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한미FTA ‘검투사들’...기업들 반도체·배터리 전쟁 전면에
18년차 통상 에이스, 최근 SK 이직
삼성전자서도 글로벌 대외협력 전면에
협상 대표 김종훈은 SK이노 의장
’경제통상 엘리트’ 이탈은 문제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우리는 왜 이런 어려운 통상 협상일을 하게 됐을까요.” (웬디 커틀러 전 미 무역대표부 부대표)
“내가 가르쳐줄까요? 검투사일겁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요. 하지만 당신과 나는 죽기 살기로 하면 일이 될 수 없어요. 둘 다 살아야 합니다.” (김종훈 전 통상교섭본부장·전 국회의원)
‘검투사(gladiator)’라 불렸던 사람들이 있다. 최초의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로드맵이 마련된 2003년 8월부터 한미가 최종 서명에 이른 2007년 6월까지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협상했던 경제외교·통상분야 공무원들이다.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국가간 이해(利害)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리에서 양복입은 글래디에이터로 살았다”고 회고했다. 올해로 한·미FTA가 발효 10년을 맞은 가운데 그때 그 검투사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 전장(戰場)은? 글로벌 반도체·배터리 전쟁이다.
◇ 통상 분야 18년차 ‘에이스’ SK 부사장으로…對EU 업무 앞장
SK는 지난달 양서진 전 외교부 북미유럽경제외교과장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외무고시 39회로 2005년 입부한 양 전 과장은 사무관 시절 통상전략과와 FTA협상총괄과에서 근무했다. 초년병 시절부터 한·미FTA 관련 업무를 하며 경제 외교·통상 분야 커리어를 쌓아온 것인데, 주제네바대표부 1등 서기관이었던 2020년 7월에는 임기 1년의 세계무역기구(WTO) 무역위원회 의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밖에 국가안보실 파견과 주미대사관·제네바대표부 근무 경험이 있고 북미2과장까지 지낸 그의 이직 소식을 놓고 외교부 안팎이 술렁였다.
양 부사장은 반도체·배터리가 주력인 SK에서 본인의 전공을 살려 헝가리, 프랑스 등 그룹 투자가 확대되고 있는 유럽 권역에 대한 글로벌 성장전략 실행 업무를 주로 담당할 예정이다. 유럽이 탄소국경조정세(CBAM) 시행을 앞두고 있고, ‘미국판 IRA’라 불리는 유럽핵심원자재법(RMA) 제정을 추진하는 등 무역 장벽을 높여가고 있는 가운데 여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SK측은 “양 부사장은 북미·유럽대사관과 WTO 근무 경험이 있는 외교통상 전문가”라며 “SK의 핵심 성장 방법론 중 하나인 ‘글로벌 스토리’를 고도화하는데 지원할 예정”이라고 했다.
◇ 삼성에서도 글로벌 대외협력 전면에
양 부사장 말고도 한·미FTA 업무를 담당했던 다수의 공무원들이 퇴직해 반도체·배터리 글로벌 패권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 외시 24회로 외교부에서 FTA 협상총괄팀장, 통상전략과장 등을 지낸 김원경 삼성전자 글로벌대외협력(GPA)팀 부사장이 대표적이다. 2009~2012년 주미대사관 경제참사관으로 일하며 한·미FTA를 협상부터 발효까지 챙긴 그는 2012년 삼성전자 상무로 이직했다. 외교 경험과 협상 능력 등을 바탕으로 약 10년만에 삼성의 글로벌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까지 올랐다. 지난해 이재용 부회장이 미국 출장에서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브라이언 디스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 등을 만났을 때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언론의 이목이 집중됐다.
올해 7월에도 권혁우 전 산업부 미주통상과장이 삼성전자 DS부문(반도체)에 상무로 합류했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20조원을 투자해 신규 파운드리(위탁생산) 라인을 건설하기로 하는 등 현지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 정부와 풀어야할 과제가 많아 관련 인력을 확충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미 정부가 공급망 문제 관련 반도체 정보 제출을 요구하면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행시 45회인 권 상무는 2002년 산업자원부에 입부했고 2005~2011년 외교통상부 FTA상품교섭과, 북미유럽연합통상과, 통상투자진흥과 등에서 근무하며 현장을 두루 경험했다. FTA 협상이 한창이었을 2006년 미국 출장 때문에 배우자의 첫 출산을 지켜보지 못했는데 당시 웬디 커틀러 미측 수석대표가 “코러스(KORUS·한국과 미국을 뜻하는 약칭) 베이비의 출산을 축하한다”는 자필 편지와 함께 선물을 전달해 화제가 됐다. 2010년대 들어서는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른바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 정책에 따라 야심차게 추진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대응 업무도 담당했다. 권 상무는 미 조지타운대 로스쿨 출신으로 미국 변호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강직한 인상 때문에 FTA 협상 때 ‘고독한 검투사’라 불렸던 김종훈 전 외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2019년 3월부터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으로 있다.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라 그 자체로 화제가 됐다. 김 의장은 최근 FTA 협상 경험을 바탕으로 그룹 임직원에게 ‘국제 질서 변화와 우리의 대응’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등 활발한 현장 행보를 하고 있다. SK는 지난해 미 포드사와 합작해 총 10조원 이상을 투자해 테네시주와 켄터키주 등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는다고 밝혔는데 이 과정에서도 일정 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경제 외교·통상 엘리트 이탈 두드러지는 것은 문제
경제 외교나 통상 분야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직하는 것은 한국 경제의 무게 중심이 관(官)에서 민(民)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풀이된다. 동시에 공직 사회가 이들에게 충분한 금전적 보상이나 동기 부여, 인센티브 등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외교관이 전문성을 갖고 있는 특정 분야에서 꾸준히 일하기가 힘들고, 주기적으로 ‘험지’로 분류되는 재외공관에 파견돼 일해야하는 이른바 ‘냉탕·온탕 인사’ 등이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FTA 협상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축적한 자산과 경험이 후대(後代)로 전수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생각해볼 지점이다. 실제로 외교부에서는 초년차 사무관들은 물론 조직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국·과장급들의 이탈이 해마다 두드러지고 있는 추세다. 이번에 SK로 이직한 양 부사장의 경우 스위스 제네바에서 근무하며서 임기 1년의 WTO 금융서비스무역위원장을 지냈고, 권 상무도 2018년 3월부터 1년간 WTO 세이프가드위원장을 역임했다. 한 전직 외교부 간부는 “나라를 대표에 요직에서 일한 것인데 결과적으로는 ‘개인의 스펙’에 활용되는 데 그친 측면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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