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에게 꼭 물려주고픈 ‘달리는 기쁨’ [ESC]
울트라마라톤 같던 산통 끝 출산
아빠로서 어떤 좋은 것 물려줄까
언제쯤 함께 달리기 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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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조금만 힘주세요. 하나-둘-셋-후우-, 하나-둘-셋, 후우-.”
11월 22일 새벽부터 낮은 진폭으로 시작된 배우자의 진통이 스무 시간 넘게 이어졌다. 아주 미약하게 반복되는 통증에서 시작해 점점 더 규칙적으로 잦아진 진통이 본격적으로 밀려온 건 밤 아홉 시가 다 되어서였다. ‘자연 출산’을 하기로 결정한 탓에, 병원과 연계한 조산원에서 산모, 산부, 조산사, 둘라 선생님 이렇게 네 사람이 한 방에 모여 산모와 함께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용을 쓰기까지 했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 단거리 달리기처럼 끝날 줄 알았던 출산은 장거리 달리기, 마라톤, 아니 그보다 더한 울트라마라톤 같았다.
그런데, 출산 직전의 순간은 울트라마라톤 그 이상이었다.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선 진통에 지쳐 체력이 바닥을 찍고 있는 출산 직전의 주자(산모)가 100m 달리기를 능가하는 폭발적 힘을 짜냈어야 하기 때문이다. 힘이 빠진 산모 대신 산부, 조산사, 둘라 세 사람이 호흡과 용쓰기를 함께 해줄 수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치 줄다리기를 할 때처럼, 하나-둘-셋-후우, 하나-둘-셋-후우, 하나-둘-셋-후우. 그리고 마지막 호흡은 산모가 배턴을 이어받아 하나-둘-셋-후우, 하나-둘-셋!
2022년 11월 23일 오전 1시 56분. 그렇게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빼액 울음을 터트렸고, 조산사 선생님의 손에서 내 손으로, 산모의 품으로 이동하는 동안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선 알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한 번 씨익 웃었다. 예상보다 진통이 길었던 탓에, 심지어 잠깐이지만 달리기를 할 시간도 있었다. ‘자연 출산’을 하는 산모는 진통이 올 때 진통제나 출산 촉진제 투약 대신 다양한 방법으로 통증을 완화하고 출산 시점을 앞당기는데, 그중 하나로 산파 격인 둘라 선생님과 함께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방법이 있다. 덕분에, 조산원 건물 실내 계단에서 이완 중인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볍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달리기를 할 수 있었던 것.
아이에게 물려주고픈 것
출산이라는 울트라마라톤을 마친 산모, 갓 태어난 아기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일주일 가량 조산원에 머물렀다. 산모가 체력을 회복하는 사이 신생아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는데, 1~2시간에 한 번 모유 수유를 해야 하는 산모와 달리 산부는 간단히 외출할 수 있어 달리기를 이어가는 일도 가능했다. 낯선 동네를 가만히 달리면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내가 물려줄 수 있는 게 무엇일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검색엔진에 ‘신생아 상속’을 검색하니 ‘신생아에게 2000만원을 주고 시작하자’는 다소 자극적인 (그러나 실용적인 동시에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한) 절세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아이에게 물려줄’을 검색하니, 요즘의 분위기에 맞춰 자존감과 주식을 물려주라는 결과가 출력되었다.
출생 신고를 하고서 곧장 아이 이름의 증권 계좌를 개설해 (한 주에 1만원쯤 하는) 시장지수를 추종 ETF를 조금씩 사주고는 싶지만, 조산원에서 보낸 며칠간의 결론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 무엇보다 달리기의 기쁨을 물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달리기의 기쁨만이 아니라 몸을 쓰는 기쁨, 작게나마 한계에 도전하는 기쁨, 꾸준함의 기쁨을 물려주고 싶다. 학교나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몸을 움직이기보다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데만 빠져 있던 나와는 다르게, 수업을 통해 뒤늦게 접한 ‘체육’이 즐거운 기억보다는 남들에게 맞춰야 하는 ‘단체 활동’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나와 다르게, 즐거운 기억을 물려주고 싶다.
물론, 내 유전자의 일부를 소스코드 삼아 어머니의 몸 안에서 자라난 아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완벽한 타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막 태어난 아이가 어린 시절의 나처럼 몸을 움직이는 일보다는 활자의 세계 같은 것에 푹 빠지게 된다 한들 억지로 몸을 움직이라고 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과 다른 변수가 한 가지 있다. 온통 책더미였던 집을 나가면 자동차에 실려 다니기 바빴던 내 어린 시절과 달리, 갓 태어난 내 아이는 책더미 쌓인 집에서는 살지만 자가용 하나 없이 요가, 명상, 달리기, 등산, 바다 수영을 즐기는 양육자들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아빠가 해변을 달리는 동안 엄마와 바다 수영을 하거나, 아빠와 트레일 러닝을 하고서 산 중턱에서 함께 책을 읽는 아이로 자라게 되지는 않을까?
조산원에서 산모,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내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기쁨에 대해 생각하며 매일 달리기를 이어갔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문득 ‘유모차 달리기’를 검색해보았다. 칼럼을 통해 특정 브랜드를 부각하고 싶진 않지만, 한국어 인터넷에서는 사실상 단 하나의 브랜드만이 ‘조깅 유모차’를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품 설명란에 ‘활동적인 부모님용’임을 강조하는 이 유모차는 일반적인 유모차보다 바퀴가 두 배 가량 크고, 비교적 빠른 이동에 속하는 조깅 중 아이를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는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아이에게 물려주고픈 것
물론, 이 유모차만 산다고 해서 아이를 태우고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생아에게는 목과 머리를 가눌 수 있는 근육이 충분치 않기에, 적어도 6개월에서 8개월 이상 자란 뒤에야 조깅 유모차에 실려 양육자의 달리기에 함께할 수 있다. 유모차를 벗어난 뒤에도 어른들이 생각하는 형태의 ‘달리기’를 지속하고 반복하기까지는 다시 한 번 기다림이 필요하다. 아동발달이론에 따르면 단순한 육체 활동이 아닌 ‘운동’은 아이가 스스로의 몸을 좀 더 잘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다섯 살 이후에 시작하는 게 적절하다. 아이에게 달리기의 기쁨을 물려주고 싶은 양육자로서, 그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과 같이 기쁜 마음으로 매일의 달리기를 이어가는 것 뿐일 테다.
박재용 프리랜스 통번역가·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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