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보고 싶다” 베트남에서 날아온 정휘량의 진심

최창환 2022. 12. 18.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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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정휘량(38, 198cm)은 학구열이 높은 선수였다. 단 몇 분을 뛰더라도 매 경기, 매 시즌을 성장의 기회라 여겼다. 은퇴 후에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더욱 멋있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이역만리에 있어도 정휘량의 진심은 한국농구의 발전이었다.

농구를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 농구를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 반대가 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193cm였는데 농구부 제의를 받은 적도 없었다. 2학년 진학 전 어머니가 데려간 곳이 전주고였다. 어릴 땐 반대하셨지만, 밥만 먹으면 농구하러 가는 걸 보며 생각이 바뀌신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농구부 테스트를 봤다. 끝나자마자 김만진 감독님이 빨리 농구화 사오라고 하셨다.

뒤늦게 엘리트 선수가 됐지만 성장세가 빨랐다. 단국대에 진학했고, 2007 유니버시아드 대표팀에도 선발됐다.
아직도 김만진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이것저것 다 주문하셨다면 그저 그런 선수가 됐을 텐데 슛 연습을 많이 시키셨다. 하루에 몇 시간씩 자세를 교정해주셨다. 애초에 슛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테스트 때 공을 똑바로 보내지도 못해 형들이 웃을 정도였다. 뛰는 자세도 이상했고, 기본기는 당연히 부족했다. 프로에 간 이후에도 티가 날 정도로 기본기가 약했지만, 슛만큼은 어릴 때부터 많이 훈련해서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운도 좋았다. 전주고 최고의 멤버들과 함께 했다. 당시 전주고에 (김)학섭이 형을 비롯해 잘하는 형들이 많았다. 학섭이 형이 디테일한 부분도 많이 말씀해주셨는데 당시에는 이해를 못했다. 그냥 왔다 갔다 하는 농구만 했는데도 선배들이 워낙 잘해서 10점씩 꼬박꼬박 기록했다.

2008 신인 드래프트에서 KT&G(현 KGC)에 1라운드 7순위로 지명됐다. 단국대가 배출한 최초의 1라운더였는데?
즐기진 못했다. (김)태환이는 함께 프로에 왔지만 또 다른 동료 1명은 지명받지 못했다. 다들 힘들게 운동한 동료들이었다. 드래프트 끝난 후 인사하려고 찾아봤는데 이미 갔더라. 고생했다는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개인적으로 1라운드에 지명된 건 감사하고 과분한 일이었다. 내가 잘나서 프로에 간 게 아니었다.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많은 분들이 도와준 덕분이었다. 동기들 중 나만 1라운드에 뽑혀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데뷔시즌에는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다. 프로의 벽이 느껴지진 않았나?
벽이라기보단 화가 났다. 엘리트 시스템을 통해 좋은 동료들을 만나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와보니 프로에서 배우는 건 차원이 달랐다. ‘왜 학교 다닐 때는 이걸 배우지 못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패턴 훈련하는 건 비슷하지만 전력분석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었다. 아마는 기록지에서 득점, 리바운드만 봤다면 프로는 가장 확률 높은 공격이 무엇인지, 왜 야투율이 떨어졌는지도 영상 분석을 했다. 2년차까지 뒤통수 맞은 느낌으로 운동했다. 그러다 보니 농구에 대해 또 다른 시각에서 배울 수 있었다.

함지훈, 김영환, 이광재, 이현민 등 함께 군 입대한 2010년은 역대급 군번으로 꼽히고 있다.
상무 시절은 너무 재밌었다. 경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대학, 프로에서 해야 해서 하는 훈련, 경기를 했다면 상무에서는 왜 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려고 했다. 정말 많이 배웠다. 동기들에게 충격도 받았다. 어떤 경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0.7초전 1점 차에서 작전타임이 나왔다. 나는 ‘슛 넣어서 이길까? 질까?’ 생각하고 있는데 (이)현민이 형, (김)영환이는 토론을 했다. “내가 감독이면 얘로 스크린을 써서 찬스 만들 거야”라고 하는 걸 들으며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싶었다. 그게 내 농구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이후부터 가드들의 움직임을 더 살피게 됐고, 재밌는 경기가 나오면 ‘감독님이 왜 이 전술을 썼을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1, 2년차 때 감독님이 주문하셨던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상무에서 깨달았다. 이후 훈련을 통해 그 부분을 다듬었고, 자신감도 갖게 됐다. 상무에서 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었다.

군 제대 후인 2012-2013시즌이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다. 오세근의 시즌아웃이 있긴 했지만 역할 수행에 있어 성장한 모습이 보였다.
당시 동료였던 삼성 은희석 감독님, DB 김성철 코치님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많이 알려주셨다. 동시에 자신감도 심어주셨다. 전력이 좋아서 내가 특별히 한 건 없었다. 볼 원활하게 돌게 해주고, 찬스 때 던지고, 리바운드와 수비에 가담하면 됐다. 두 분은 당시 코치나 다름없었다. 선수들을 잘 다독여줬던 선배들이다.

당시 선배였던 은희석이 지금은 삼성 감독을 맡아 체질 개선을 이끌고 있다.
감독 선임 기사를 보며 ‘6강은 그냥 가겠네’ 싶었다. 감독님의 성격이나 스타일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을 하나로 묶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팀을 끈끈하게 다듬어가는 단계다. 삼성은 조만간 무서운 팀이 될 것 같다.

2012-2013시즌 도중 열린 프로-아마 최강전도 빼놓을 수 없다. KGC는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대학팀에 패한 최초의 팀이 됐다. 중앙대에 재학 중이었던 전성현(33점 3점슛 4개 5리바운드)의 활약이 돋보였다.
그때도 슛 릴리즈가 정말 빨랐다. 뛰어난 슈터여서 못 막았다. KGC 입단했을 때 “우리가 너 키워준 거야”라고 했다(웃음).

2013-2014시즌까지 식스맨으로 활용도가 높았는데 이후 2시즌은 출전 기회가 적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내 역할에 집중하려 했다. 코트 외에서도 팀이 나에게 원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 역할을 못하면 선수 정휘량은 의미가 없다고 받아들이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매 시즌 실력을 떠나 발전하고 배우고 있다는 데에 의미를 뒀다.

출전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주장 양희종을 돕는 부주장을 계속해서 맡을 정도로 KGC에서 신뢰하는 선수였다. KGC에서 보낸 6시즌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나에게 중책을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안양은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놀러 가도 집처럼 느껴질 것 같다. 너무 편한 곳이다. 사무국장님이었던 김호겸 KT&G 실장님으로부터 최근 연락을 받아 식사를 함께 했다. 내가 먼저 연락 못 드려 죄송했는데 선수 시절처럼 조언을 많이 해주셨다. 내 노력이 헛되진 않았다는 걸 느꼈다.

2016년에 KCC로 무상 트레이드됐다. 당시 인터뷰에서 잘해서 옮기는 게 아니라 KGC에 미안하다고 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내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고는 자신 있게 말 못하겠더라. 완벽했다면 웃으면서 떠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컸다.

KCC 이적 후 한 시즌만 치른 후 은퇴했다. 계약만료까지 1년 남겨두고 은퇴를 결심했던 배경은?
매 시즌 뭔가를 배우려 노력해왔고, 항상 모멘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KCC에서의 마지막 시즌에는 그런 걸 못 느꼈다. 정체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계약기간은 채워야겠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반면, 아내는 빨리 다른 삶을 준비하자고 했다. 연봉은 당연히 삭감될 거라 예상했는데 제시안이 예상보다 낮으면 미련 없이 은퇴하자고 뜻을 모았다. 그런데 KCC에서 잘 챙겨주셨다. 연봉 협상하러 갔는데 삭감 폭이 생각보다 적었다. 그래서 한 시즌 더 뛸 생각이었다. 미련이 남았고 특별히 아픈 부위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뜻이 강했다. 연봉 협상 첫날 밤새 거취에 대해 얘기했고, 1년 빨리 다음 인생을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다음날 정장 입고 출근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사무국장님은 의아해하셨지만,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웃으면서 체육관을 나왔다. (이정현을 영입한 KCC가 샐러리캡 압박으로 계약하지 않은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는데?)맞다. ‘샐러리캡 때문에 정휘량을 잘랐다’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순전히 내 계획에 의한 은퇴였다. 괜히 (이)정현이에게 미안했다.

공교롭게 한 끗 차이로 번번이 우승을 못했다. KGC가 첫 우승한 2011-2012시즌에는 상무에서 제대했지만 선수로 등록되지 않았고, 트레이드된 후인 2016-2017시즌에 KGC가 통합우승을 했다. KCC는 트레이드 전인 2015-2016시즌에 정규리그 우승을 했다.
아내가 “정휘량은 우승을 피해 가는 게 국룰”이라고 정의해줬다(웃음). KGC의 첫 우승은 벤치 뒤에서 보며 자극받았다. KCC로 갈 때는 (오)세근이에게 “내가 떠났으니 우승할 거야”라고 했는데 진짜 했다. (우승은)내 거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은퇴 후 베트남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마땅한 아이템은 없었다. 시장조사가 필요했는데 당초 계획은 미국이었다. 너무 멀어서 부모님이 반대했는데 마침 베트남이 ‘포스트 차이나’라며 각광 받고 있었다. 은퇴하자마자 3개월 계획하고 갔는데 1개월도 안 돼 이주를 결심했다. 베트남에서 농구는 비인기 종목이라 생각했는데 농구 인기가 높았다. 아이들이 농구공을 끼고 돌아다니더라. 베트남에 오길 잘한 것 같다.

베트남어는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나?
가족 가운데 아내, 아이들만 할 수 있다. 집에서 나만 왕따다(웃음). 3개월 정도 배웠는데 안 늘더라. 그런데 베트남은 영어를 구사하는 인구가 많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끼리도 영어로 대화한다.

이주를 결심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생활적인 면에서 맞는 게 많았다. 생각보다 안 더웠고 미국, 중국, 대만, 일본 등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2017년 10월에 귀국해 12월초쯤 이주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농구교실을 시작했는데 60명이 지원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규모여서 회사를 세워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암리에 운영할 수도 있었지만 합법적으로 회사를 차려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싶었다. 회사명은 워너비에서 착안해 ‘BGROW’로 지었다.

회사는 번창했나?
학생이 160명까지 늘어 ‘이제 되겠구나’ 하던 찰나에 코로나19가 터졌다. 베트남은 코로나19 확산 후 방역법이 락다운, 말 그대로 외출 금지였다. 우리 아카데미도 영업정지 대상이어서 한동안 만신창이가 됐다. 락다운이어도 월세, 집세, 직원들 급여는 계속 나가야 했다. 내 멘탈도 나갔다(웃음). 락다운 기간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조급해지더라. 아르바이트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아내가 말렸다. 더 차근차근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으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돌아보면 좋은 시기였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뭔지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지만, 그 시기가 없었다면 지금도 농구교실만 매달리고 있었을 것 같다. 농구교실은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베트남에 놀러 가는 선수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계속 오라고 연락한다. 올해는 (강)병현이, 세근이가 가족들과 함께 왔다. 아이들끼리 나이가 비슷해서 편하다. 나나 아내는 베트남에서 친목을 다지거나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많지 않아서 베트남까지 와주면 너무 고맙다. 스트레스도 풀린다.

한국으로 돌아와 농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
당연히 있다. 최근 유튜브가 활성화돼 허재 감독님, 추승균 감독님, (하)승진이 등 많은 선후배들이 농구 흥행을 위해 노력하는 게 보인다. 모두 농구를 위해 하는 일인데 나도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분명 한국과 연결고리가 생길 것이다. 나 역시 농구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향후 계획은?
우리 농구교실에서 “나는 한국 엘리트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라고 얘기한다. 엘리트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프로에 못 갔겠지만, 그것 때문에 창의력은 잃었다고 생각한다. 창의력을 가져야 한다는 걸 프로에서 깨달았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겼다면 선수 정휘량도 조금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지금도 좋은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후배들은 그런 생각을 안 했으면 한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베트남, 필리핀 코치들과 얘기해보면 그들도 고민이 똑같다. 나는 근본에 다가가려 한다. “안 된다”라며 불평만 하지 않고 바꿔보자는 마음이 크다. 우리 농구교실 학생들 가운데 한국인이 60%지만 대만, 일본, 미국, 일본, 필리핀 학생들도 있다. 내 힘이 미미하더라도 몇 명에게 의미가 전달된다면 농구도 더 흥행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농구교실 외에 진행 중인 사업도 있다. IT 계열에 대한 목표가 있어서 은퇴 후 학원도 다녔었다. 애플리케이션을 제작 중이다. 아직 배포되진 않았지만 완성단계다. 궁극적으로는 하루를 살아도 배우면서 마무리하고 싶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살고 있다.

#사진_유용우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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