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다는 건 ‘퇴고’하는 것…어쩌면 사는 일도 그렇지
퀴어들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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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推敲)라는 말의 어원이 ‘밀고 두드린다’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잠깐 감격했다. 그 단어가 유래되었다는 시인 가도와 한유가 만나 나누었던 대화의 내밀함은 이미 머릿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머뭇거림만 남았다. 어떤 용기있는 걸음보다 더 귀하게 느껴지는 그 머뭇거림.
밀거나 두드려 어떻게든 더 나은 문장에 다가가보겠다는 간절함만이 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쓴’ 마음을 밀고 두드렸다. 쓰는 일이란 곧 퇴고의 일, 어쩌면 사는 일도 그런 일. 철없는 문청이었던 나는 그때 제대로 밀고 두드릴 줄 몰랐고, 성급했고, 그래서 그 단어의 함의가 반가웠지만, 아직까지도 그런 서툰 날들을 퇴고하느라 계속 쓰는 중인지 모른다.
글로, 각자 밀고 두드리는 삶
지난 초여름, 부산의 한 퀴어 단체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글쓰기라면 나 역시 내 몫의 등반을 계속하는 중이라 자신 없지만, 그래도 퀴어 청년들을 만날 기회라니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10회차 수업으로 책 한권 분량을 만들려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해보자고 말했다. 움츠러들거나 위축되었던 그 마음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는 서로였기 때문일까? 해보자는 마음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되었다.
워크숍 첫날, 내가 한 부탁은 명확했다. 기록에 남겨야 할 자신들의 글감을 열가지 층위로 나눈다면, 아홉이나 열의 깊이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적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일곱이나 여덟 정도의 깊이라면 충분하다고 했다. 아홉까지 내려간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그럴 수 없더라도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글이란 적을 수 있는 때와 그럴 수 없는 때가 따로 있으니, 언젠가 쓰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만으로 지금은 충분하다고 했다. 지금 쓸 수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은, 먼 훗날의 쓰기를 위한 보이지 않는 첫 페이지인지도 모른다고.
과제로 제출해준 글들은 너무도 빛이 났다. 글쓰기 워크숍 참여자들의 글은 자칫 비슷해지기 쉬운데, 여섯뿐인 참석자들의 작품은 서로 다른 생생한 문장들로 가득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오십대 중반의 참여자는 육십대인 게이 파트너와 같이 오른 제주도 오름 등반기를 적었다. 노년에 접어든 게이 부부라니 품은 이야기들이 많고 많을 것 같았는데, 왜 하필 제주도 오름 등반기인지 묻지는 않았다. 나이를 먹는다고 꼭 묵직한 글만 적을 필요 없는 일. 그의 작품은 생기발랄하고 유머러스한 문장들로 가득했다. 다섯편으로 나뉜 게이 부부의 등반기를 같이 읽으며 우린 수업 중에 여러번 큰 소리로 웃곤 했다.
자신의 퀴어성을 한가지로 정체화하지 않은 또 다른 이십대 참여자는 물류센터에서 강도 높은 일을 하며 얻은 ‘허리 병’ 이야기부터 적었다. 단순히 질환을 소재로 가져왔지만, 지정 성별 여성인 그가 물류센터에서 겪은 일들의 기록은 오히려 이십대 퀴어 청년이 겪을 수 있는 생생한 질감의 문장들이었다. 신뢰 관계가 쌓인 동료를 믿고 속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레즈비언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아우팅을 당하고, 산재 처리를 해주지 않으려는 사측과 혼자서 맞닥뜨려야 했던 싸움은, 다층적으로 고립된 이십대 퀴어 청년의 현실을 날것으로 보여주었다.
현직 공무원으로 근무 중인 또 다른 한분은, 어쨌거나 여성으로 표기되며 마주해야 하는 ‘공적인 생활’의 경직성과 차별적인 일상들을 기록해주었고, 예술적인 배움을 수행 중인 또 다른 퀴어 여성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몸에 관한 이야기를 아름답고 솔직한 문장들로 풀어냈다. 뒤늦게 워크숍에 참여한 한 사람은 글이란 걸 한번도 써본 적이 없다고 걱정했는데, 워크숍 말미에 그가 적어 완성한 글은 여성으로서의 삶, 가난과 착취 속에서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삶, 그럼에도 다시 꿈을 꾸는 삶에 관해 담담하게 적어주었다. 꾸밈없이 솔직한 문장이어서, 더 큰 울림이었던 소중한 기록이었다.
각자 다섯편의 글을 적기로 한 워크숍의 마지막 주제는 내가 제안했다. 마지막 글은 ‘판타지’였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모두 난감해하는 눈빛이었다. 현실로부터 삭제되거나 실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을 한번 자유롭게 풀어보자고 했을 때, 그 꿈을 기록해보자고 했을 때, 테이블을 둘러앉았던 모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잠깐 머뭇거렸다. 서로 다른 표정이었지만 나는 잠깐의 침묵 속에 스쳐간 다종의 꿈들을 목격한 것만 같았다. 현실의 압박감이 얼마나 큰지 모두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것처럼 어리둥절해 있을 때, 나는 좀 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는 빼앗긴 우리의 오늘과 싸우느라 어쩌면 미래마저 놓치고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경계도 필요 없고 한계도 없는 것이 당연한 온통 가능성뿐인 미래를, 우리 역시 ‘소수’나 ‘소외’라는 범위 안에서만 해석했던 건지도 모른다고. 여기 이 사회의 무수한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가두더라도 우리 스스로는 가둘 필요 없는 일이라고, 한번 해보자고 했다.
각자의 지난날들을 퇴고한 한권의 책은 그렇게 푸른빛으로 묶였다. 기어이 작은 책 한권으로 완성된 결과물을 들고 모두는 행복해했다. 반복된 퇴고의 끝은 ‘축제’인 걸까? 그날은 작은 카페 안의, 아주 큰 마음들의 축제였다.
‘사람’을 쓰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올해 나는 삼십대에 발표했던 소설 두편을 다시 썼다. 내 마음이 중요해,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만 중요해, 나는 스스로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줄도 모르고 이기적인 문장들을 늘어놓았다. 십년이 다 된 장편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고, 한 문장 한 문장 수정하여 보내며, 나는 담당자에게 긴 사과의 말을 전했다. 여전히 부족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하다고 적으며 참 많이 부끄러웠다. ‘사람’을 쓰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사람이기에 감히 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그날도 내가 적은 문장들을 곱씹으며 다시 적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러번 되뇌었다. 아직까지도, 밀고 두드릴 수 있는 나여서 다행이었다.
기시감처럼 무언가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은 때가 다시 돌아왔다. 올해 우리 사회가 적은 원고는 너무도 부끄럽고 묵직해 당장에 퇴고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적었던 부끄러움이, 더 나은 내일의 기록들을 위한 것이기를. 두드리고, 다시 또 두드려,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려 언젠가 밀어 열리는 서로를 만나게 되기를.
50대에 접어들어 성전환자의 눈으로 본 세상, 성소수자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풍경을 그려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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