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기밀절도'에 관대, '성실실패'에 가혹…부조리한 방산 생태계
대형 기밀 절도 사건을 저지른 업체는 별 탈 없이 제 갈길 가고, 힘들여 국산화에 도전한 업체는 납기일 며칠 어겼다고 천문학적 액수의 벌금 맞고… 이토록 부조리한 시장이 세상에 있을까 싶지만 최근 몇 년 간 우리 방위산업계에서 벌어진 현실입니다.
현대중공업은 KDDX(한국형 차기 구축함) 사업의 개념설계 군사기밀을 훔쳤고 이어 본사업을 따냈습니다. 제재는 없습니다. 총기 전문기업 A사는 6년 간 10여 건의 기밀을 훔쳐서 몇몇 수주에 성공했습니다. 사업 참여가 제한되는 부정당 제재는 단 6개월에 그쳤습니다. 반면 국산 3천 톤급 첫 잠수함인 도산 안창호함의 수많은 장비 중 어뢰 기만기 개발이 110일 늦어졌다는 이유로 대우조선해양은 지체상금 948억 원을 물었습니다.
훔쳤을 뿐 활용 안 해?…판결문 못 구해서 불처벌?
2020년 12월 기본설계 계약에 앞서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방사청의 재검증입니다. 하지만 방사청 재검증위원회는 "현대중공업이 훔친 개념설계 기밀을 본사업 제안서 작성에 활용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왕정홍 당시 방사청장은 2020년 10월 국감에서 "재검증위원회의 결론이 난 상태에서 저희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법원 가처분 신청 판결"이라고 말했습니다. 왕정홍 전 청장의 주장은 틀렸습니다. 법원 가처분 소송은 본사업 제안서 평가의 오류를 보는 것이었지, 훔친 기밀이 본사업 제안서 작성에 사용됐는지 따지는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법원의 진짜 판결은 지난달 11일에야 나왔습니다. 울산지법은 "현대중공업 피고인들이 (KDDX) 제안서 작성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해 (개념설계) 문건들을 촬영했다", "제안서 작성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문건을 제안서 작성 담당 직원들과 공유해야 했다", "피고인들은 현대중공업 내부 서버에 업로드하고 제안서 작성 담당자들에게 이를 보고했다"고 판결했습니다.
청렴 서약하면 과거 불문?
그런데 A사 청렴서약 위반에 대한 방사청의 유권해석이 이채롭습니다. 방사청 핵심 관계자는 "청렴서약서는 미래의 행위만 제약한다"고 밝혔습니다. 청렴서약한 뒤 기밀을 훔쳐야만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기밀을 먼저 훔친 다음 청렴서약하면 문제 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A사가 기밀을 많이 훔치고 청렴서약을 했지만 청렴서약 위반이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비리는 묻지 않고 미래 비리만 손댄다는 방사청의 미래지향적 해석을 백분 수용한다 해도 방사청과 A사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A사는 2019년 11월 K1A, K2, K3 등 총기 부품류 사업의 청렴서약을 하고 몇 달 뒤인 2020년 3월과 4월 기밀 취득과 누설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A사의 총기 부품류 사업 이행은 같은 해 6월 말 완료됐습니다. 미래 행위만 제약한다는 방사청의 협소한 청렴서약 해석으로도 처벌의 여지가 크지만 A사는 무사했습니다.
국산화 시도한 것이 죄
도산 안창호함에 들어가는 수백 수천의 국산화 장비 중 하나인 어뢰 기만기 개발에 110일을 지체했다고 잠수함 사업비의 10%에 달하는 액수를 거둬간 것입니다. 해군 고위 관계자는 "어뢰 기만기 없이 잠수함 먼저 취역시켜 운용하다가 110일 후에 어뢰 기만기를 달아도 됐었다", "대당 30억 원 안팎의 장비 개발 좀 늦어졌다고 잠수함 전체 가격의 10%를 강탈한 것은 블랙 코미디"라고 꼬집었습니다. 방산업계에선 "툭하면 지체상금 얻어맞는 독자개발 하지 말고, 손쉬운 수입 하자"는 푸념이 나옵니다.
혁신적 도전 과정에서 생긴 작은 실패에 관대해야 함에도 방사청은 종종 가혹합니다. "누설되면 국가안보에 치명적"이라고 판시되는 기밀절도 범죄에 가혹해야 함에도 방사청은 종종 관대한 편입니다. 방사청은 방산시장 질서유지의 역할에 충실한지 자문해보기 바랍니다.
김태훈 국방전문기자onewa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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