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모로코인들 “신나게 날밤샜던 2022년 12월의 추억 못 잊을 것”
축구는 단순 스포츠가 아닌 ‘국기’
한국의 첫 아프리카 대사관 등 인연 깊어
사방이 고요와 어둠에 빠져든 지난 15일 새벽 4시. 서울 용산구의 한 식당이 환하게 불이 켜져있었고, 40여명이 빼곡하게 둘러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TV 모니터에 쏠려있었다. 카타르월드컵 4강전에서 프랑스와 맞붙은 고국을 응원하러 몰려든 주한 모로코인들이었다.
식당 창문에는 이슬람 다섯기둥과 솔로몬의 인장을 상징하는 별이 붉은 바탕에 그려진 모로코 국기가 내걸렸다. 조별리그에서부터 파란을 일으키며 강호들을 격침시키며 준결승까지 올라온 모로코의 돌풍은 이날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뜬눈으로 밤을 지샌 이들의 표정에 아쉬움이나 후회감은 없었다. 20년전 한일 월드컵 때의 한국처럼 유럽도 남미도 아닌 ‘축구 제3세계’ 팀으로 4강까지 오르면서 모로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이날 응원전이 열린 식당을 운영하는 메디(27)씨는 한일월드컵이 열리기 한 해전인 2001년 부모와 함께 고국을 떠나 한국에 정착했다. 그는 여느 한국사람 못지 않은 유창한 한국말로 벅찬 감정을 얘기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 전역이 열광했던 장면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이번 대표팀의 역량이 뛰어나 선전할 것으로 확신했지만, 솔직히 4강까지 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포함해 한국에 터전을 잡은 900여명의 주한 모로코인들도 고국 축구팀의 승전보에 뜬눈으로 즐겁게 밤을 샜다. 주한 모로코인들은 기업·공장·학교·결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살고 있다.
메디씨는 “축구는 모로코에서 으뜸가는 스포츠”라며 “각자 생업에 바쁘지만, 모처럼 들려오는 축구 승전보에 힘을 얻고 있다”고 대표팀에 고마움을 표했다. “살아남은 아랍·아프리카 국가가 우리 밖에 없다보니 한국에 있는 다른 아랍·아프리카 국가 사람들도 우리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축구는 모로코에서 사실상 국기(國技)로 대접받는다. 지중해 건너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 등 축구 명가로 꾸준히 선수들을 보내왔다. 축구 열기는 아프리카 최초의 월드컵 개최라는 열망으로 이어졌지만, 2006년·2010년 연거푸 유치에 실패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치르기로 확정된 상황에서 나섰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근소한 표차로 석패한 2010년이 아쉬웠다. 만일 여기서 이겼더라면, 아프리카·아랍권·이슬람권 최초의 개최국이 될 수도 있었다.
모로코는 전국민의 98%가 이슬람을 믿지만, 다른 아랍국가들에 비해 서구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서울에서 벌어진 모로코인들의 월드컵 응원전에서도 상당수 여성들이 히잡을 쓰지 않은 채로 남성들과 어울리며 축구를 관전했다. 메디씨는 “모로코는 말하자면 열린 이슬람 국가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험프리 보거트와 잉그리트 버그만이 주연한 클래식 영화 ‘카사블랑카’, 그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버티 히긴스의 동명의 추억의 팝송 정도가, 한국에 주로 알려진 모로코의 단편적 모습이다. 하지만 모로코와 한국의 인연은 예상 외로 깊다. 올해로 국교를 맺은지 꼭 60주년인데, 주 모로코 한국 대사관은 한국이 아프리카에 제일 처음으로 설치한 상주 대사관이다. 이를 시작으로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북한과 세를 넓히기 위한 치열한 외교 전쟁을 벌였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에서 단 셋 뿐인 왕정국가로, 비록 식민 시절을 거쳤지만 1665년 개창한 알라우이트 왕조가 줄곧 통치해왔다. 이 왕조는 비록 보호국 기간을 거쳤지만, 세계 최장 왕조 중 하나로 꼽힌다.
현 군주인 무함마드 6세(1999년 즉위)의 부친이자 선왕이었던 하산 2세는 1970년대 서부사하라 영토 분쟁 때 한국으로부터 군수 및 특수작전을 지원받은 것을 계기로 한국에 큰 호감을 가졌던 ‘친한파 군주’로 알려졌다. 아프리카에서만 4개국 대사를 맡으며 대아프리카 외교의 산증인으로 꼽혔던 김승호 전 모로코대사는 생전에 남긴 구술록에서 친서방적인 분위기가 강한 모로코에서의 외교 및 생활이 상대적으로 원활했다고 적었다.
모로코는 축구 외에도 육상 강국이다. 지금까지 역대 올림픽에서 딴 금메달 7개가 모두 육상 세부종목에서 나왔다. 이외에 인기 스포츠로 꼽히는 건 한국의 국기 태권도다. 특히 모로코 정부 차원에서 태권도를 올림픽 전략종목으로 육성하고 있다. 2024년 파리올림픽·2028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등에서 태권도복을 입은 모로코 선수들이 시상대에 설 수 있을지 주목된다.
모로코의 돌풍은 부족·종교·영토 문제 등에서 기인한 크고 작은 갈등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모처럼 하나로 뭉치는 동력이 되고 있다. 프랑스와의 준결승이 열렸을 때 미국 워싱턴 DC에는 미·아프리카 정상회담 참석차 50명 가까운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이 백악관에 모여있었다. 이날 조 바이든 대통령은 참석한 아프리카 정상들이 함께 모로코 응원전을 펼칠 수 있도록 연설을 일찌감치 끝낸 뒤 함께 4강전을 지켜봤다고 미 언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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