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취객 한마디에 범죄자 된 국가유공자...검사, 영장 없이 불법체포[그 시대 유죄추정의 원칙④]

이홍근 기자 2022. 12. 1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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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인을 폭행한 사실이 없음에도 무고를 당해 검찰수사를 받고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연규찬씨. 강윤중 기자

“내가 정말 너무 억울해서 콱 죽어버리려고 했다니께요. 법원 앞에 목매달고.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지난 13일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인사말 대신 손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45년 전 한 취객의 모함으로 검사에게 불법체포를 당한 뒤 옥살이로 인생이 망가졌다는 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노인은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제출한 진실규명 신청서를 품 안에서 꺼냈다. 이미 손때로 너덜너덜해진 신청서는 노인의 억울함을 증명해줄 목격자들의 연락처와 메모로 빼곡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필요성을 인정해 지난달 1일 조사개시를 결정했다.

민원인을 폭행한 사실이 없음에도 무고를 당해 검찰수사를 받고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연규찬씨가 진실규명신청서 접수증명원을 보여주고 있다. 강윤중 기자

노인의 진실규명 신청서는 1977년에서 시작한다. 노인의 이름은 연규찬(77). 24살부터 경찰관으로 일하던 연씨는 1977년 겨울 충북 보은경찰서 삼산파출소에서 카빈총을 꺼내 닦고 있었다. 오후 5시쯤 동료 경찰관들이 순찰을 나가 파출소 안은 조용했지만, 문밖은 장날 술에 취한 주민들로 떠들썩했다.

파출소 안 정적을 깬 건 한 노인의 고성이었다. 술에 취한 이모씨는 들어오자마자 “택시가 나를 안 태워준다”며 소리를 질렀다. 당시 파출소 옆 주차장엔 빈 택시 서너 대가 서 있었는데, 이씨가 술에 거나하게 취한 모습을 보고 기사들이 택시에 태워주지 않은 것이다. 연씨는 “가만히 계시면 곧 도와드리겠다”며 파출소 사환(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과 총기를 마저 닦았다.

그러자 이씨의 폭언이 이어졌다. 이씨는 욕설을 섞어가며 “니들 월급은 누구 돈으로 주는 줄 아느냐”며 “이런 것도 해결해주지 않으면 뭐 하러 여기에 앉아있냐”고 소리를 질렀다. 이어 조카가 정부 고위직에 있다면서 이씨의 인생을 망치겠다고 했다. 연씨와 사환 모두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이씨는 비틀거리며 파출소 밖으로 나섰다.

나중에 재판에서 사환 권모씨는 만취한 이씨가 파출소에 들어와 피고인에게 폭언을 했다고 증언했다. 이씨가 난동을 부리던 중 파출소에 전화가 왔고, 연씨는 이를 받기 위해 이씨에게 잠시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러고 잠시 후 밖을 보니 이씨가 파출소 마당에 주저앉아 있더라는 게 권씨의 설명이다. 한쪽 다리는 펴고 한쪽 다리는 구부린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씨는 30분 뒤, 순찰을 나갔던 동료 경찰관들이 돌아오자 엉덩이를 바닥에 끌며 파출소 안으로 들어왔다. 참고인 진술 등에서 경찰관들은 “이씨가 술에 취해 파출소 내 여러 경찰관들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아무에게나 ‘이놈 네가 내 무릎을 찼지’라고 횡설수설했다”고 증언했다. 연씨 역시 “계단에서 넘어졌는지 갑자기 못 걷겠다며 경찰관이 무릎을 찼다고 이씨가 소리질렀다”고 말했다. 이씨는 곧 파출소 근처 한 의원으로 옮겨졌고 무릎뼈가 부러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시대, 유죄추정의 원칙>민원인을 폭행한 사실이 없음에도 무고를 당해 검찰수사를 받고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연규찬씨가 인터뷰 중 생각에 잠겨 있다. 2022.12.13. 강윤중 기자

주취자의 난동 사건으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그해 봄 급반전됐다. 청주지청 A검사가 연씨를 불러들여 연씨가 이씨의 무릎을 찬 것 아니냐고 추궁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씨는 “청주지청 검사실로 출석하라 해서 버스에 올랐다”며 “당시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잘못을 했어야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할 텐데 떳떳해서 그런지 그냥 의례적인 조사인 줄만 알았다”고 했다.

검사실에 올라가자 A검사는 연씨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연씨는 “잘못한 게 있어야 합의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A검사는 연씨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이튿날 연씨를 재소환했다. 이번엔 존댓말 대신 반말이 나왔다. “합의 봤어? 합의 보라니까 왜 안 봐!” 연씨는 같은 대답을 하며 합의를 거절했고, 그때마다 검사는 연씨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소환했다. 연씨의 집에서 검사실까지는 버스로 편도 한 시간 반 거리였다.

검사실에 네 번째 소환되던 3월27일, A검사는 연씨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구속영장도, 변호인 선임권에 대한 고지도 없었다. 구속 사유도 정확히 듣지 못했다. 이씨는 자신이 구속됐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지프차에 태워져 청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연씨의 아내는 “핸드폰은커녕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며 “조사를 받으러 간 사람이 집에 안 오니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이어 “나중에 파출소에서 사람이 와서는 ‘일이 잘 안 됐다’고 전해줘서 교도소에 간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당시에도 긴급체포는 증거인멸 또는 도망의 염려가 있을 때만 예외적으로 가능했다. 경찰관인 연씨는 고정된 주거에서 신혼살림 중이었고, 검찰의 소환에 4차례 모두 응하는 등 도주의 위험도 없었다. 유일한 목격자인 권 사환이 연씨의 결백을 증언했고, 범행의 증거도 없었다. 그런데도 A검사는 연씨를 영장 없이 체포해 교도소에 구금한 것이다.

연씨는 교도소에서 보낸 첫날 밤을 잊지 못한다. 오전까지만 해도 경찰 제복을 입고 일하던 그였다. 한 평 반 크기의 방에 남자 셋이 누우니 어깨와 어깨가 닿았다. 연씨는 “억울하다는 생각, 아들딸 생각, 집사람 생각을 하다 보니 밤을 새웠다”며 “으스스하고 벌벌벌 떨리는 기분에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연씨는 이씨가 난동 당일 언급한 정부 고위직 인사를 동원해 자신을 구속시켰다고 의심한다. 연씨는 “어느날 교도소에 누가 면회를 와서 봤더니 경찰관 시절 관리하던 부락의 한 주민이었다”며 “주민이 나를 보고는 ‘아저씨, 이씨 조카가 검사를 찾아가 압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어요. 너무 불쌍해서 와봤어요’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민원인을 폭행한 사실이 없음에도 무고를 당해 검찰수사를 받고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연규찬씨. 강윤중 기자

그해 9월 1심에서 재판부는 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를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변소하고, 참고인 파출소 사환 권씨의 진술도 이에 부합한다”며 “피해자의 피해진술 외 이를 인정하기에 족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권씨 말고도 동료 경찰관, 근처에서 이씨를 목격한 주민, 전화를 빌리기 위해 파출소를 찾은 주민 등이 연씨의 결백을 증언했다.

무죄로 풀려날 당시 연씨는 이미 6개월간 교도소에 수감돼 만기를 채운 터였다. 공판 기일이 잡힐 때마다 A검사 측은 연기를 신청했다. 연씨는 수의를 벗고 집으로 돌아가는 귀갓길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고 한다. 연씨는 “드디어 누명이 벗겨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버스 창밖을 계속 쳐다봤다”고 했다.

그러나 1980년 1월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단을 뒤집어 연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원심이 피해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은 채증법칙의 위반이라고 했다. 유일한 증인인 권씨의 증언과 동료 경찰관 등의 탄원서 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씨는 즉각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같은 해 5월 상고를 기각했다.

연씨는 당시 변호사로부터 A검사와 항소심 재판장이 대학 동문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연씨는 “검사가 나를 불법 구속한 마당에 무죄까지 받게 되면 옷을 벗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너무 억울해 법원 앞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1심 검찰 구형 당시 충격을 받아 이미 한 차례 오른손 손가락을 물어뜯고 한 차례 졸도한 그였다.

민원인을 폭행한 사실이 없음에도 무고를 당해 검찰수사를 받고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한 연규찬씨. 강윤중 기자

대법원 선고 이후 연씨는 명예와 직업을 모두 잃었다. 작은 시골 마을엔 소문이 빨랐다. 연씨는 보은에서 직업을 얻을 수 없었다. 연씨는 매일 아침 첫차를 타고 청주로 올라가 건설현장에서 흙짐을 날랐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온 연씨의 어깨엔 지게 모양의 피멍이 낙인처럼 찍혔지만 억울함에 아픈 줄도 몰랐다고 한다.

얄궂게도 택시 시비로 인생을 망친 연씨를 살린 건 택시 운전이었다. 연씨를 안타깝게 여긴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씨는 회사 택시를 몰 수 있게 됐다. 월남전에 두 차례 참전해 얻은 화랑무공훈장이 경력으로 인정돼 3년 뒤에는 개인택시도 몰 수 있게 됐다.

45년이 지난 지금 연씨가 원하는 건 국가의 보상이 아니다. 사과를 할 이씨는 1983년 사망했다. 연씨가 원하는 건 진실규명을 통해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시골 동네는 텃세가 심해요. 지금까지도 말이 흘러요. 40년이 지났는데. 얼마 전에 택시를 운전하는데, 한 손님이 나를 보고는 ‘얘가 종지뼈를 분지른 사람이야’라고 말하더라고요. 속에서 천불이 끓는데 뭐라 할 수가 있나요. 70이 넘은 지금도 억울함이 풀리질 않습니다. 죽기 전에 제 명예가 회복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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