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도대체 어떻게 견디는 걸까? 나는 전혀 자신이 없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던 지인이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을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그는 사회적 참사가 벌어질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린다고 한다. 구의역 사건 때도,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죽음을 당한 김용균씨를 보면서도, 신당역 사건 때도 그랬다. 처음엔 참사라고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하나같이 해결을 약속하지만 책임자들이 점차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것이 유가족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냐고 물었다. 자기는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견디는 자들은 삼키는 것이 있다. 그저 견디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그것이 있는 대로 다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빠져나온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발가벗긴다는 것을 잘 안다. 이미 대중 앞에 발가벗겨져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는 몸이지만 그것이 빠져나올 때 비참함마저 발가벗겨진다는 것을 알기에 삼키는 분들이 있다. 삼키는 분들에겐 조롱하는 자들마저 일순 멈칫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멈칫거리는 한순간. 그 순간만큼은 존엄이 살아 있고 빛난다. 곧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어 기어이 그 존엄을 훼손해버리지만 말이다.
고통에 붙들려 있지 않은
이번 학기에 한 학생이 올린 공연은 뜻밖에 이 시대의 주인공은 누구인지에 해답을 줬다. 그가 올린 작품은 극작가 박찬규가 쓴 이라는 청소년극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엄친아’로 자라는 고등학교 남학생 준호는 우연히 여성용 레오타드(다리 부분이 없고 몸에 꼭 끼는, 아래위가 붙은 옷)를 입고 자기를 발견하게 된다. 레오타드를 입으면 자신이 자기다워진 것 같고 자신감을 느낀다. 그래서 늘 교복 안에 감춰 입고 다닌다. 물론 준호도 동료 학생들에게 발각되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있다. 몇 가지 사건을 겪고 나서 그는 체육 발표 시간에 용감하게 레오타드를 입고 나타나 춤을 춘다. 이후 그는 어머니의 요구로 전학을 간다.
이 연극은 어둡게 만들려고 하면 얼마든지 어둡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의 취향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문제시하며 소수자에게 폭력적인 한국 사회에 대한 고발이며 그 안에서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2학년 학생들이 올린 연극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고통당하는 장면을 피하지 않되 그 고통 때문에 절규하거나 괴로워하는 장면의 연출은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대신 주인공은 고통을 겪지만 그것을 견뎌내며 거기에 ‘붙들려 있지 않는 자’로 그려냈다.
그러다보니 템포가 아주 빨랐다. 템포가 빠른 만큼 주인공들은 경쾌한 인물로 그려졌다. 그런 일을 겪는다면 반드시 중간에 등장할 것 같은 ‘구질구질한’ 장면은 휙휙 지나가거나 없었다. 원래 희곡에도 절규하는 장면은 없었지만 연출은 더욱 경쾌하고 속도감 있게 지나갔다. 그렇다고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주인공은 내가 이것을 선택한 이상 견디고 감당해나가겠다는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 경쾌하면서도 강인한 인물로 그려졌다. 사실 현실에서는 별로 존재하지 않을 듯한 인물이지만 말이다.
견뎌야 하는 것과 행해야 하는 것
이런 인물을 이 연극에서만 만난 것이 아니다. 얼마 전 국민적 관심을 받고 높은 시청률 속에 종영한 드라마 <슈룹>에서 배우 김혜수가 연기한 중전도 그렇지 않았는가? 시어머니 대비의 감시와 견제, 권력욕 속에 첫아들 세자를 잃고 폐서인이 될 위기에 몰리지만 김혜수는 자신의 남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겪게 되는 고통에 따른 ‘구질구질한’ 장면은 없다. 그런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되거나 빠른 템포로 지나간다. 심지어 고뇌의 장면도 그렇다. 대부분 장면은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짧게 말하면 선택하고 행동한다. 서사 이론에서 주인공을 설명할 때 하는 간명한 정의 딱 그대로다. 선택하고 행동하고 주도하는 자로서의 주인공이다.
대신 이런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겪는 ‘구질구질한’ 장면은 전부 그들이 삼키는 것이 된다. 말로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안으로 삼켜진다. 아주 빠른 속도로 삼켜진다. 물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고 행동하는 동안 그들의 표정과 몸에 견디는 것이 새겨진다. 그들을 보는 사람들이 육감으로 알게 된다. 그들이 견디고 있음을 말이다. 그렇기에 이 경쾌한 사람들은 동시에 매우 강인한 사람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파친코>의 작가는 책 서두에서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지금 동시대 사람들이 선호하며 동시에 동시대성과 씨름하는 작가들이 그려내는 교차점에 서 있는 주인공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망쳐진 것에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거기 붙들리지 않고 나아가려는 존재이기에 경쾌하며 망쳐진 것을 삼키고 견뎌낸다. 이런 인물은 한편으론 이야기를 ‘질질 끌며’ ‘구질구질한’ 것을 보는 것에 질색팔색하는 대중의 기호에 맞아떨어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를 잊지 않되 피해자다움의 나락에서 벗어나는 인물을 구축하고픈 작가들의 욕망의 결과다.
물론 견디는 것은 순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안나수이 손거울>의 마지막 부분에서 남자 주인공은 ‘아직’ 고등학생이기에 엄마 말을 따라 전학 간다. 그런데 무대에 선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결코 레오타드 착용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전학은 엄마의 선택일 뿐이고 레오타드를 계속 입는 것은 주인공의 선택이다. 무대에 구축된 세계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조건에서 자기가 견뎌야 하는 것과 행해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견뎌야 하는 것과 행해야 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모습, 이거야말로 선택하고 행동하며 상황을 주도한다는 주인공의 모습에 가장 닿아 있다.
<슈룹>의 왕비 임화령 역시 그렇다. 매 순간 그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행동할지, 그리고 그 선택과 행동에 따라 자신이 감당하고 견뎌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한다. 그것을 위해 철저히 계산한다. 자신이 지금 가진 것이 무엇이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그리하여 주어지지 않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주어진 것에 집중해 다음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그 선택의 순간순간이 견디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이런 주인공들에 대한 환호는 위험하기도 하다. 인간의 삶에서 ‘구질구질한 것’은 결코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질구질한 모든 것을 제거한 이야기는 결코 16부작을 넘어서지 못한다. 대하드라마는 만들어질 수 없다. 삶은 아무리 영웅이더라도 그렇게 경쾌하게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쾌함과 견뎌냄을 이상화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삶을 변변찮은 것으로 밀어낼 위험이 있다. 지금은 ‘누칼협’(누가 칼로 협박해서 가라고 했느냐)이라는 말로 자신이 선택한 것에 ‘변명’하며 구질구질해지지 말고 감수하며 살라는 게 지상명령이 된 시대가 아닌가.
동감·공감을 넘어 연민으로
여기에서 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들은 대중의 열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신에 대해서는 견뎌야 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견뎌야 할 것은 감수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이되 그렇지 않은 주변에 연민(Compassion)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선택과 행동/견딤에 대해 환호하며 그렇지 못한 자들을 가혹하게 비난하는 시류와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연민은 그의 처지에서 상황을 바라보고 상대방의 마음이 돼보는 공감(Empathy)보다 더 고차원의 마음이다. 연민에는 공감을 넘어 그를 걱정하고 기꺼이 그에게 도움이 돼주려는 마음이 함께한다. 너와 내가 같은 처지이기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 비록 내가 그와 다른 처지이고 나 또한 곤궁하더라도 내 쪽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도우러 가는 마음이 연민이다.
<슈룹>에서 임화령이 양반에게 성폭력을 당하고서는 외려 내침을 당하는 여종을 구하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여종은 임화령에게 떠나줄 것을 요청한다. 잠시 자기에게 공감하며 위로는 줄 수 있으나 그가 떠나고 나면 더 큰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임화령은 “내 이미 너의 삶에 끼어들었다”고 말하며 여종에게 손을 내민다. 공감을 넘어 기꺼이 도와주려는 마음과 행동, 이것이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말라”가 정언명제인 이 시대에 ‘남의 인생에 끼어든’ 그를 동시대인으로서 주인공이 되게 한다. “홀로 견디라!”는 시대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되 남의 십자가는 함께 지며 너는 견디며 죽어가지 말고 “살아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말이다.
<…안나수이 손거울>의 준호 역시 그렇다. 준호는 어머니의 강요에 따라 신도시 학교로 전학을 떠나며 레오타드 입은 사진을 학교 게시판에 올렸던 여자 주인공 희주가 미안해하자 이렇게 말한다. “우리 엄마가 쪽팔리고 눈치 보여서 아들내미 전학 보내는 것인데 네가 왜 미안해하냐.” 그리고 “갑자기 신파 분위기 만들고 그러냐” 하고 쿨하게 떠나며 희주에게 “씨발 철봉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니 팔목을 믿고 어깨를 믿으라”고 말한다. 학생들은 이 장면에서 준호를 그저 ‘쿨’한 존재가 아니라 죄책감에 휩싸일 수 있는 희주를 향한 연민의 주체로 구축해 무대에 세웠다.
‘영웅담’이 아니라 구원의 서사
사회적 참사를 당한 사람들은 홀로 버티지 않는다. 개중에는 내 고통이 최우선이고 모두가 내 고통에 동감(Sympathy)해주기를 바라는 이도 있으며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끼리 공감(Empathy)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자기도 같은 처지면서 동감과 공감을 바라는 사람을 연민(Compassion)하며 도우려는 이도 있다. 이분들은 자신의 고통은 삼키되 옆 사람의 고통은 나누려 한다. 자신은 홀로 견디되 곁에 있는 사람은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분들이 있기에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있기에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이야기돼야 한다. ‘영웅담’이 아니라 구원의 서사로서 말이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엄기호의 이야기 사회학: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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