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인가 장부인가... 황제를 넘어 미륵을 꿈꾼 여인 [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한나라의 여태후, 당나라의 무측천, 청나라의 서태후. 중국 역사에서 정치를 쥐락펴락한 여장부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섬찟하다. 여태후는 유방이 총애한 척부인의 사지를 잘라 돼지우리에 던졌다. 무측천은 약간의 논란은 있지만 황후 권력을 찬탈하려고 친딸을 죽였다. 서태후는 광서제가 사랑한 후궁 진비를 산 채로 우물에 던졌다.
모두 악녀였지만 최고의 권력을 차지한 황후였다. 무측천은 한발 더 나아가 스스로 황제가 됐다. 국내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로 알려진 인물이다. 고향인 쓰촨 북부 광위안(廣元)에 단 하나뿐인 사당이 있다. 시내 뉘황루(女皇路)에 위치한 황택사(皇澤寺)로 간다.
스스로 황제에 오른 악녀, 무측천
가릉강 서쪽의 야트막한 산기슭에 위치한다. 기원전 전국시대의 치수 전문가로 유명한 이빙 부자의 사당이었다. 무측천이 황제 등극을 앞두고 학자이자 대신인 종진객을 불렀다. 위엄을 드러내고 싶으니 한자를 만들라 했다. 원래 성이 무(武), 이름이 조(照)다. 종진객은 해와 달, 창공을 아우르는 글자인 조(曌)를 만들었다. ‘해와 달이 하늘 높이 솟아 대지를 두루 비춘다’는 뜻이라 했다. 이 정도면 개명이 아니라 발명이다. ‘황은이 도도히 널리 퍼져 은택이 고향에 이른다’는 뜻을 담아 무측천 사당이 됐다.
대문을 들어서면 이성전(二聖殿)이다. 무측천이 당 고종과 나란히 앉아 있다. 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해 애칭인 ‘무미랑(武媚娘)’이라 불렸다. 태종이 사망하자 관습에 따라 출가했다가 다시 고종의 후궁이 된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의 여자가 됐다. 드문 일이었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낯뜨겁다.
황후와 후궁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 황후로 등극한 후 허약한 고종을 대리해 정무를 돌본다. 나란히 좌정해 국정을 맡아본다는 이성임조(二聖臨朝)였다.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공신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한다. 고종이 사망하자 황태자와 황제가 된 아들까지 거듭 갈아치운다.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주(周)나라 왕조를 세운다.
무측전(武則殿)이 바로 뒤에 있다. 1.8m에 이르는 좌상이 보인다. 실제 얼굴인 진용(真容)이다. 네모 반듯하고 이목구비 굵직한 얼굴에 황제의 위상을 치장했다. 독실한 불교도였다. 머리에 쓴 보관 정면에 석가모니를 새겼다. 승려의 가사를 입었고 가슴에는 구슬을 꿴 영락(瓔珞)을 걸치고 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겹쳐 가지런하게 선정인(禪定印)을 펼친다. 노년 시기 얼굴이라 하는데 노회와 고집이 느껴진다.
2층으로 올라가니 뒤쪽이 절벽과 붙어 있다. 여러 개의 석굴이 조성돼 있다. 대불굴(大佛窟)이 중앙에 있다. 눈을 크게 뜨니 윤곽이 드러나면서 점점 조형미에 빠져든다. 색은 최근에 덧칠했지만 세심한 조각과 어울려 장엄한 모습이다.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감탄사가 나올 만하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제자인 가섭과 아난, 관음과 대세지 보살이 제자리를 잡고 있다. 불감 밖에는 세파의 상처를 입은 역사(力士) 두 명이 배치돼 있다. 당나라 중기의 화려한 불교 석각을 1m 앞에서 바라보니 감개무량하다.
절벽에 뚫은 마애석굴이 모두 57개, 크고 작은 조각상이 약 1,200개다. 6세기 초 북위 시대 말기부터 조성했다. 약 200년 동안 불심의 현장으로 각광받다가 무측천 실각 후인 당나라 중기에 쇠락했다. 세계문화유산에 오를 만큼 보물은 아니어도 가치는 상당하다. 중국의 중요 석굴은 대개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때로는 봉쇄에 가깝게 통제한다. 반면 이 석굴은 관람에 제한이 없으니 너무 좋다. 두 눈 가득 천년의 예술을 담는데 시간 제약도 없다. 광위안에는 진짜 대단한 마애석굴이 또 있다. 10분 정도 걸린다.
가릉강을 따라가면 천불애(千佛崖)가 있다. 강 동쪽 절벽에 듬성듬성 구멍 뚫린 석굴이 보인다. 멀리서 보니 마치 벌집 같다. 3대 석굴인 막고굴, 용문석굴, 운강석굴의 유명세에 미치지 못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규모는 작은 편이나 오밀조밀하게 붙은 불감이 1,000개가 넘는다. 북위부터 당나라, 오대, 청나라 시대까지 천년을 이어온 석굴 문화가 펼쳐져 있다. 불감은 13층이며 45m 높이다. 절벽을 오르내리며 구석구석 살핀다. 석굴로 들어가서 관람이 가능하고 심지어 살짝 만져볼 수도 있다. 조각이나 벽화의 수준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감동이 강물처럼 밀려드는 석굴도 많다.
딱 중앙에 대운고동(大雲古洞)이 있다. 690년 무측천이 등극할 때다. 최초의 불교 사원인 백마사(白馬寺) 승려 12명이 대운경(大雲經)을 써서 바쳤다. 무측천이 미륵불의 강림이란 내용을 담았다.
광위안 관원과 승속이 석굴을 굴착했다. 석굴 가운데 자리 잡은 미륵불은 무측천의 화신이다. 뒤쪽에 있는 양쪽 불감은 고종과 무측천이 정좌하고 있는 공간이다. 전통방식의 자리 배치와 반대로 왼쪽에 여자, 오른쪽에 남자다. 황택사 이성전 배치와 반대다. 무측천에 대한 예우인데 전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양쪽 벽에 모두 148개의 관음상이 도열해 있다.
다닥다닥 붙은 석굴에 보이는 채색이 현란하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계단도 없다. 무대 위에 진열된 작품을 감상하는 듯하다. 눈에 띄는 석굴 하나로 시선이 다가간다. 여느 석굴과 달리 광배 부분의 투각에 초점을 맞춘다.
당나라 시대 유행한 보리서상(菩提瑞像)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보관을 쓰고 칠보 목걸이를 두르고 있으며 가사를 걸치고 있다. 왼손은 배 앞에 펼치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향하는 촉지인(觸地印) 자세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 앉아 설복으로 악마를 교화하는 장면을 시전하고 있다. 두 명의 지신(地神)이 받침대를 지탱하고 있고 양쪽에 두 제자와 보살, 역사가 위치한다. 보리수나무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飛天) 동작으로 바람, 천둥, 번개를 관장하는 신이 새겨져 있다. 뚫어지라 바라볼수록 진귀하다.
무측천 황제 시대인 7세기 후반에 조성된 연화동(蓮花洞)이 보인다. 석굴 천장인 조정에 연꽃무늬를 화사하게 수놓았다. 한복판의 태극을 겹겹이 보듬고 있다. 석굴 중앙에 미륵불, 양쪽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이 나뉘어 배치돼 있다. 보통 삼세불(三世佛)의 가운데 자리는 현재세(現在世)인 석가모니가 차지한다. 미래세(未來世)인 미륵불로 추앙된 무측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장불동(藏佛洞)이 보여 뜻밖이다. 연화대 위에 좌정한 불상의 면면이 익숙하지 않다. 티베트 불교의 활불(活佛)인 후투그투(呼圖克圖) 3세다. 후투그투는 몽골어로 ‘성자’라는 뜻이다.
후투그투 1세가 달라이라마 5세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청나라 조정은 티베트 불교의 분리 통치를 위해 몽골 지역을 주관하게 됐다. 천불애에서 가장 늦은 시기인 1842년 조성된 석굴이다. 시대나 지역에 따라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부처만 보다가 인간의 얼굴을 닮은 모습이라 놀랍기도 하다. 통통하고 포근한 인상이다. 중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후투그투 3세 불상이니 귀한 대접을 받을 만도 한데 왠지 쓸쓸해 보인다.
그저 평범한 석굴도 아주 많다. 이름 없는 공양인굴(供養人窟)이 훨씬 많이 나타난다. 명나라 이후 서민이나 상인이 자신의 얼굴을 닮은 불상을 짓기 시작했다. 하승선경전(何勝先敬鐫)이라 새긴 석굴의 불상은 미소를 한껏 머금고 해학을 드러내고 있다. 부처를 닮고 싶은 마음으로 만복과 장수를 소망했다.
계단 따라 오르내리다 보면 쓰다듬어 주고픈 조각상이 많다. 동그란 눈과 엷은 미소를 드러내고 그냥 698굴이란 숫자만으로도 수백 년의 시간을 이어주고 있다. 손때를 묻히고 지나는 이의 마음을 읽는다는 듯 조용히 앉아서 말이다.
계단을 따라 한 바퀴 둘러보는데 두어 시간은 걸린다. 석굴이 바로 옆이고 밀집돼 있어 관람은 편하다. 꼼꼼하게 불교와 역사, 문화를 읽는다면 두 배는 소요된다. 석굴과 불감, 조각마다 숫자를 적어놓았다. 동그라미에 들어간 숫자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계단 옆에 있는 151굴도 이름 모를 주인의 자리다. 크기는 작아도 제대로 구색을 갖추고자 했다. 부처가 크거나 작거나, 화려하거나 소박하거나 공양인에게는 다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소설 삼국지 속 제갈량의 마을, 제갈고진
석굴의 여운을 뒤로하고 기차를 타러 간다. 오후에 성(省)을 넘어가려면 버스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장거리 버스는 대부분 오전에 출발하기 때문이다. 마침 기차가 있다. 동북쪽 150㎞ 거리의 산시성(陝西省) 몐현(勉縣)으로 간다.
쓰촨성 청두에서 푸젠성 푸저우까지 달리는 K390 열차다. 무려 40시간이 걸리는 노선에 겨우 3시간이니 눈 깜박할 사이다. 23위안인 일반좌석이 없어서 77위안인 침대에 누워 달리니 편하다. 쾌청한 실내에서 살짝 눈을 붙였다 일어난다. 푸른 하늘을 달리는 기차가 유난히 정겹다.
몐현은 제갈량의 도시다. 역에서 택시를 타니 10분 만에 제갈고진(諸葛古鎮)에 내려준다. 사당 옆 마을을 테마공원으로 단장해 온통 삼국지 속 제갈량 세상이다. 수레를 타고 두건을 두르고 부채를 쥐고 군대를 지휘하는 자세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조각상이 보인다. 볼수록 멋진 디자인이다. 강한 햇살을 반사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긴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둘러보려고 서두른다.
인공으로 만든 도랑이 졸졸 흐르고 있다. 물길이 있어 쾌적한 느낌이다. 공예품 가게와 식당이 성황이다. 도랑 따라 들어가니 넓은 연못이 나온다. 적벽 전쟁을 치르는 함대가 정박해 있다. 치열한 전쟁터를 보여주려는 듯하다. 소설 삼국지의 화려한 장면에 비해 소탈하게 꾸몄다. 화살을 얻으려는 작전인 초선차전(草船借箭)도 구현돼 있다.
삼고초려로 유비가 찾아온다. 제갈량은 천하를 셋으로 나누는 전략인 융중대(隆中對)를 설파했다. 후베이성 샹양(襄陽)에 있는 고융중 패방을 똑같이 복사해 세워 놓았다. 글자 내용과 크기, 색깔은 물론이고 조각 형태도 완벽하게 일치한다. 1893년에 세운 패방을 그대로 옮겼다고 느낄 정도다. 설마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오리지널을 확인하고 싶을 정도다.
제갈량 유적지를 복제했다는 군승부(郡丞府)가 있다. 산둥성 태산군 군수의 비서인 군승을 역임한 아버지 제갈규의 저택이다. 아무리 찾아도 산둥 일대에 본래 건물이 있다는 정보는 없다. 출토된 문물을 참조해 상상으로 지은 듯하다. 8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고향을 떠났다. 군승부에서는 제갈량의 어린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당에 어린이가 닭과 함께 있는 조각상이 있다. 제갈량은 당대 석학이자 재야인사인 수경선생(水鏡先生)에게 수학했다. 시계가 없던 시대였다. 선생은 점심때 닭이 울면 수업을 마쳤다. 조금이라도 더 스승의 지혜를 듣고자 했던 제갈량이 꾀를 부렸다. 스승 몰래 닭에게 모이를 충분히 줬다. 배부른 닭이 한참 늦게 울었다. 총명하고 학구열에 불타는 어린이의 이미지다. 아이들 손잡고 테마공원을 찾은 부모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수수 냄새가 진동한다. 땅바닥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으니 술 냄새가 거리로 나온다. 양조장을 설치하고 와룡주(臥龍酒)를 판매한다. 관광지라 먹고 마시는 문화가 빠질 수 없다. 코가 벌렁거리면 조건반사로 군침이 흘러나오고,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500㎖ 1근에 65위안이다. 항아리를 열자 향긋한 공기가 가득 찬다. 국자로 푸니 농도는 더 짙다. 병이 쪼르륵 흐르는 소리만으로도 취기가 오른다. 알코올 52도가 아니라 삼국지의 제갈량을 마시는 일이다.
너도나도 시선을 끌기 위해 홍보를 한다. 과장하지 않아도 딱 눈에 띄는 식당이 있다. 이건몐(一根面)을 판다. 재료나 육수가 독특해 붙은 이름이 아니다. 끊어지지 않는 면발이 단 한 줄이라는 뜻이다.
쓰촨 지방 일반 민가에서 즐겨 먹던 전통이다. 쫄깃한 반죽이 생명이다. 펄펄 끓는 물에 곡예를 선보이는 듯 한 줄 집어넣는다. 손으로 빼내는 동작이 이어지다가 한 그릇 분량이 되면 톡 끊는다. 다 익으면 육수와 고명을 넣고 손님에게 내놓는다. 12위안 내고 한입에 쉬지 않고 먹으며 왠지 끊임없이 수명이 이어지리라는 생각을 한다. 국수에 대한 비약이지만 잠시나마 느끼는 행복감이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려 한다. 동문으로 나오니 팔괘광장이 나온다. 천문지리에 통달하고 기문둔답(奇門遁甲)에 능통하며 음양팔괘에 해박한 반선(半仙)이 아니던가? 소설가에 의해 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을 위한 관광지다. 팔괘 위에 제단을 만들고 수레를 올렸다. 누구나 올라앉아 제갈량처럼 팔괘진을 펼쳐도 된다. 소설과 정사의 구분이 무의미한 제갈고진이다.
호텔을 잡고 바깥으로 나왔다. 조명이 밝힌 ‘메이리싼궈(魅力三國)’와 ‘메이리몐현(美麗勉縣)’이 보인다. '매력'과 '미려'는 발음이 같다. 연기 자욱하고 시끄러운 거리로 간다. 육해공, 동식물 무엇이라도 구워 파는 사오카오(燒烤)다.
닭다리의 뼈와 살을 꼬치에 꽂아 굽는 메뉴를 가장 좋아한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모른다. 주문할 때마다 사자성어를 읊는다. ‘혈육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는 구러우샹롄(骨肉相連)이다. 제갈고진에서 산 와룡주를 마신다. 무엇이 술이고 무엇이 안주인지 헷갈린다. 삼국지의 땅에서 맛보는 뼈와 살이 타는 밤이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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