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그들은 왜 쿠데타를 꿈꿨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있는 연방의사당.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의 심장부다. 그런데, 특수부대 출신의 극우단체 조직원들이 총과 폭탄, 칼 등으로 무장하고 이곳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목표는 올라프 숄츠 총리.
지금 존재하는 독일연방공화국을 부정하는 쿠데타 모의세력은 숄츠 총리를 처형하고, 왕이 다스리는 새로운 국가를 선포할 계획이었다. 이들이 왕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던 인물은 올해 71세인 옛 귀족 하인리히 13세. 하인리히 13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제국의 시민들(Reichsbürger)'이라는 극우단체 소속이다.
독일 연방 보안당국과 경찰은 12월 7일 일제검거 작전을 벌여 하인리히 13세와 20여 명의 '제국의 시민들' 조직원을 체포하고 베를린을 비롯한 전국 100여 개 이상의 지점에서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전현직 특수부대원과 경찰이 쿠데타 모의세력의 주축인 만큼, 총과 폭탄, 나이트비전 고글, 전투용 헬멧, 석궁, 각종 도검류, 그 외 다양한 군사장비, 통신장비가 압수됐다.
이들의 주 아지트인 하인리히 13세의 성채에서는 10만 유로 이상의 현금과 금괴, 은괴, 그리고 '제국의 시민들'의 적으로 간주되는 정치인과 언론인 18명의 명단도 나왔다. 올라프 숄츠 총리(Olaf Scholz)와 아날레나 베어복(Annalena Baerbock) 외무장관도 그 명단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명단에 적힌 인물들을 이들이 어떻게 하려 했는지 아직 구체적인 수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숄츠 연방총리를 처형하려 했다는 걸 감안하면 비슷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압수된 무기의 수량 역시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지난해 적발된 다른 극우단체 '북쪽의 십자가(Nordkreuz)' 조직원 한 명의 집에서만 5만 발 넘는 탄약이 압수된 바 있다는 걸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량일 것이다.
'제국의 시민들'이 원하는 나라는?
이들은 현실 속 국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실제로는 문제가 많았던 과거 국가를 미화하며 정적의 제거를 주장한다. 껍데기이자 허상에 불과한 지금의 독일 국가가 붕괴하는 날(이른바 'Day X')을 상정하고, '그날이 오면' 총을 들고 일어나, 독일인을 옥죄는 기관들을 싹쓸이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고 한다. (Day X의 무장봉기를 준비한다는 독일 극우조직은 이 외에도 앞서 언급한 '북쪽의 십자가' 등 여러 개가 있으며, 독일 치안당국은 최근 수년간 총기소지 허가신청이 급격히 증가한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과거를 모델로 한다. 독일이 1차대전에 패전하기 전, 카이저(황제)가 군림하며 세계열강으로 대접받던 제2제국을 다시 구현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쿠데타 세력의 대표 인물인 하인리히 13세의 성채가 있는 바트 로벤슈타인(Bad Lobenstein)에선 지난 7월, 주민들에게 이런 편지가 발송됐다고 뉴욕타임스가 전했다.
"당신도 나라가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고 있는가? 사실 당신은 나라 없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로이스 왕가(하인리히13세의 가문) 아래 시민권을 신청하라!"
들이 러시아의 도움을 받으려 한 이유는?
유럽의 우파는 인종과 문화가 다른 (비백인/무슬림) 난민과 이민자들의 유입에 적대적 감정을 갖고 있다. 미투(Me too) 등 페미니즘 운동, 각종 캔슬컬처에도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다. 예전에 백인들끼리 살던 대로 살고 싶다는 것인데, 그런 이들에게 '이상향에 가까운 나라'로 비치는 게 러시아다.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에 맞설 수 있는 강대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독일과 프랑스의 극우세력이 러시아에 호감을 갖는다.
처음부터 쿠데타까지 꿈꾼 건 아니었는데....
쿠데타 성공했으면 독일의 왕? 하인리히 13세는 어떤 인물?
최근 수년간 그는 가문의 근거지인 튀링겐을 떠나 프랑크푸르트의 부촌에서 혈통을 내세워 고급 부동산 컨설팅 및 중개업을 운영해 왔다. 오스트리아와 스위스를 넘나들며 옛 귀족 출신 부자들을 고객으로 만든 뒤 '제국의 시민들'의 주장을 설파하고 기부금을 모았다. 쿠데타 모의의 본부이자 무기창고로 쓰인 바트 로벤슈타인의 성채도 그런 과정에서 구입한 것이다.
2019년 1월,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취리히에서 열린 '월드웹포럼'에 연사로 나가게 된다. 인터넷과 비즈니스 관련 컨퍼런스인데, 그는 엉뚱한 연설을 한다.
<어느 고귀한 혈통의 흥망>이라는 제목의 15분짜리 연설에서, 그는 극우세력에겐 익숙한 음모론적 주장을 쏟아냈다. 1차대전은 국제자본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 황제에게 강요한 전쟁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로스차일드 가문이 뒤에서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다음은 당시 연설의 주요 내용이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독일이란, 허상일 뿐이다."
"과거에는 문제가 생기면 왕이나 대공에게 찾아가면 해결해줬다. 지금은 누구에게 얘기해야 하느냐? 국회의원? EU? 잘 해봐라!"
"2차대전 종전시 평화협정이 없었으므로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은 유효한 존재 근거가 없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가능한 유일한 귀결은 독일을 카이저(황제)의 시대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전한 독일 매체 DW에 따르면, 컨퍼런스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연설에 큰 소란이 벌어졌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청중도 다수였다고 한다.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에, 로이스 가문의 종가에서도 그와 거리를 두게 된다. 종손인 하인리히 14세는 뉴욕타임스 로이터 등 서구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매체의 인터뷰를 종합한 내용이다.)
'로이스 가문의 계승권이 있는 남성들은 모두 '하인리히'라는 이름을 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그 사람은 왕위계승 순위 17위다. 헌법이 바뀌지 않아 왕과 귀족의 신분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우리들 16명이 죽어야 그에게 차례가 돌아간다는 뜻이다. 아마도 수년간 계속된 송사에도 불구하고 집안 재산을 되찾지 못해 심사가 뒤틀리면서 극단적 주장에 휩쓸린 것 같다. 허무맹랑한 소리만 일삼는 노인네라 가문에서 내놓은 지 오래다.'
옛 동독 지역은 통일 이후의 상대적 빈곤에 대한 불만, 지나치게 리버럴한 문화에 대한 혐오 탓에 '옛날이 그래도 살기 좋았지'라는 정서가 강하다. 옛 공산주의 시절에 대한 선택적 망각과 뒤틀린 향수, 경제-사회적 무기력과 실업에 따른 박탈감이 짙게 깔려 있는데, 그러다보니 문제의 하인리히 13세처럼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묘하게 먹히는 것이다.
큐아논(Q Anon)과 제국의 시민들, 그 환장의 콜라보
큐아논은 글로벌 엘리트들의 '딥 스테이트(Deep State)'가 실제 미국을 운영하는 힘이라고 본다. 현대 독일의 배후에는 유대인 자본 네트워크가 있다는 '제국의 시민들' 세계관과 일맥상통한다. 그 외에도 반유대주의라든가, 인종과 문화가 다른 난민이나 이민의 대량유입에 대한 적대감이라든가, 폭동(putsch)에 의한 정부 전복을 꿈꾼다든가 하는 요소들이 서로 통한다.
큐아논은 트위터나 각종 메신저 등 소셜미디어를 타고 온갖 불만세력과 음모론자들을 끌어모으며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실체로 성장했는데, '제국의 시민들'도 이런 성장모델을 따라 배운다. 2022년 봄에는 두 세력이 페이스북 공동 페이지와 텔레그램 공동 채널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의 콜라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혼종의 음모론을 퍼뜨리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디펜더-유럽'이라는 미군과 나토(NATO)의 대규모 연합훈련이 있다. 2020년에 열릴 예정이던 디펜더-유럽 20 훈련은 당시 많은 사람이 사망하던 유럽의 코로나19 상황때문에 급격히 축소됐다. 그런데 '제국의 시민들'과 큐아논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퍼뜨렸다.
'디펜더-유럽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독일인들을 해방시켜 주려고 군대를 보내려는 비밀계획이었는데, 독일 연방정부가 가짜 팬데믹을 꾸며내 훼방을 놓고 무산시킨 것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무슨 허튼소리인가 싶지만, 이런 것도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음모론자들이 활개를 치는 것이다. 음모론자들이 창궐한 토양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다. 세상이 바뀌면서 경제적으로 궁핍해진 지역(독일은 동독, 미국은 제조업이 붕괴된 일명 '러스트 벨트' 지역), 계층적으로는 교육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사람들을 숙주로 삼아 극단주의 세력이 확산한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의 기성 엘리트에 대한 혐오, 그들이 유지하는 체제와 제도와 과학에 대한 반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코로나와 백신에 대한 허무맹랑한 악성루머도 이런 요인들에 힘입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현실에 대한 불만이 큰 나머지 '내가 남들만큼 못 사는 건 사회와 국가 탓이다. 그렇게 되게끔 음모를 꾸민 놈들이 오래전부터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외세의 앞잡이다', '누군가 세상을 확 엎어버리면 좋겠다', '동지들과 연대해 내 손으로 세상을 엎어버리면 되지 않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음모론과 극단주의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어른거리는 히틀러의 그림자
이후 나치가 처음 지방권력을 획득한 곳이 '제국의 시민들'과 하인리히 13세의 근거지인 튀링겐 주다. 나치 당은 1930년 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 무시할 수 없는 표를 얻어 우파 연정에 참여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부터 정부와 사법부에 나치 당원을 심고 합법선거와 불법 폭력을 넘나들며 독일 전체를 장악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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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hyunsik@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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