새겨지는 건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이기적인 노동자라는, 소름 끼치는 꼬리표다. 시스템 뒤로 숨은 자본의 욕망 앞에서 노동, 노동자는 어떻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가.”
다른 계약직 노동자 대신 복직시켜주겠다는 사장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는 산드라에게서 ‘희망’을 본다. “진정한 자유의지의 발현”이자 “자본의 제어되지 않는 욕망에 밀려 점점 설 자리들 잃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다움과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길”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전철희의 ‘제조업의 기쁨과 슬픔’은 “육체노동의 당사자들이 느끼고 있는 정동을 그려내는 작업을 경유”하는 두 명의 시인의 작품을 살핀다. 이용훈의 시집 <근무일지>(창비, 2022) 중 ‘당신의 외국어’는 ‘함바’(건설 현장 간이식당), ‘후앙’(환풍기) 같은 노동 현장의 외국어를 소재로 쓴 시다. “노동자의 은어가 일상어와 이중으로 분리된 상황임을 지적하고, 그 상황에서 노동현장의 식민화를 함축”한다. 전철희는 외국어를 익히지 못해 노동도 할 수 없는 실업자들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외국어를 습득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정작 ‘외국어’에 익숙한 노동자들은 ‘표준어’를 쓰는 사람들보다 약자이다.”
시 ‘해체되기 위한 쇼’는 “우리는, 파이프를 세우고 파이프를 눕힌다 서로에게 기울지 않아도 될 만큼 다져진 바닥 끝을 끝에 조심히 내밀면 끝까지 끝을 내민다 체결하듯 서로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결속 둔중한 파이프, 그 파이프를 조이면 여전히 세워지고 여전히 일어서고 여전히 놓인다(하략)”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08011701011
전철희는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햇살 따가워질수록 / 깊이 익어 스스로를 아끼고 / 이웃들에게 저를 맡긴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성부의 ‘벼’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 속 벼는 강인한 생명력으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민중의 모습을 그려낸 것으로 읽혔다. 이용훈의 작품 속 ’파이프’도 그렇게 서로 기대는 민중-노동자를 표상한 듯하다” 다만 ‘해체되기 위한 쇼’는 “결국은 노동자의 삶이 명확한 형태를 지니지 못한 채 위태로운 직립과 해체들 거듭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그린다. “노동자 같은 처지의 ‘자본가’가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그린 옥빈의 시집 <업무일지>(실천문학사, 2019)도 분석한다.
전철희는 ‘소외된 28%’도 언급한다. 한국은 주요 28개국 중 제조업 비중이 두 번째로 높은 국가이고, 한국의 GDP 중 제조업 비중은 28%다. “그 28%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오늘날의 담론장에서 소외되어있다. 정치인들과 언론인들만 해도 제조업 사업장의 육체노동자들에게는 거의 관심이 없다.” 여러 담론장에서 “노동자의 목소리가 거세”됐다.
이지은의 ‘구직-해직 사이클과 연작 소설’의 분석 텍스트는 이기호의 <눈감지 마라>(마음산책, 2022)다. 지방대를 졸업하고 편의점 직원, 식당 설거지, 철장 판촉 영업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박정용과 전진만의 이야기다. 이지은은 이 글 부제에 ‘비정규직 장편소설의 불가능성’을 붙였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구직을 하고, 새로운 일에 적응하고, 잘리거나 그만두고, 또 구직”을 하는 사이클(cycle) 때문이다. 정용과 진만은 무수한 직업을 거치지만 “이전의 직업은 다음의 직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직업 활동에 있어 이들의 경험은 계속해서 단절”된다. 이력서엔 대학 졸업 외엔 아무것도 적지 못한다. 노동 조건이 계속 바뀌는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도 어렵다.
“삶의 연속성은 시간의 물리적인 속성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러니 진만과 정용의 삶은 장편소설이 이니라, 연작 소설(short stort cycle)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속적이되 독립적인 연작 소설은 선후 관계가 크게 상관없으면서도 각 경험이 독립되어 있는 구직-해직의 서클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 배달 아르바이트생의 죽음은 부재한다. 원동기 면허 없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배달을 시킨 치킨집 사장은 도로교통법에 따라 삼십 만 원의 벌금을 냈을 뿐이다. 이지은은 그 아르바이트 자리를 대체한 사람들 또한 언제든 비극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묻는다.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o278
이지은은 이 소설이 드러내는 ‘암울한 전망’을 두고 “한동안 우리가 환호했던 단어들. 예컨대 ‘직접민주주의’라든가 ‘촛불 혁명’과 같은 말이 얼마나 공허하고 기만적인지 긴 설명 필요 없이 드러낸다”고 말한다. 정용과 진만은 촛불잔치든 촛불집회든, 어디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전날 밤부터 내린 폭설로 시외버스가 운행을 중지해 인근 도시로 가지 못한다. “정용과 진만의 상황은 그 ‘직접’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단번에 드러낸다. ‘직접’이라는 말에는 이미 그 안에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내포되어 있어, 누군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환승을 하여야만 ‘직접’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만은 대신 편의점에 앉아서 촛불을 켜 든 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요!’라고 외친다. 이지은은 이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을 두고 “집회는 누구의 문제인가”라며 “사회 분배 시스템의 바닥에 있을수록 정치에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러한 삶의 조건은 정치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주지 않는다”며 이렇게 썼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사회 구조적으로 끊어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어떻게든 개인이 그 조건을 ‘극복’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가치는 어느새 시민권과 이동권, 그 외 무수한 권력 장치에 의해 걸러지고 걸러진 경계 내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되어버리고, ‘직접’까지 닿는 길은 개인 각자의 몫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니 광장의 구호는 ‘직접’ 닿지 못한 이들에까지 분배되지 않는다. 무수한 집회에도 불구하고 알바생의 목숨값이 여전히 삼십 만 원인 것처럼 말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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