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헌사···영화 ‘가가린’[리뷰]
러시아가 아직 소련이던 1961년,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유리 가가린이 탄 우주비행선 ‘보스토크 1호’가 발사됐다. 사람이 처음으로 우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가가린은 지구를 대기권 밖에서 바라보고 “지구는 푸르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도 유인우주선을 쏘아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최초’ 타이틀은 소련이 가져간 뒤였다. 공산주의 진영은 새로운 시대인 ‘대우주 시대’에도 자본주의보다 앞서나갈 수 있음을 선전했다. 가가린은 공산주의의 슈퍼스타가 됐다.
한 해 뒤 프랑스 공산당은 파리 외곽에 가가린의 이름을 딴 ‘가가린 주택단지(Cité Gagarine)’를 지었다. 직접 가가린이 방문했을 때, 주민들은 환호하며 그에게 꽃잎을 뿌렸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T자 형태의 14층 건물에 370여 가구가 살았다. 공산주의의 전성기에 지어진 건물은 프랑스 공산당의 찬란한 미래를 상징했다. 그러나 이내 공산주의가 쇠락했다. 공장은 문을 닫았고 파리 외곽에 ‘레드 벨트’를 이루고 살던 노동자와 공산주의자들은 떠났다. 건물은 빈곤한 이와 이민자의 터전이 됐다. 지역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2013년 가가린 주택단지의 철거가 결정됐고 2019년에는 세워진 지 57년만에 철거됐다. 한때 희망의 상징이었다 구시대의 유물이 된 이 건물을 배경으로 한 영화 <가가린>이 오는 22일 개봉한다. 파니 리에타르와 제레미 투루일 감독이 2014년 제작한 동명의 단편영화를 발전시켜 장편으로 만들었다.
가가린 주택단지에 사는 소년 유리(알세니 바틸리)가 주인공이다. 그는 건물이 철거되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친구들과 함께 건물을 돌아다니며 전등이나 엘리베이터를 고친다. 추억이 담긴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주민도, 시설이 노후된만큼 불편함을 호소하는 주민도 있다. 철거령이 떨어진다. 주민들은 하나둘 떠나지만 유리는 떠날 수가 없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의 모든 것이 이곳에 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바보라서가 아니다. 리에타르 감독은 “가가린 주택단지는 유리에게 단지 철 지난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의 현재이자, 미래의 토양”이라며 “그곳을 떠나는 것은 가족과 상상 속 세계를 버리는 것이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리는 수많은 철거민을 떠올리게 한다.
감독들은 영화의 힘을 빌려 유리에게 우주비행을 선물한다. 극 초반부터 풍부했던 사운드와 영상미가 건물이 철거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사실적이던 묘사는 차차 유리의 상상을 입더니 마지막에는 환상이 폭발적으로 화면을 채운다. 건물에 설치된 폭탄을 작동시키려는 “셋, 둘, 하나”는 유리의 비행을 위한 카운트다운이 된다. 건물은 비행선이자 우주가 되고 유리는 헤엄치듯 건물 안을 떠다닌다.
영화는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 모두에 대한 헌사다. 개발과 진보의 그늘에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두 감독은 처음 철거령이 떨어졌을 2014년, 다큐멘터리 촬영을 의뢰받고 이 주택단지에 처음 당도했다고 한다. 곧 건물과 주민들에게 매료돼 영화를 찍기로 했다. 영화가 크랭크인할 때 건물 철거도 본격화되는 바람에 한쪽에서 철거가 진행되는 동안 건물 다른 쪽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투루일 감독은 “우리는 건물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며 “그들과 가가린 주택단지의 관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될 것이다. 그게 우리가 포착하고 전달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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