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모체인 '광주', 그리고 '5월 항쟁'을 다시 이름 지어야 하는 이유

2022. 12. 18.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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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정신과 헌법전문 토론회] ② 5.18민주화운동의 명칭 문제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 가운데, 10차 개헌에는 반드시 성사시켜 새로운 민주주의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와 함께 5.18민주화운동의 정식 명칭을 '광주 5월 항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5.18기념재단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제1세미나실에서 '5.18정신과 헌법전문 국회토론회'를 개최하고 5월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 당위성과 선행 조건 등을 논의했다.

이날 토론회에는 임지봉 서강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와 김윤철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발표자로 나섰으며, 김진표 국회의장을 비롯한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당대표가 격려사를 했다.

<프레시안>은 재단의 도움으로, 임지봉 교수와 김윤철 교수의 발표문 전문을 각각 게재한다.

임 교수는 '5.18 헌법전문 수록의 당위성'이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5.18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포함하는 모든 민주화운동의 강력한 추동력이었다"며 "'5.18 민주주의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인 개헌과제"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5.18민주화운동의 명칭 문제'라는 제목의 발표문에서 "5.18민주화운동의 명칭을 '(1980년) 5월 광주항쟁' 또는 '광주 5월 항쟁'으로 바꿔 5월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 당위성을 확립해야 한다"면서 "5.18이 진행된 광주는 1980년 이후 진행된 모든 민주화운동의 모체"라고 강조했다. 편집자.

▲ 1980년 5월 광주. ⓒgoogle.com

5.18민주화운동의 명칭 문제: 민중성과 공동체성에 기초한 새로운 명칭 구상

Ⅰ. 지금 왜 다시 명칭을 문제 삼는가: 민주-공화를 위협하는 정치사회적 현실 살피기

지금 왜 다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문제 삼는가? 명칭에 대한 논의는 최근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상 정부의 공식명칭인 5.18민주화운동으로 굳어진 것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다. 가령 학회 논문 발표 시에도 공식 명칭을 의식해 '5.18민주화운동…'으로 제목을 잡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입말'로는 보통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이념-당파-당리당략 등에 따라 5.18민주화운동을 이해하는 관점과 방식이 달라 그 호칭도 각각일 것이다. '폭동'이라 부르며 여전히 부정과 왜곡을 일삼는 이들을 제외해도 그렇다.

필자의 경우 '광주항쟁' '80년 5월' '5월 광주' 등이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 대학 시절 호칭 습관 때문이리라. 1988년 처음 광주 집결 투쟁을 벌이던 때부터 필자는 주로 광주항쟁이라고 불렀던 것 같고, 연도의 표기도 광주항쟁 00년 식으로 붙여 불렀다. 반면에 5.18민주화운동은 아직도 좀 낯설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고백하자면, 공식명칭이 5.18민주화운동으로 정해진 것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또 특별한 이론적-실천적 이의의 제기 같은 문제의식의 표출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공식성과 그것이 뜻하는 정치사회적 '승인'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명칭을 다시금 문제 삼게 된 것은 오늘 토론회의 제목에도 반영되어있듯이 '5.18민주화운동'(혹은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담기로 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냥 공식명칭인 5.18민주화운동으로 넣을 것인지, 아니면 이 참에 현재의 '공식 명칭이 갖고 있는 문제'2)를 해소(?)하고 새로운 명칭을 정해 담을 것인지-혹은 담을 수 있을 것인지-검토해보자는 것이다.

그간의 논의에서 제기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의 문제는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시간성의 삭제, 발생일만 드러나고 이전-이후의 과정을 포괄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 장소성의 삭제, 즉 '광주'를 뺀 것이다. 셋째, 주체의 삭제, 즉 민중을 뺀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변혁성(무장투쟁과 공동체성)의 삭제다.

이 네 가지 삭제 모두 나름의 합당한 이유가 있다. 시간성의 삭제는 5.18에서 5.27에 이르는 전개과정은 물론, 1980년대 반독재민주변혁운동의 모태였음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 모든 시기를 담아내는 표현을 찾기 쉽지 않으니, 통상적으로 그렇듯이 발생일 기준으로 사건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장소성의 삭제는 지역주의 (정당) 정치가 가져온 광주-호남의 고립을 의식한 것이고, 목포 등 광주에 국한되지 않았던 투쟁 지역의 범위 때문이다. 주체의 삭제는 주요 참여자가 민중이었다고 해도 그들만의 투쟁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이다. 당시는 물론 1980년대에도 민주화운동의 주체는 민중만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변혁성의 삭제는 무장저항이 계획적이지 않은 국가폭력에 대한 사후적-수동적-반응적인 것이었기에 공식 명칭으로 포괄할 것까지는 없다는 것이고, 공동체성도 그 자체가 투쟁의 목적이 아니고 상황의 전개과정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었으며, 미래지향성은 이후 민주화 운동에 끼친 영향과 운동 주체들의 급진 이념적 해석에 기댄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삭제된 사실과 의미와 영향의 측면들을 놔두고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유지해도 될까? 필자는 이에 대한 즉답에 '유보적'이다. 개인적인 이론적-실천적 성향에 기초해 어느 한 부분만을 부각하고 강조해 명칭을 정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은 더욱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사실 자체가 새롭게 드러나고 있기도 하지만, '사실을 바라보는 처지와 관점의 변화와 그것이 낳은 사실의 재구성'이 이루어져 온 시점과 상황에 서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칭의 변경과 유지 문제는 계속 논쟁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는 어떤 기준으로 유지와 변경의 여부를 결정할지에 대해 먼저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명칭에 반영되어야 하는 –혹은 명칭은 유지해도 그 성격에 있어- 강조되어야 할 사실과 의미와 영향의 측면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감안할 때,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미래 민주주의'의 문제이다.3) 그리고 미래 민주주의를 사유하고 모색함에 있어 필수적으로 거칠 수밖에 없는 한국을 비롯한 우리 사는 세계의 현재적 특성과 5.18민주화운동이 갖는 관계성이다.

미래 민주주의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을-그 명칭과 표현이 무엇이든 간에-헌법 전문에 담는 다는 것의 의미가 과거에 대한 기억과 칭송만이 아니라, 또 문자화만을 통한 계승과 전승이 아니라, 국가라는 정치공동체가 앞으로 지향하고 추구해야 할 이념적 가치와 원리의 실제 작동이라는 데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래 민주주의 문제는 특히 현재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직결되어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 제도의 형해화를 의미하는 '포스트 민주주의론'4)이 제기된 가운데,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극우 포퓰리즘이 발흥하고 정치양극화 양상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민(民)이 실질적 주권자는 물론이고, '절반의 주권자'로도 대우받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정치참여는커녕, 사회경제적 고통 속에 자신의 일터에서 생명과 안전마저 보장받지 못 하는 삶의 처지에 처해 있다.

이는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공화'의 질서를 해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5.18민주화운동의 새로운 혹은 되찾을 진짜 이름은-혹은 새로이, 다시금 조명되어야 할 그 의미와 영향의 측면은-공화의 가치와 원리의 구현이라는 당대의 과제와 연결되어 미래 민주주의의 장을 여는 정신을 담고 있고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로부터 5.18민주화운동에서부각되어야 할 것은 '민중성'과 '공동체성(연대성)'이며, 그것에 기초한 대안체제 지향의 정신이다.

Ⅱ. 5.18민주화운동의 '정치성': 정치균열과 정당체제와의 연결성 포착하기

명칭 문제를 논함에 있어 꼭 거론되는 것이 '성격' 문제다. 하지만 그간의 성격 논의5)에 기초한 명칭 결정은 두 가지 지점을 대체로 간과하고 있다. 하나는 성격 (논의) 그 자체가 명칭을 정함에 있어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결국 여야 합의 등의 과정을 거치는 등 정치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태/폭동->봉기/항쟁/투쟁->운동 등에 이르는 명칭의 변천 과정6)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뿐만 아니라 5.18특별법의 제정과 헌법 조문 포함 논의도 마찬가지다. 장소성과 주체 그리고 변혁성 등이 문제되고 삭제된 것도 그와 같은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는 성격 규정과 법제화의 '최종심급'이 정치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칭 결정에 있어 학계를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의 영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정치적 '구조', 즉, 정치균열 구조와 정당체제의 특성이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그 명칭의 결정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5.18민주화운동의 명칭 변경 혹은 유지의 문제 역시 그러한 구조적 조건에 기초해 다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이론적 논의보다는 균열구조와 정당체제의 변화를 꾀하는 '정치적-사회 운동적' 실천에 바탕해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다소 성급한 예측과 전망일 수 있지만), 구조의 변화 없이는 헌법전문에 들어갈 명칭은 현재의 이름, 즉 5.18민주화운동이 될 공산이 크다. 또 그 정신의 내용과 의미에 대한 설명도 과거의 반독재 운동이라는 것에 한정될 공산이 크다.

5.18민주화운동은 정치적 구조의 어떤 특성과 연결되어있는 것일까? 5.18민주화운동은 민주-반민주 균열, 진보-보수 균열, 지역 균열 등에 연결되어 있다. 지금도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정과 왜곡이 일어나는 것은 단지 진상 규명이 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일탈적 극우주의자들의 존재만이 아니라, 5.18민주화운동을 낳고 그것의 진상 규명을 가로막고 일탈적 극우주의자의 등장과 망동을 가능케 하고, 성격 규정과 명칭 등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을 낳은 민주-반민주, 진보-보수, 지역 등의 균열이 중첩되어 있는 거대 양당(현 더불어민주당-국민의 힘)이 여야로 나뉘어 지배하고 다투는 정당체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어떻게 민주-반민주, 진보-보수, 지역 등의 균열 및 거대 양당 체제와연결되어진 것일까?7)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성을 살펴봐야 한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반민주 균열의 갈등을 강화했다. 그 때문에 1980년대 전 시기에 걸쳐 5.18민주화운동은 반독재민주변혁운동의 역사적, 정신적 원천이었다. 야당세력이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대해 전투적 태도를 취하면서 선명야당 노선을 택해 반독재민주화운동 연합의 일원으로 나서게 된 주된 요인도 5.18민주화운동의 영향이었다. 가택연금 중이던 야당 지도자 김영삼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과 미국 망명 중이던 김대중의 민주화투쟁 전선으로의 복귀를 촉발한 것도 5.18민주화운동이다. 무엇보다도 5.18민주화운동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게 '학살 정권'이라는 치명적 약점(취약한 정당성)을 부과했다. 물가안정과 고도 성장과 올림픽 개최 등으로도 보완할 수 없었다.

또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진보-보수 균열의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즉, 5.18민주화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사라졌던 진보적 사상과 진보운동을 폭발적으로 복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진보-보수 균열의 형성은 급진변혁운동 세력의 등장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의 등장은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성'으로부터 얻은 두 가지 사회운동적 자각에 바탕한 것이었다. 하나는 19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이 국가권력과 체제 자체에 대한 변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층 민중들의 자연발생적이지만 역동적인 투쟁을 체제변혁적 투쟁으로 전화시킬 목적의식적인 전위가 부재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각에 바탕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급진이념을 수용한 변혁운동세력이 등장했다. 이로부터 진보-보수 균열은 사회운동적 자각 과정을 거친 변혁운동세력의 독재정권에 대한 투쟁 과정에서, 또 반독재민주화운동연합의 일원이었고 정치적 대표였지만, 민주적 절차와 제도의 복원에 초점을 맞춘 야당세력과의 관계에서도 작동하였다.

5.18민주화운동은 지역균열의 동원과 장착에도 연결되었다. 오랜 지역 편견과 지역불균형 발전이라는 역사 과정에서 핍박받아온 '광주'에 대한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탓이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부터 신군부 세력이 자극하고 동원해온 광주-호남에 대한 지역감정과 편견의 동원전략은 불행하게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선거정치국면에서 야당 지도자 간에, 그리고 더 나아가 전체 정치세력 간의 경쟁적 자원으로 지역균열이 동원되면서 재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지역정당체제가 만들어지고 3당 합당이 이루어졌고, 이 와중에 5.18민주화운동마저 그 장소성을 이유로 정치적 악용의 소재가 되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장소성을 갖는다. 따라서 그 자체가 혹은 그것에 기댄 호명이(광주항쟁,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럼에도 지역균열의 동원과 장착 탓에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이 보여주듯이 장소성을 거세해야 할 정도로 5.18민주화운동은 고통 받아야 했다.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 (정당)정치의 굴곡이 5.18민주화운동에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87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한 민주화 이후 35년이 지났는데도 5.18민주화운동과 연결되어있는 그와 같은 균열들이 일정한 '조작' 과정을 거치며 현재의 양당지배체제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양당이 모두 민주화 이전과 이후를 잇는 '계승정당'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승정당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과거사로 한정해 –정치적 민주주의에 한정해- 민주-반민주 균열을 재동원하는(상대방을 낙인찍는) 기표로, 진보-보수 균열을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망에서 민중성과 변혁성을 배제하는-그래서 다시 민주-반민주 균열의 재동원으로 이어지는- 양대 정당 간의 여야 균열로 재개념화하는 데 이용하고 있으며, 지역균열을 그리 이용하는 모체로 삼아 장소성이 삭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성과 변혁성에 기초한 5.18민주화운동의 전국성과 세계성(미래 민주주의적 함의)의 발현을 차단하고 지역화시키고 있다.

민주화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이 자신들의 태생적 약점임을 중간 중간 드러내는 정당의 경우는 그것의 의미, 특히 민중성과 변혁성을 배재하거나 최소화하려고 한다. 노태우-민정당이 투쟁이라고 하지 말고, 운동이라고 하자고 했던 것처럼.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호의적 태도를 보일 때는 그것이 과거의 것인 한에서, 그리고 선거 시기를 비롯해 지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정략인 한에서다.8) 반독재민주화운동연합의 일원인 야당 지도자(김영삼)가 가세하고 대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반독재민주변혁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당의 주요 축은 여전히 5.18민주화운동에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이거나 그 정신의 계승과 구현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다. 특히 최근에는 집권을 위해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심지어 북한의 책동으로까지-규정하는 극우 포퓰리스트들과도 관계를 맺어 왔다. 양대 정당 간 선거 경쟁에서 고정적인 지역기반에 더해 이들까지 포괄해야 지지기반을 극대화해 승리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독재민주화운동연합의 일원이었고, 변혁운동세력 출신 상당수가 진입해 있는 정당의 경우는 헌법전문에 포함시키자는 제안을 주도할 정도이지만, 다른 이유에서 경쟁자와 마찬가지로 민중성과 변혁성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혹은 민중성과 변혁성이 삭제된 '조작적 진보' 개념을 수용한다. 집권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 체제 친화적9)이어야 하고 선거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건중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자신들의 역사적 기원과 경력으로 조명하면서 의례화(형식화)하고 특정 지역의 지지를 묶어두기 위한 상징으로 가동한다. 그러면서 경쟁자의 약점(반민주독재세력이라는 기원)을 공격하는 무기 정도로 활용한다. 5.18민주화운동의 미래성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진상규명 작업을 지속시키고 당장의 부정과 왜곡을 탓하고 벌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래서 숭고한 과거를 수호하는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이 과정에서 계속 과거의 시간대에 머물러 있게 된다. 5.18민주화운동의 마지노선 역할을 수행하는 데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무용하거나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은 안타깝게도 종종 정쟁의 소재로 전락해 특정 정파에게만 유리한 혹은 당리당략적 사안으로까지 취급받게 된다.10)

Ⅲ. 5.18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명칭 구상: 민중성과 공동체성 주목하기

이상의 논의에 기초해 필자는 5.18민주화운동의 명칭 문제와 관련해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되, 그것을 성격 논의의 재개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작금의 정치사회적 현실에 기초해야 함을 우선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명칭을 둘러싼 논의의 쟁점도 지난 시기 제기된 것을 중심으로 하기보다는 정치사회적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공화'라는 헌법의 이념적 가치와 원리의 구현을 위한 새로운 대안체제의 구상과 연동해서 형성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가로막는 정치 구조의 변화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감안하면, 그것이 꼭 명칭 자체에 반영되어야 할 것-반영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그래서 정신의 내용과 의미 설명으로 대신한다 해도), 민중성과 변혁성에 대한 부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1장에서도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변혁성과 관련해서는 '공동체성(연대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무장투쟁의 경우는 여타의 민주화 운동과의 대표적인 차별 지점으로서, 부당한 국가권력의 억압과 폭력에 대한 처절한 저항성을 드러내주기는 하지만, 명칭 자체에 반영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파리코뮌도 파리무장투쟁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다만 무장투쟁은 부당한 국가폭력을 옹호하려는 혹은 다시 행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 또 무장투쟁이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거나 비난하는 위선적 평화주의자들 혹은 그것을 빌미로 폭동이었다고 왜곡하는 이들이 경각심을 갖게 만드는 '민중적-시민적-자기 결단적 저항'으로 조명되어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보다 항쟁이라고 이름 짓는 것이 좋다고 본다.11) 부마항쟁, 6월 항쟁처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기본적으로 독재 권력과 그것의 폭압성에 대한 민중들의 자기희생적 저항과 투쟁을 통해 전개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 이는 기존 지배질서의 부당함에 맞서 미래 민주주의를 세워내는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힘이기도 하다.

민중성은 도식성을 띠는 계급론적 구분에 기초한 것이기 보다는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배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국가권력에 온몸으로 맞선 '주권자성-시민성'을 발휘했다는 차원에서 조명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모두가 평등한 존재로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함을 알려준 대표 사례로 접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성격 규명의 차원에서 논하기보다는 그것의 '교훈'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간의 논의, 민중이냐 시민이냐는 논의는 다소 소모적이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시민을 자산을 보유한 (소)부르조아 계급으로 보는 관점에 기초한 것인데, 이는 다소 낙후된 관점이라고 본다. 시민을 정치적 권리와 책임의 담지자, 즉 주권자로 보는 최근의 논의에 기초해 '민중의 시민됨'을 보여주었다는 식으로-또 5.18민주화운동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었던 계급.계층12)은 시민이 아니라, 사익을 우선한 자산소유계급이라고 명시하는 식으로- 통합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게 더 타당하다고 본다. 다만 이를 명칭에 반영하기는 다소 복잡한 측면이 있어 어렵다는 생각이다.

장소성 문제는 그간의 명칭 논의에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였다. 필자는 명칭에서 광주를 뺐다고 해서 지역성과 고립성이 해소 혹은 완화되었다고 생각지 않는다.13) 이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기억되고 전승되는 직간접적 체험의 장소는 망월동과 도청 등이 있는 광주다. 학살이 자행되었던 이유도 광주였기 때문이다.14) 그래서 5.18민주화운동을 지속적으로-일상적으로- 의식하는 것도 광주일 수밖에 없다. 다소 냉정하게 말해서 다른 지역이 그러기에는 어렵다. 특히 모든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운동으로 불리면서 상대화되어 더욱 그렇다. 서울도 인천도 부산도 마산도 또 여타 다른 도시들도 모두 민주화운동의 장소들이다. 다들 자기지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과 기념을 우선한다. 이 모든 곳의 민주화운동을 연 모체인 광주는 특별하다. 그것을 드러내주는 것이 일단은 광주라는 이름이다. 그래서 5.18민주화운동의 의미를 확장.심화시키는 것은 일단 광주의 책임이다. 필자는 이 책임을 광주가 매우 치열하게 수행해왔다고 생각한다. 5.18민주화운동의 전국화와 세계화도 광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5.18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자. 5.18이라는 이름은 상대적이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의 민주화운동과 차별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5.18은 광주와 만날 때 5.17계엄확대 이후 다른 지역과 달리 홀로 투쟁해야 했던 비극적 항쟁으로서의 의미가 살아난다.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성은 중요한 교훈을 제공하는 지점이다. 독재 권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가 공동체 차원에서 지역 간 연대가 필수적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또 시간성과 관련해서도 5.18이라는 특정 날짜를 명칭화한 것은 다소 제한적이다. 5.18에는 1980년과 광주의 의미를 담겨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로 그렇다. 특히 문제는 민중성과 공동체성을 좀 더 부각시키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민중성과 공동체성의 발현은 5.18 이후의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5.18은 워낙 광범위하고 강하게 자리 잡은 상징적 숫자-기표이긴 하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사건의 시작과 과정과 결말을 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변경을 모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각에서 제기한 바와 같이 '5월 (항쟁)'식으로 하는 건 어떤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15)

종합해보자면, 필자가 제안하는 새로운 명칭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혹은 '광주 5월항쟁'이 된다. 5.18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되기 이전에는 물론, 지금도 이미 그리 불리고 있기도 하다. 특히 5.18민주화운동을 논의의 주제로 삼는 경우가 그렇다. 5.18민주화운동을 과거의 것으로 화석화하지 않고 그 생생함과 교훈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강조하려는 이들이다.

하지만 명칭의 변경 그 자체로 변경의 취지가 충족되는 건 아니다. 이미 강조했듯이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정치적 결정이었다. 변경 과정과 그 결정 여부도 그럴 수밖에 없다. 설사 변경이 되었다 해도 취지에 부합하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공화라는 이념적 가치와 원리에 기초해 민중성과 공동체성을 부각시키며 미래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해야 한다. 또 민중성과 공동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헌법전문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명칭을 포함해 한 줄도 안 되는 문구로 표현된다. 그래서 더욱 더 실제 구현을 위한 행동을 요구한다. 간단하게는 헌법전문 해설 문건도 만들어 배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일상적 정치활동 과정에서 수행해 갈 정책의 도입과 실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제가 현재의 정치구조에서 과연 가능할지 검토해봐야 한다. 아니라면, 새로운 정치구조를 조성하는 방도가 무엇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 각주
1)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정치학
2) 이와 관련해서는 최영태, 2015. "5.18항쟁의 명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제15권 3호. 113-148 참조.
3) 미래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의식에서 5.18민주화운동에 접근한 논의로는 이영재. 2022. "미래 민주주의의 정신적 자원과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공동학술대회 자료집 『미래의 민주주의와 대학의 글로벌 시민교육』 (2022.10.21) 참조. 이영재는 미래민주주의를 위한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자원으로서 절대공동체(성)와 그것을 가능케 한 사회적 감성의 체험을 강조하며 '공감장' 개념에 주목한다.
4) 콜린 크라우치. 2008. 『포스트 민주주의: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미지북스.
5) 이에 대해서는 손호철. 1995. "80년 5.18항쟁:민중항쟁인가, 시민항쟁인가?"; "세계 민주화운동과 5.18민중항쟁."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새길. 156-206 참조.
6) 최영태. 앞의 글 참조.
7) 이하는 김윤철. 2021.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사회적 부정 및 왜곡의 지속구조." 『감성연구』제22권. 269-305 중 일부 논의를 수정.발췌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해당 논문의 페이지와 본문 중에 명기된 참고문헌 등의 출처는 본 발표문에서는 별도 명기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8) 이것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치.사회적 공인의 한 단면이기도 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태도 자체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정과 왜곡을 정당 차원에서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구속 요인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5.18특별법 제8조의 신설과 적용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러한 태도는 아직도 대체로 외양과 형식에 머물고 있다. 5.18특별법 8조의 문제, 특히 실행 효과의 미약함에 대해서는 임지봉. 2022. "5.18특별법 제8조 신설 이후의 현황과 대응 방안."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5.18민주유공자유족회.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5.18기념재단 국회토론 자료집 『5.18역사왜곡 현황분석과 대책』(2022.11.23.) 참조.
9) 변혁운동세력 출신들이 기성 정당(정치)에 진출한 것은 이미 체제친화성을 전제로 한 것이고, 그리 결심한 것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민주-반민주 균열이 해소되었다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지역성(장소성)에 기초해 그것을 재동원한다. 민중성과 변혁성에 기초해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지 못해서(열지 않기), 또 장소성의 의미를 재구성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10) 다행인 것은 이와 같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오용 혹은 악용이 시민사회 전반에 걸친 일상적 인식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유튜브와 SNS 등 뉴미디어를 통해 몰역사적인 부정과 왜곡이 끊이지 않고 행해지면서 향후 5.18민주화운동의 미래 가치에 대한 포착과 조명 기회의 상실은 물론, 과거의 사실성마저 훼손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1) 이와 관련해서는 김영택. 2004.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 문 참조.
12) 이에 대해서는 손호철 앞의 책 참조.
13) 이 점에서 필자는 최영태 교수(앞의 글)의 논지에 동의한다.
14) 이에 대해서는 손호철 앞의 책 참조.
15) 이에 대해서는 최영태 앞의 글 참조.

□ 참고문헌
- 김영택, 『5.18 광주민중항쟁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 김윤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치.사회적 부정 및 왜곡의 지속구조", 『감성연구』제22권, 2021.
- 손호철, "80년 5.18항쟁:민중항쟁인가, 시민항쟁인가?"; "세계 민주화운동과 5.18민중항쟁", 『해방 50년의 한국정치』, 새길, 1995.
- 이영재, "미래 민주주의의 정신적 자원과 5.18민주화운동", 5.18기념재단.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공동학술대회 자료집 『미래의 민주주의와 대학의 글로벌 시민교육』, 2022.
- 임지봉, "5.18특별법 제8조 신설 이후의 현황과 대응 방안",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5.18민주유공자유족회.5.18민주화운동공로자회.5.18기념재단 국회토론 자료집 『5.18역사왜곡 현황분석과 대책』, 2022.
- 최영태, "5.18항쟁의 명칭문제", 『민주주의와 인권』 제15권 3호, 113-148, 2015.
- 콜린 크라우치, 『포스트 민주주의:민주주의 시대의 종말』, 미지북스, 2008.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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