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그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정성화가 그린 인간 안중근 (영웅)
[Dispatch=박혜진기자]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한 남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등장했다. 코트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코레아 우라!”
2022년 12월, 총성 3발이 울렸다. 그리고 안중근(정성화 분)은 러시아의 광활한 설원을 홀로 걸었다.
정성화가 영화 ‘영웅’(감독 윤제균)으로 스크린에 섰다. 우리가 몰랐던, 인간 안중근을 그렸다.
그에게서 안중근을 봤다. 머리, 수염, 눈빛, 자세…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의 숨소리마저, 노래가 됐다. 눈빛은 드라마 그 자체였다. 읊조리는 말 한마디로 화면을 압도했다.
그 모든 건, (그냥 얻은) 운이 아니었다.
◆ 개그맨에서 영웅이 되기까지
정성화는 지난 1994년 개그맨으로 시작해 드라마와 연극의 조·단역을 가리지 않았다. 모든 실패와 경험을 무대에 쏟아냈다.
그는 점점 뮤지컬에 빠져들었다. 개그맨의 유연함을 연기에 녹였다. 연극배우의 공력을 무대에서 쌓았다.
무대 위에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첫 공연을 잊을 수 없다. 커튼콜 때 받았던 박수가 기억난다”며 “몸에 있는 털이 다 서면서 눈물이 났다”고 떠올렸다.
“이제야 나의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까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죠(웃음). 박수받을 때 너무 짜릿합니다. 그걸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그를 알아본 건 윤제균 감독이다. 지난 2014년, 뮤지컬 ‘영웅’ 공연장을 찾았다. 그는 정성화의 안중근을 보는 순간, 매료됐다.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정성화는 “영화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주인공이) 누가 되든 내가 열심히 도와드려야지”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타이틀 롤이 될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정작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그도 그럴 게, 3가지 리스크가 있었다. 주인공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대형 영화를 이끄는 것, 영화에 뮤지컬을 도입한 것, 이 모든 것을 관객에게 최초로 선보인다는 것.
“위험 요소를 안고 시작했어요. 뮤지컬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거니까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이 뛰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정성화는 “중요한 건 관객이 저를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하는 것"이라며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통할까’라는 의심을 지우는 행보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선 체중을 감량했다. 안중근으로 보이기 위해 한 달여 만에 14kg를 뺐다. 그는 “진짜 고통스러웠다. 촬영 중에 쓰러지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영웅’은 코로나19로 개봉이 여러 번 미뤄졌다. 그 기간, 부족한 부분을 재촬영하기 위해 다시 6kg를 뺐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찾았다. “그곳에 있는 설명을 하나하나 다 읽었다. 그분의 심정과 발자취를 따라갔다”고 설명했다.
시나리오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14년 동안 체화한 내용이지만, 처음 본 것처럼 접근했다. 수도 없이 다시 읽자, 새로운 감정들이 눈에 보였다.
◆ 인간 안중근
정성화는 영웅 안중근보다 인간 안중근을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몰랐던 그의 뒷모습, 그가 속으로 삼켰을 눈물에 집중했다.
그러기 위해서 ‘빼는’ 작업을 했다. 14년간 수없이 불렀던 노래를 다른 방식으로 불렀다. 뮤지컬과 영화 발성은 다르다. 게다가 ‘영웅’은 라이브로 찍었다.
정성화는 ‘공간감’을 계산했다. 작은 소리에 집중했다. “공간감이 진짜 힘들었다. 감정의 진폭을 계산해 세밀하게 불렀다”고 말했다.
뮤지컬 영화는 가장 어려운 장르다. 노래와 연기, 둘 다 잡아야 하기 때문. 일례로, 무대에서는 리버브를 넣어, 다듬어진 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현장은 달랐다. 인이어에서 생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그는 “노래를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정성화는 “조금씩 노하우가 생기더라”며 “‘잘못 부르고 있는 게 아니야’라고 자신을 믿었다. ‘못하면 다시 하면 돼’ 생각했다”고 전했다.
부담은 조금씩 설렘으로 바뀌었다. “주연이 되니까 쉬는 시간이 없어졌는데, 그 자체가 즐거웠다. 현장이 설레었다”고 떠올렸다.
그렇게, 조금씩 유연해졌다.
◆ “진실한 감정이 음악을 이긴다”
노래를 다듬고 나니, 감정의 진폭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한 감정이 가장 선행되어야 한다. 그게 음악을 이긴다”며 “나문희 선생님께서 증명하셨다”고 말했다.
나문희(조마리아 역)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이다. 안중근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목숨 구걸 말고 그냥 죽으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를 부르며 배냇저고리를 끌어안는다. 토해내듯 부르는 어미의 노래에 관객의 마음도 함께 무너져내린다.
피치도, 박자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 순간, 보는 이의 감정은 최고조로 들끓는다. 완벽한 노래보다, 피눈물 섞인 울분이 마음을 건드렸다.
‘십자가 앞에서'도 그 예다. 거사 전, 안중근이 여관에서 기도하는 노래다. “가족을 생각하며 비장함, 두려움, 후회, 갈등, 슬픔 등 여러 감정을 녹여야 했다”고 말했다.
정성화는 이 장면을 원테이크로 찍었다. 감정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담담하고 절제된 목소리로 한 섞인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자, 노래가 대사로 들렸다.
그는 목에 밧줄을 맨 채 ‘장부가’를 읊조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을 열거하며 ‘누가 죄인인가’를 물었다. 눈보다 가슴을 먼저 울렸다.
◆ “대한민국의 자긍심, 영웅”
28년 차 배우 정성화. 그는 여전히 배운다. “‘영웅’을 찍으며 배우가 극을 이끌어갈 때 어떤 톤과 매너여야 하는지 정말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안중근의 삶을 보면서도 본받는다.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며 “항상 발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정성화에게 안중근은 어떤 존재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대한민국의 자긍심"이라고 정의했다.
“그분의 경지까지 도달할 순 없지만, 저라는 사람을 투영해서 안중근 의사를 보여줄 수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성화는 ‘영웅’에서 숨김없이, 남김없이 쏟아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정성화가 곧 노래였다.
“숙원과 꿈이 이뤄진 순간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단연코 후회 없이 치열하게 촬영했습니다.”
우리는 정성화를 통해 안중근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윤제균 감독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정성화를 스크린으로 볼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사진제공=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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