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조선 소녀들···이면엔 슬픈 진실이[책과 삶]
큰 딸 환이는 아버지가 남긴 일지를 바탕으로 사건을 좇는데…
사라진 13명 소녀들은 ‘가난한 집 출신’ ‘미인’이라는 공통점 뿐
봉건 사회 폐단을 비판하고 여성 연대를 담은 ‘역사 미스터리
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430쪽 | 1만7000원
1421년 어느 날 제주 ‘노원리’에 살던 서현이란 아이가 숲 절벽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민제우 종사관 딸 환이와 매월이는 서현이 시신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실신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1425년 민제우도 한라산에서 사라졌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수사관으로 유명한 이였다. 서현이가 죽은 뒤 4년 동안 소녀 13명이 사라진 사건을 수사하러 제주에 머물던 차였다.
1426년 큰딸 환이가 아버지를 찾으러 남장을 한 채 고향인 제주로 떠난다. “정보를 조목조목 분석하고 증거 없이는 그 무엇도 믿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댕기 머리 탐정’으로 불리곤 했다.
소녀들과 아버지 실종 사건에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환이는 숲 사건을 떠올렸다. 환이는 당시를 기억하지 못했다. 동생 매월이는 하얀 가면을 쓴 남자가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숲을 질주하는 모습을 봤다고 주장했다.
다른 단서 하나는 아버지 일기다. 복선이란 여자가 불타 가장자리만 남은 아버지 일기를 자기에게 보냈다. 아버지는 실종 소녀 이름을 다 적어뒀다.
환이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을 좇으려 한다. 환이는 아버지가 남긴 총 60권의 수사 일지를 정독한다. ‘숲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다시 찾고, 사람들을 만난다. 와중에 확인한 건 사라진 소녀들이 다 노원리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점이다. 다 ‘미인’이란 것도 공통점이다.
사건을 좇을수록 이상한 점이 많았다. ‘노원리’라는 말만 들으면, 사람들은 창백해지거나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들을 두고 정인(情人)과 사귀려고, 임신 사실을 숨기려고, 기생이 되려고 종적을 감췄다는 말이 마을 안팎에서 떠돌았다. 환이의 제주 도착 뒤 절벽에서 발견된 현옥이를 두고도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난 죄책감에 뛰어내렸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현옥이는 실종 때 열세 살이었다.
환이가 만난 사람들도 다 의심스러웠다. 제주 수령 홍 목사는 부당한 세금을 없애달라고 탄원하는 주민을 사형시킨 탐관오리다. 현옥이가 정인을 찾다 산비탈에서 미끄러져 죽었을 것이라고 단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골 무지렁이들에게는 도덕이라는 게 없지.”
백효성은 부친의 역모로 유배 온 인물인데, 딸 가희가 열두 살 때 얼굴을 난도질했다. 거칠고 잔혹하지만 딸을 위해 갖은 애를 쓰며 산다는 백효성은 왜 난자를 했을까? 백효성은 아버지 일기를 환이에게 보낸 복선이를 찾아다닌 점도 알게 된다. 환이 동생 매월이를 거둔 노경 심방(제주에서 무당을 부르는 말)은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도 했다. 실종된 아이들 집 모두 노경 심방에게 큰 빚을 졌다. 노경 심방은 서현이를 마지막으로 목격하고도 환이에게 모른 척했다.
여러 고비에도 수사를 이어가다 서현이가 누구였는지 차츰 밝혀진다. ‘공녀(貢女)’ ‘명나라’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환이가 조사 도중 만난 ‘유 선비’는 서현이가 공녀로 명나라로 갔다가 탈출했다고 전했다. 서현이는 7년 전 온몸에 멍을 달고, 귀신 들린 듯한 눈빛으로 마을에 흘러들어왔다. 공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마을 사람들은 역병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현을 피했다. 서현은 누가 다가오면 “광분해서 우리 안에 괴물이 있다”고 외치곤 했다. 마을 사람 몇몇은 복수심에 찬 서현의 혼이 아이들을 훔쳐 간다고 믿었다.
서현이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은 “나는 이제 은숙이가 아니야. 은숙이는 바다 건너에서, 정조가 짓밟힌 곳에서 죽었어”였다. 은숙은 또 누구일까?
환이는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연결고리를 찾아간다. 실종 사건 인물과 무대를 하나둘씩 확인한다. 간신히 찾은 복선이는 환이에게 서현이가 죽기 이틀 전 가면 쓴 남자로부터 뒤통수를 맞고 쓰러진 뒤 한 오두막에 갇혔다고 전했다. 오두막에서 한 사내에게서 “명나라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도 했다.
명나라? 공녀? 이상했다. 조선 왕실은 공식적인 경로로 명나라에 공녀를 보냈다. 굳이 비밀리에 소녀들을 납치할 일이 없었다. 공녀 제도로 민심이 흉흉한 건 사실이다. 차출을 피하려고 쑥뜸에 불을 붙여 얼굴을 지진 여자들이 나왔다. 민제우도 딸들이 조공인 명단에 오를까 남장을 시키곤 했다. 환이는 수년 전 탐욕스러워 보이는 사내가 한 무리의 병사를 이끌고 집을 찾아온 기억도 떠올린다. 죽은 서현은 환이가 “가장 두려워한 악몽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었다.
환이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위험도 커진다. 환이는 개미 수천 마리가 보이는 듯한 환각을 일으킨다. 독극물에 중독된 것이다. 백효성의 딸 가희에게 감금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추적 도중 “수수께끼를 풀어봐. 아름다운 처녀를 빼내려면 얼마나 큰 뇌물을 바쳐야 할까”라는 말도 듣는다.
자매는 끝내 범인과 맞닥뜨린다. 매월이가 숨을 몰아쉬며 한 말은 다음과 같다. “다, 당신 같은 괴물들 때문에 여, 여, 여자로 태어난 게 저주가 되었어.” 환이는 “이기적인 야망을 추구하며 수많은 (여자의) 목숨을 희생할 남자들”을 떠올린다.
재캐나다 한인 작가 허주은은 고려 문신 이곡(1928~1351)이 1337년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에서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를 찾았다고 한다. <고려사>를 보면, 이곡은 “자주 특별 명령을 내리셔서 남의 집 딸을 빼앗는 것은 심히 옳지 못하다”고 했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며,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게 한다”는 풍문도 전했다. 딸을 숨기면 군리들이 이웃을 잡아 가두고 친족을 구속해서는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히는 점,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놓아주고는 다른 1명의 동녀(童女)를 취하려 수백 집을 뒤집는 점 등을 지적했다. 선발에 들어가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모여 밤낮 울고, (딸을 보낸 뒤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다고 전하며 “고려 사람은 홀로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고통을 받습니까”라고 따졌다.
허주은은 이 상소를 읽고 “수많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국경까지 자식의 뒤를 따라가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고 했다.
원나라 황제는 이곡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도 명나라에 공녀를 보냈다. 정식으로 바쳐지거나 사적으로 납치된 고려 여인은 2000여명이다. 조선 여인은 114명인데, 공식 기록에 나온 수치일 뿐이다. 1435년 가서야 조공은 폐지된다.
소설은 봉건 사회의 폐단을 비판하며 자매의 불화와 화해, 여성 간 연대도 녹인 역사 미스터리다. 소설가 천선란은 “<에놀라 홈즈>를 보며 느꼈던 탐정에 대한 지독한 신뢰와 애정을 댕기 머리의 조선 탐정 ‘민환이’에게서 똑같이 느끼다니”라면서 추천했다. 책은 미국도서관협회 ‘청소년을 위한 최고의 소설’ 등에 뽑혔다. 2022 화이트 파인 어워드와 에드거 앨런 포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번역가 유혜인은 몇몇 인물의 대사를 제주어로 옮겼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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