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연합' 탄생할까…브라질 룰라, 단일화폐 추진
일명 '아마존 페소' 나온다면 어떤 모습?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중남미 지역통합 논의에 속도가 붙고 있다. 1월 1일 취임을 앞둔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 당선인이 화폐 통합 추진을 시사하자,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등 인근 좌파 정부가 호응하면서다.
15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주간지 페르필 브라질판에 따르면 룰라 당선인은 경제차관 자리에 남미 단일화폐 창설론자로 유명한 가브리엘 갈리풀루 전 투자은행장을 내정했다.
룰라 당선인은 2003~2010년 두 번의 임기 때도 당시 불던 좌파 정부 출범 물결 '핑크 타이드'에 힘입어 지역통합을 추진한 바 있다. 이번에는 77세 고령임을 감안해 연임을 염두에 두지 않는 만큼, 정부 출범과 동시에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1기 핑크타이드 이후 유야무야 된 통합 논의 속도 낼 듯
현재 단일화폐 창설까지 나아간 지역통합 모델은 유럽연합(EU)이 유일하다. 전체 27개 회원국 중 19개국이 유로존에 묶이며, 이들은 유럽중앙은행(ECB)을 통해 공동의 통화정책을 운영하고 있다.
단일화폐는 EU의 정치·경제 통합 정도와 대외 협상력을 높이는 효과를 갖는다. 유로화는 엔화, 파운드화와 함께 '준 기축통화'로 간주된다.
다만 아직 완전한 경제통합을 달성하지 못한 유로존 국가들은 재정정책과 통화정책 간 엇박자, 회원국간 경제수준 차이 등으로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
단일화폐 창설은 이처럼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지만, 현재 중남미 국가의 높은 인플레이션 한 원인으로 꼽히는 달러 의존을 줄이고 지역 이해를 강화하는 데 효과적이란 게 화폐통합론자들의 견해다.
아르헨티나처럼 연간 물가상승률이 세 자릿수에 가까운 중남미 대다수 국가에선 신뢰가 추락한 자국 통화를 미 달러로 대체하는 '달러라이제이션'이 경제문제의 대안으로 거론되는데, 이 경우 경제주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오히려 단일화폐 논의는 EU 같은 정치·경제 공동체 출범으로 나아가 지역 이해를 반영한 협상력을 갖고 주권을 강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기대를 모은다.
EU는 현재 주요 20개국(G20) 회원국으로, 다자주의 논의에서 정치·경제공동체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와, 입법부 격인 유럽의회 및 정상회의 기구 유럽이사회(EC)도 갖추고 공동의 의사결정을 한다.
EU는 대외협력청(EEAS)을 통해 공동의 외교안보정책도 펴고,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엔 유럽의약품청(EMA)이 백신을 승인하는 등의 통합 모델을 보여줬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강대국이자 거대시장으로서, 개별국가였다면 내기 어려웠을 협상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EU를 추종해 2002년 출범한 아프리카연합(AU)이 현재 55개국으로 운영되고 있다. EU 만큼의 통합체로 나아가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달 13~15일 워싱턴 개최 '제2차 미-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올인 구애'를 받은 건 지역통합체의 발언권과 협상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바이든 대통령은 AU의 G20 가입 지지 의사도 표명했다. AU가 공동의 대외 정책으로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다면 미·중 경쟁의 '각축장'이 아닌, 양쪽에서 이득을 취하며 지역 발전을 이룰 기회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사실 중남미 지역통합 구상의 '뿌리'는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틴아메리카 해방자이자 독립 영웅으로 꼽히는 시몬 볼리바르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현 베네수엘라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아이티 등지에 '그란(Big) 콜롬비아'를 구성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자원과 주권을 보호하자는 전략을 제시하고 추진했었다.
그러나 중남미는 냉전 기간 진영 갈등의 각축장이 되면서 쉽게 단합하지 못했고, 1기 핑크타이드 시기 룰라와 우고 차베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지역 통합 노력이 다시 힘을 받았지만 이후 정권 교체와 원자잿값 하락으로 인한 경제 악화 등으로 유야무야 된 바 있다.
그런 중남미 지역에서 2018년 △멕시코 로페스 오브라도르 정부를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알베르토 페르난데스(2019) △볼리비아 루이스 아르세(2020) 그리고 2021년 △칠레 가브리엘 보리치, 2022년 △온두라스 시오마라 카스트로 정부 출범으로 좌파 물결이 부활했다. (2021년 페루에도 페드로 카스티요 좌파 정부가 들어섰지만 현재 대통령 탄핵 및 정국 혼란에 휘말려 있다.
이어 올해 6월 콜롬비아에 들어선 구스타보 페트로 사상 첫 좌파 정부와 룰라의 복귀는 흐지부지됐던 통합 노력에 '굳히기'를 할 기회라는 평가다.
◇돌아온 룰라·핑크타이드 시즌2 '기회'
현재 브라질 룰라의 구상에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적극 호응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멕시코는 미국, 캐나다와 인접한 북중미에 걸쳐 있어 지정학적 영향력이 상당하다.
남미에서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며,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은 아이디어 자체는 좋아하지만 사안의 복잡성 때문에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다. 볼리비아도 정책이 추진되면 동참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네수엘라의 국제경제관계 전문가 차를레스 히우세피는 러시아투데이(RT) 인터뷰에서 "중남미 지역통합이 단일화폐까지 나아가기 위해선 단지 약속에 그치는 것을 넘어, 각국의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의 전 국가적 의지 표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핑크타이드 1기 때 EU를 꿈꾸며 창설한 우나수르(UNASUR·남미국가연합)가 브라질 정권이 교체된 2019년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 탈퇴로 유야무야 된 점을 교훈 삼아 보다 탄탄한 정치적 합의와 정책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히우세피는 "이상적인 건 조화로운 경제정책 합의에 기초해 정책을 펴야 한다는 건데, 일단은 뜻을 모은 정부간 공동 기금으로 단일 경제연구소를 창설해 최소 2년간 단일화폐 및 지역 통합의 방식과 시기 및 단계, 조건 등을 구체화해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유로화 역시 1950년 논의를 시작, 2001년이 돼서야 실물화폐가 나와 2002년 1월 1일부터 도입된 바 있다.
히우세피는 "각국 정부가 내수 관련 통제력을 일부 상실하고 경제정책 일부를 지역기구에 맡겨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만 가능하다는 점도 도전과제"라며 "중남미 지역은 개별국간 경제 차이가 상당해 공동의 통화·재정정책을 만들어내기가 쉽진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그는 "중남미 국가 대부분의 인구는 중·저소득층이고 부는 소수에게 집중돼 있는데, 이런 빈부격차는 단일화폐 도입 시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은 큰 장점"이라고 기대감도 내비쳤다.
◇고립된 베네수엘라 참여 관건…룰라 외교력 시험대
'아마존 페소'라는 별칭까지 나온 중남미 지역 단일화폐 및 지역정치경제통합체 출범에는 무엇보다 베네수엘라의 참여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1기 핑크타이드 때 '오일머니'로 지역 통합을 적극 추진한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과 달리, 그의 후계자를 자처한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은 정치·경제·대외관계 그 어디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고립돼 있다.
브라질 언론들에 따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기후변화 대응 등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룰라 브라질 정부가 출범하면, 마두로 베네수엘라 정부와 미국 간 가교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는 말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바첼레트 전 칠레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 전 에콰도르 대통령,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 룰라의 후계자였던 지우마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 등 중남미 전직 정상 및 전문가 50여 명은 지난달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지금 우나수르 재건(지역 통합 재추진)이 긴요하다"는 취지의 서한을 공동 서명을 담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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