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세요" - 이레샤 톡투미 대표

윤춘호(논설위원) 2022. 12. 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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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눈의 기억>

겨울에 한국에 왔고 그때 난생처음으로 눈을 봤다. 상하의 나라 스리랑카 출신이니 한국 겨울 추위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단다. 오히려 한국의 차가운 겨울이 좋았다고 했다.

"제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이 12월이었는데 그때 첫눈이 무릎까지 왔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되게 신기했어요. 제가 조금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여름보다는 겨울 되게 좋아해서 저한테 또 오히려 더 좋았던 것 같은데요… 제가 지금은 이제 한국 아줌마가 돼서 눈이 오면 귀찮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처음에는 만져 보기도 하고 눈이 어떤 맛인가 먹어 보기도 했어요. 그때 첫눈 오던 날 하루 종일 놀았던 기억이 있어요."

처음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 외국 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서울에 장기 출장을 왔고 그때 남편을 만났다. 2002년 월셋집 집주인 아들이었던 남편과 결혼을 했고 1남 1녀를 두었다. 2009년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한국 사람이 되었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살겠다고 했을 때 스리랑카 부모님은 반대했다. 그 당시 이 사람 월급이 170만 원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돈을 주는 직장을 포기해야 했다.

1975년생,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동네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했고 욕심도 많았다. 딸만 넷인 집안의 둘째 딸이었다. 아버지는 타이어를 만드는 공장에 38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침에 말끔하던 아버지 공장 유니폼은 저녁이면 분진으로 까매지곤 했다. 공장 소음으로 인한 직업병으로 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린다. 그런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는 딸이고 싶었다. 외국에 가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번다는 언니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고 자기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게 고향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는데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단다.

스무 살 때 부모님 모르게 여권을 만들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스리랑카 여성이 해외로 나가 돈을 버는 것이 그렇게 드물지 않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을 계속했고 의류 제조 회사에 취업도 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공공연한 곳에서 외국인으로 공부하고 돈 벌고 취업까지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절 이야기를 그리 상세하게 말한 적은 없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다섯 개 나라를 출장으로 돌아다녔는데 그중에 한 곳이 한국이었다.

교육기관에서 체계적으로 한국말을 배운 것은 아니다. 한글은 거리 간판을 읽는 것으로 익혔다. 지금도 거리 간판을 읽는 것이 습관이라고 했다. 대화 중에 모르는 말이 나오면 꼭 기억했다가 집에 가서 몇 번씩 쓰고 읽었다. 우리말을 두려움 없이 구사하고 전화 통화만 하면 자신을 한국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지만 발음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어색한 표현도 적지 않다. 아직도 뉴스를 볼 때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고 긴 글은 읽기 어렵다.

2. <먼저 다가서고 먼저 문을 두드리다>

결혼해서 곧바로 아이가 생겼고 그다음 해인 2003년 아들을 낳았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더 없는 축복이었지만 곧바로 냉정한 현실과 마주해야 했다. 한국 문화와 언어가 서툴고 피부색마저 다른 이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을 보고 흠칫 놀라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차별과 편견을 느꼈다.

내가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지 않고 집안 말고는 이 사회에서 내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닮아 피부색이 짙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숨지 말고 뭔가를 하자고 생각하였다.

"우리 큰애가 피부색이 저랑 거의 똑같거든요. 아이 데리고 밖에 나가지 말라 뭐 이런 이야기들이 많았고 실제 바깥으로 나가면 아이한테 상처가 되는 말들도 많이 들었어요. 아이도 그런 것을 알고 제 뒤로 숨기도 하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스스로 이제 뭔가 해야 된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겪은 차별과 고통을 아이에게 물려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말이 아직 서툴렀지만 그 때부터 스스로 복지관 등을 찾아가서 다문화와 결혼 이주 여성에 대해 말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이런 경험이 있고, 이런 것을 말할 수 있고, 이런 것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처음부터 문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말도 서툴고 그렇다고 결혼 이주 여성이 많은 나라 출신도 아닌 이 사람에게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며 문을 열어준 것은 아니었다.

"전화를 하면 '오세요, 봉사할 수 있어요'라고 하지만 막상 가보면 '외국 분 안 받아요' 이럴 때가 많았어요. 그래도 계속 두드렸죠. 두드리다 보니 이제 어쨌든 열리더라고요. 스스로 외국인이니까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함께 많이 요청해야 되는 것 같고 그래야 조금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한 번 문이 열리고 나니 다른 문도 열리기 시작했다. 2005년 EBS를 시작으로 KBS, 평화방송 등에 출연했다. 비교적 능숙한 한국어 솜씨와 유쾌한 입담을 자랑하면서 각종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로 자리 잡았고 대표적인 결혼 이주 여성으로 알려졌다. 강연과 방송을 하면서 한국말이 더 능숙해졌다.

3. <톡투미-내게 말을 걸어주세요>

2010년 비슷한 처지의 결혼 이주 여성들과 함께 톡투미(Talk to me)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처음 시작할 때 10명의 회원으로 출범한 이 단체는 지금은 서울 150명, 경기도 2백 명을 비롯해 전국에 회원이 5백여 명, 자원 봉사자 6천 명이 넘는 단체로 성장했다.

내게 말을 걸어 달라는 '톡투미'는 이 말은 이주 여성들의 희망이 담긴 말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먼저 한반도의 선주민들에게 말을 걸어 보자는 뜻도 있다. 한국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었다는 이 사람 경험이 녹아 있는 말이기도 하다.

"결혼 이민자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남편 하나 말고는 자기 자리가 없더라고요 그냥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거 따라하는 수동적인 존재밖에 안 되더라고요. 근데 KBS <러브 인 아시아> 등에서 많은 그런 가족 만나다 보니 저랑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저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가만히 있지 말자,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자고 제안했어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톡투미입니다"

처음에는 한국 반찬 만드는 이야기, 남편과 시댁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아무리 가르쳐줘도 이주민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있는 법이다. 그런 대화를 통해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모인 김에 아이들 과자값이라도 버는 일을 같이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모니카' 인형이었다. 결혼 이주 여성들이 다양한 표정과 생김새, 피부색 등을 가진 인형을 만들었고 그 인형의 이름을 모니카라고 지었다. 모니카는 일반적인 외국 여성 이름이기도 하지만 '머니까', 멀리서 온 사람들이란 의미도 담고 있었다.


"그때 모니카를 시작했던 이유는 모니카를 통해 피부색, 생김새, 인종에 대한 편견을 허물고 싶었어요. 이제 제 피부색이 어두운데 제가 그로 인한 편견을 많이 경험했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통, 대화하는 것 되게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이야기만으로는 사람들 기억 속에 오래 남지 않더라구요. 인형 같은 도구를 통해 설명하면 잘 이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차별 문제를 '모니카'를 통해서 이야기하자고 생각하고 시작한 겁니다."

2012년 처음 나온 모니카 인형은 지금까지 1만 개 이상 만들어져 이 모임의 대표적인 사업이 되었다. 모두 수제품으로 만들어져 하나도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이 없어 인기가 높다. 팔기도 하지만 교육기관, 복지 시설, 소외계층 아동들에게 기부도 한다.

톡투미 사업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고향 음식을 만들어서 팔아 보자는 아이디어는 다밥(다 함께 밥 먹자) 사업으로 이어졌다. 다양한 나라의 고유 음식을 밀키트로 제작해 팔고 도시락으로 만들기도 했다.

서울시 등이 주관하는 '서울 밤도깨비 야시장' 행사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자고 들면 할 수 있는 일은 많았고 그렇게 하겠다고 나서면 도와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일의 맨 앞자리에 결혼 이주 여성의 왕언니, 호랑이 언니라고 불리는 이 사람이 있었다. 그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고 그 일에서 보람을 찾았고 돈을 벌었다.

"나 한국말 못 해서, 나 외국 사람이니까 나 안 받아들여 줄 거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결혼 이민자가 많아요.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외국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부터 버리는 역할을 여기서 해줄 수 있는 거거든요. 이주 여성들도 자신감 가지면 얼마든지 도움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톡투미 회원들은 고향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자라온 문화나 성장 배경도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출신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혹시 이런 점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한국의 아내를 봐도 부산에서 온 사람도 있고 태국에서 온 사람도 있고 제주도에서 온 사람 다 다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저는 이제 출신 나라가 어쨌든 이미 태어난 곳이 아니라 현재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어요. 또 이제 그렇게 하다 보니 정말 조금씩 변화가 됐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가 다 한국말 하네요' 하면서 웃어요"

톡투미는 2013년 법인 등록을 했고 다밥은 2016년 협동조합으로 모양을 갖췄다. 돈을 벌고 있으니 세금을 내야 한다. 세금과 법률 이야기를 꺼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힘들어요. 힘들어요. 물어보지 마세요. 어떤 사람들 이렇게 말해요. 톡투미 생긴 지 10년 됐는데 이거밖에 안 돼요? 그 질문에 많은 것이 담겨 있는 거 알아요. 우리끼리 소통 문제, 말과 글의 장애, 사회적 기업 설립 같은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우리가 성공한 것으로 봐야 되는데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세금, 법은 정말 어려워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들이 많아요. 사회적 협동조합 만들고부터는 왠지 모르겠지만 세금만 나가요. 들어오는 것은 없어요. 세금 문제는 다른 분들에게 도움도 받고 배우기도 하고 세부적인 것은 비용 조금 쓰면서 하고 있어요"

인터뷰를 위해 만난 톡투미 사무실은 서울 남영역 근처 건물 4층에 자리잡고 있었다. 보증금 1천 5백 만원에 월세 1백 10만원, 30평 남짓했는데 사무실이라기보다 작업장에 가까웠다. 모니카 인형 재료, 밀키트와 도시락을 만들기 위한 재료와 장비들이 널려져 있었다. 작업대 위에는 재봉틀과 함께 천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한 기업체가 주문한 '행복 나무'라는 이름의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고 있다고 했다.

"저런 것들을 주문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까?"
"그렇죠. 가족도 많이 주문하기도 하고 또 크리스마스 다가오니까 학교나 이런 데서도 주문이 옵니다. 이번에는 한 기업에서 50개 주문이 들어와서 내일까지 줘야돼서 열심히 바느질하고 있어요."

올해 모니카 인형 사업으로 2억 원, 다밥 사업으로 2억 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적지 않은 매출이고 이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얻은 이주 여성들이 2백여 명이지만 코로나19 영향으로 생각만큼 사업이 잘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4. <아이들에게 엄마의 나라 보여줄 때 뿌듯해요>

다양한 톡투미 사업 가운데 이 사람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일은 <이모나라 나눔여행> 기획이다. 이주 여성들이 가이드로 참여해 자신의 고국을 안내하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2012년부터 여행단을 조직해서 스리랑카는 여덟 번, 베트남은 다섯 번 다녀왔다. 여행단에는 톡투미 회원들도 참여했다. 자기 고국만이 아니라 톡투미 회원들 서로의 국가도 교차 방문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결혼 이주 여성들에게 본국 커뮤니티도 중요한 참조 체계거든요. 여기에서 잘 적응하고 모범적인 이주민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국과 다른 이주 여성들이 온 다른 나라도 방문하면서 계속 연결을 만들어내는 초국적 행위자로서 역할을 하는 거죠. 이런 인식과 활동을 다른 이주단체들은 많이 못 보여줬는데 톡투미는 그런 활동에도 열심이었죠"

김현미/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일반 여행사 가격보다 비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그 나라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주 여성들이 안내를 맡아서 여행하는 프로그램은 꽤 만족도가 높았던 모양이다. 이 프로그램에 6번이나 참가한 사람도 있다. 여행을 하는 한국인 고객들도 만족했지만 안내를 맡은 이주 여성들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사업이었다.

"아이들이랑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함께 가면 친정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이제 아이들한테 내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직접 엄마의 나라를 보여줄 수도 있고. 제 결혼을 반대했던 친정 부모님도 그런 제 모습을 보고 마음에 안정감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너희들 뿌리의 절반은 인도양의 유서 깊고 아름다운 섬나라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이들은 스리랑카 말을 할 줄 안다. 아이들을 데리고 일 년에 한 번 스리랑카를 다녀왔다. 비행기표를 마련하기 위해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들 한 명 당 한 달에 5만 원씩 모은다.

"아드님과 따님이 스리랑카 말을 합니까?"
"할 수 있어요. 스리랑카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리면 아이들이 신기하게 스리랑카 사람이 되더라고요. 아이들이 '코로나 때문에 못 가게 되니까 되게 이상하다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도 하고. 그래서 저는 그게 되게 뿌듯해요."

스리랑카 돕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2004년 쓰나미로 파손된 고향 학교를 지원해서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사람 덕에 2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지원 사업을 중단한 상태다.
 

5. <우리 사회 소수 중의 소수>

결혼 이주 여성이니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혼 이주 여성 중에서도 스리랑카 출신은 베트남 출신이나 중국 태국 등에 비하면 소수다. 피부색이 진해서 그런 면에서도 소수라면 소수다. 결론 이주 여성이든 취업 이주 노동자이든 스리랑카 출신은 그 숫자가 많지 않다는 이유로 '기타'로 표시되기 일쑤였다.

"관공서 기준으로 보면 이레샤 대표님 고향이 스리랑카가 아니라 '기타'군요."
"저만 아니라 이주자 수가 작은 나라들은 '기타'로 모여 있는 거예요. 이런 것도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한글을 배우고 싶어서 해당 부서에 전화를 했어요. 그랬는데 스리랑카는 '기타'니까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베트남이나, 태국 같은 나라만 해당된다고 나와요. 그래서 그런 거 저는 도움을 받은 게 거의 없어요."

이 사람에게 '우리나라'는 너무도 당연히 한국이지만 자신을 여전히 다른 나라 사람으로 보는 시선을 수시로 느낀다

"사람들이 저한테 물어봐요 '우리나라라고 말하는 게 스리랑카예요, 한국인가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죠. 우리나라는 한국이죠. 어쨌든 내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엄마가 되었잖아요. 한국이 우리나라죠. 오늘도 새벽 4시에 축구 봤어요. 아이들이 같이 축구 보자고 문 두드렸더라고요. 축구 보자고 그래서 같이 봤고요. 브라질에 져서 조금 아쉬웠어요."
*<이 인터뷰는 월드컵 브라질 전이 열린 12월 6일 진행됐다>

앞으로도 여기에서 살고 죽어서도 이 땅에 묻힐 테지만 외양 때문에 온전히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몇 년 전 스리랑카에 갔다가 비자 기간이 지나 벌금을 물고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 왔는데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외국인은 저쪽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슬프고 화가 났다. 그날 이후 공항에서는 여권을 케이스에서 빼내 보란 듯 들고 다닌다. 그렇지만 가끔 자신이 한국인인지 스리랑카인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고 했다.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남편이 지난 2018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남편 사후 유산을 정리하다 보니 남긴 재산보다 빚이 더 많았고 그 때문에 상속을 포기했다. 아들과 딸만이 이 사람에게 남겨졌다. 2016년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아들이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17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고 3년이 넘는 긴 치료 기간을 거쳤다.

주 수입원인 톡투미 사업과 강연은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고 방송도 쉬고 있는 상태다. 한 달 수입은 톡투미에서 받는 돈 1백 80만 원 정도, 최저 임금 수준이다. 남편이 남겨 놓은 재산은 한 푼도 없고 아들은 대학교 1학년, 딸은 고1, 돈이 많이 들어갈 나이다. 상속을 포기했으니 자기 집도 없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이 들어 올 초 밤 12시부터 아침 9시까지 심야 작업을 하는 공장에 다닌 적도 있다. 공장 생활은 오래 하지 못했다.

"공장에 다닌다는 것은 몸이 힘들기도 했지만 돈 버는 것 말고 그 이상의 다른 의미가 없잖아요. 또 대화를 할 때 시끄러워서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막 욕하고 그러는 것도 좋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있는 곳에서 두 배로 노력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서 그만뒀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뭐가 제일 어려워요? 아이 키우는 거 어렵지 않아요? 가난해서 돈 벌러 왔어요? 그렇게 쉽게 던지는 질문들이 당사자들에게는 때로는 큰 상처가 되고 자존심에 생채기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지간한 질문은 이제 웃음으로 넘기고 적당히 받아 치는 여유도 생겼지만 여전히 가슴 한 복판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때도 적지 않다. 내가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겠다는 마음 같은 것은 없을까. 그 질문은 차마 하지 못했다.

한국 남성과 결혼해서 한국에서 사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았다면, 그로 인해 자신이 한 사회에서 소수자 중에 소수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에 따른 고통과 어려움이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같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다시 22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시점이 되면 똑같은 선택을 하실까요. 아니면 다른 선택을 하고 싶으세요."
"이렇게 힘든 선택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고향에서 멀리 있는 것 힘든 일이잖아요. 우리 아들이 사고 났을 때나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나, 갑작스럽게 내가 너무 몸이 아파서 누워 있을 때는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되게 후회가 굉장히 많이 생겼어요. 아들이 다쳐서 17시간 수술받을 때 딸과 둘이서 수술실 앞에 앉아 있을 때 너무 힘들었고 3년 동안 간병할 때도 힘들었어요. 시어머니는 나이 많고 몸이 불편해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고 둘째는 학교 보내야 되고 남편은 자기 할 일이 많아 도와줄 상황이 못 됐어요. 스리랑카에 있는 언니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내가 한국 국적 가지고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도 내 가족 초청하는 게 너무 복잡하더라고요. 만약에 내가 내 고향에 있었다면 그런 불편이 없잖아요. 남편 세상 떠났을 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소수자로서 갖추어야 될 조건은 다 갖춘 셈인데 전혀 위축되거나 꿀리는 표정이 아니었다. 영특하게 보이는 이 사람 눈에서 때로는 당당함을 넘어 야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슬픈 이야기를 할 때도 표정은 밝았다. 남편이 갑자기 타계하고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경황이 없던 시절을 말할 때도 얼굴이 어둡지 않았다. 어떤 때는 수다스러운 아줌마 같고 어떤 때는 치밀한 사업가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시간 내내 유쾌함을 잃지 않았다.

타고 난 천성이 극히 밝고 낙천적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온전히 표현하는 일이 이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다 털어놓는 게 언어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이주민으로 느끼는 보이지 않는 제약과 억압 같은 것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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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호(논설위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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