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운명과 싸운 제인 에어, 그리고 다락방의 미친 여인 메이슨
로맨스 소설의 고전, ‘제인 에어’는 에어와 로체스터가 역경을 지나 재회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하지만 작가 샬럿 브론테가 그리고자 한 것은 둘의 험난한 사랑보다 자신의 신념과 욕망을 따르는 제인 에어 캐릭터 그 자체다.
영국 작가 샬럿 브론테가 1847년에 발표한 '제인 에어’다. 제인 에어는 때때로 주인이라고 부르는 에드워드 로체스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에어는 자신이 주인, 다시 말해 남성과 동등한 사람임을 선언한다. 지금 보면 그의 외침은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소설이 나온 19세기 영국은 여성의 기본권조차 보장되지 않은 사회였다. 영국에서 기혼 여성은 1882년에 재산권을 가질 수 있었고, 여성의 참정권은 1918년에야 보장됐다.
널리 알려져 있듯, '제인 에어’는 대표 연애소설이라 할 만하다. 연애소설은 소설 속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증명해내야 한다. 사랑의 숭고함은 장애물이 얼마나 높으냐로 판별되는데, 사회적 금기, 신분제, 빈부격차 등이 주인공들 사이에 가로놓인다.
남자 주인공 로체스터가 유럽 곳곳에 저택들을 갖고 있는 부자인 반면 에어는 고아다. 에어는 외숙모의 손에 자라다 고아원과 다름없는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로 지냈다. 이후 로체스터가 거둔 정부의 딸 아델의 가정교사로 일하게 됐다. 앞서 인용한 당당한 자기 선언은 로체스터를 사랑했지만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할 것 같아 막 떠나려고 결심한 참에 한 발언이다. 두 주인공 사이에 놓인 장애물은 신분과 빈부격차다.
사랑의 여인, 제인 에어
외숙모는 결국 그를 고아들이 교육받는 로우드 학교로 보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는 학교다. 실제로 작가 브론테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자매들과 기숙학교에 다녔다. 여기서 영양실조와 폐렴으로 두 언니를 잃기도 했다. 그나마 소설 속 에어는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도 사귀었다. 그 친구가 결핵으로 격리되자 에어는 찾아가 옆에 누워 잠들었다. 친구는 그 밤에 죽었다.
다른 학생들은 티푸스로 죽어 나갔다. 학내 실태가 외부로 폭로되고 나서야 학교는 불합리적인 관행을 개선하기 시작한다. 이후 에어는 학생으로 6년, 교사로 2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자유와 변화,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새로운 고생살이’를 위해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신문에 광고를 내서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다. 로체스터가 소유하고 있는 손필드의 저택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과 일은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럼에도 에어는 여전히 번잡한 세상과 도시를 더 많이 보고 싶어 했고, 더 많은 경험을 해보길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여성들도 남성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위해 연습이 필요하고 남자 형제들만큼 그들의 노력을 발휘할 분야가 필요하다."
그의 말이다. 내가 제인 에어를 다시 만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제인 에어’는 운명에 시달리는 한 여성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가 아니다. 불행한 신세를 부자 남자를 만나 해결하는 꿈같은 신데렐라 이야기도 아니다.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해가는,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당당한 여성의 이야기다. 에어의 성장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쉽게 꺾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남에게 내놓을 수 없는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결국 쟁취하는 삶.
에어는 점점 로체스터에게 빠져들었지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로체스터와 그의 지인들은 수많은 저택들을 돌아다니며 파티를 열었다. 이번에는 손필드 차례였다. 로체스터와 결혼할 거라고 거론되는 여자도 이곳을 방문했다. 에어는 괴로운 마음으로 그들의 모임을 지켜보았다. 에어는 로체스터에게 손필드의 저택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로체스터가 구혼한 것은 에어. 로체스터는 에어의 질투를 일으키려고 다른 여자를 끌어들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도달한 결혼이었다. 목사가 "이 결혼에 문제가 있으면 지금 나서라"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하는 찰나, 뜻밖에 런던의 변호사라는 사람이 나섰다.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버사 메이슨이 자메이카 섬 교회에서 결혼했다는 기록을 제시했다. 손필드 저택의 3층에는 '괴상한 야수’ 같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로체스터의 합법적 부인 메이슨이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욱더 사랑해. 나는 하느님이 주시고 인간이 인정한 법을 지킬 거야. …중략… 이전부터 믿어왔던 의견들과 이전의 결심들만이 이 순간 나를 지탱해줄 거야. 그곳에 나는 발을 굳게 딛고 서 있을 거야."
에어에겐 로체스터와의 사랑보다 스스로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자신의 결심을 지키기 위한 대가는 컸다. 에어는 로체스터의 저택을 나와 마차를 잡아탄 뒤, 가지고 있는 돈으로 갈 수 있는 만큼 향했다. 거의 먹지 못한 채 황야를 헤매다 잡풀 사이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때 에어에게 슬픈 마음이 일어났다. 끝없는 생각의 고문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에어는 생명의 창조자이자 구원자인 하느님을 향해 로체스터를 위한 기도를 했다. 날이 밝자 황야에 도마뱀이 지나가고 벌이 먹을 것을 찾았다. 에어는 자신이 벌과 도마뱀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욕구와 고통과 책임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황야를 떠나기로 한다.
이제 에어가 마주한 것은 지독한 궁핍이었다. 마을의 한 빵 가게에서는 차가운 대우를 받았다. 배는 고프고 피로한 데다 너무 부끄러웠다.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인가를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가진 게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고아였으니 지독한 가난은 스스로가 아니면 해결할 수가 없었다.
에어는 '하나님이 주시고 인간이 인정한 법’을 지키려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면서도 로체스터를 향한 사랑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에어에겐 신에 대한 믿음과 법에 대한 존중이 이 못지않게 중요했다.
마음이 가는 것은 에어의 의지다.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 그의 삶의 궁극적 의미는 로체스터와의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걸고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를 지켜내는 데 있었다. 타인과의 사랑과 결혼은 자유로운 자신의 의지와 함께할 때 행복의 빛을 뿜는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다른 여인, 버사 메이슨
‘제인 에어’를 다시 읽으며 시선을 붙든 건 로체스터의 법적 부인, 버사 메이슨이다. 메이슨은 철저히 짓밟힌 여자였다. 메이슨의 존재에 대해 로체스터가 에어에게 전하는 변명은 다음과 같다. 로체스터의 아버지는 재산을 형에게 모조리 물려주고 차남 로체스터를 위해선 결혼 지참금을 생각해냈다. 메이슨은 자메이카에 사는 대농장주의 딸이었다. 로체스터는 이런 아버지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자메이카로 신부를 만나러 간다. 메이슨은 아름다웠고, 두 사람은 곧 결혼했다.결혼 4년 후, 아버지와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 로체스터는 예기치 않게 부자가 됐다. 이전처럼 메이슨의 재산이 절박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미 결혼한 터라 메이슨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때 의사들은 메이슨이 정신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결국 메이슨은 영국으로 끌려와 손필드의 저택에 감금된다.
‘제인 에어’와 짝을 하는 소설이 있다. 영국 작가 진 리스가 1966년 발표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다. '다락방에 갇힌 미친 아내’ 메이슨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자메이카에 이주한 백인 가족이라는 문화적 배경을 가진 메이슨과 그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에서 온 로체스터가 서로를 깊이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극은 메이슨과 로체스터 사이에 놓인 그 몰이해에서 탄생하고 심화한다.
오래전 '제인 에어’를 읽을 때는 주인공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 사이 사랑의 완성에 몰두했다. 조연인 메이슨은 장애물 역할이었다. 나이가 들고 책을 다시 열었을 때는 두 여성의 서로 다른 처지에 특히 눈이 갔다. 에어가 대영제국의 여성이라면, 메이슨은 식민지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메이슨은 대영제국에 의해 지배당하는 식민지, 남성에 의해 착취당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만하다. '제인 에어’에서 주인공 에어가 당당한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찾아갔다면, '제인 에어’의 조연이자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주인공 메이슨은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제국에서 온 남자와 결혼했고, 제국으로 끌려가 골방에 갇혀 삶을 마쳤다. 메이슨은 쟁탈당하고 버려진 식민지 국가의 비극 그 자체다.
대영제국의 남성 로체스터가 불을 지른 메이슨을 구하려다 두 눈과 한 손을 잃었다고 해서 그가 완전한 속죄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여자의 재산을 노리고 했던 결혼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지만, 합법적 이혼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부인을 숨겨놓고 하려던 결혼은 더 용납하기 어렵다.
두 번째 독서의 발견
자, 두 번째 독서의 결론을 내리자. 브론테가 '제인 에어’를 통해 보여준 건 가난한 고아였던 한 여성이 자신의 시대와 대면해 자아를 확립해가는 이야기다. 이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제인 에어’는 충분히 다시 꺼내 볼 가치가 있다. 제인 에어라는 이름은 이제 내게 자유를 찾아가는 당당한 여성의 이름으로 다가온다.여기에 브론테는 여성의 또 다른 삶을 제시한다. 에어의 삶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인생이었다면, 메이슨의 삶은 절망으로 떨어지는 인생이었다. 에어의 주체적 삶에 매료되면서도 메이슨의 삶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의 삶이 현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기 때문일 터다.
이제 여자의 삶은 제인 에어가 살았던 19세기처럼 남자에 의해 크게 좌우되진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그렇지 않다고 보기도 어렵다. 좋은 사랑과 바람직한 성평등은 어떻게 함께 걸어 갈 수 있는 걸까. 결코 쉽지 않은 질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인 에어를 다시 만나게 됐다. 나 자신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다. 남자에 좌우되는 삶을 살지 마라. 무엇이든 자신의 기준과 가치를 중시하고 선택하라. 19세기에 살았던 제인 에어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 전하는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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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1970년 출생.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다양한 글쓰기를 하는 전업 에세이스트로 살아가고 있다.
사진제공 유니버설픽처스 을유문화사
성지연 에세이스트, 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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