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한 독서] 세상에 ‘무력한’ 식물은 없다
김진옥·소지현 지음
다른 펴냄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잠은 벌써 깼지만 눈은 뜨고 싶지 않은,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하기가 싫어지는 계절, 겨울이다. 어릴 적 첫새벽에 일어나 연탄불을 가는 어머니를 보며 어른이 되면 날씨나 계절 따위엔 끄덕 않는 줄 알았다. 아니더라. 나이를 먹을수록 날씨와 계절에 민감해진다. 비가 오면 몸이 처지고 해가 짧아지면 마음이 먼저 어두워진다. 애면글면 살면 뭐 하나 한숨짓는데, 경고음이 들린다. 조심해, 경험이 말한다. 우울에게 한번 곁을 주면 그다음엔 손쓰기 어렵다. 가라앉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 일부러 산길을 돌아 도서관에 간다. 아직 남은 단풍들에 눈길을 주며 천천히 걷는다. 지금은 검은 활자를 읽을 때가 아니다. 노랑과 주홍, 자주와 붉음을 마음에 담을 때다. 타오르는 이 색들을 마음의 갈피에 갈무리한다. 오는 겨울의 침울에 맞설 내 고운 방패들.
어디 나만 그러겠는가. 책이 안 팔려 걱정인 제주의 책방지기는 〈야생의 위로〉를 읽으면서 우울감을 떨치고 있단다. 그의 처방이 내게도 통하길 바라며 책을 펼친다. 25년이나 우울증을 앓아온 박물학자 에마 미첼이 자연에서 얻은 위안을 소박한 그림과 함께 담담히 적었다. 머리말을 읽는데 한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인생이 한없이 힘들게 느껴지고 찐득거리는 고통의 덩어리에 두들겨 맞아 슬퍼지는 날이면, 초목이 무성한 장소와 그 안의 새 한 마리가 기분을 바꿔주고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다.”
정말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긴다. 책은 “낙엽이 땅을 덮는” 10월에서 시작해 “햇빛이 희미해지고 모든 색채가 흐려지는” 11월로 이어진다. 나는 완전한 겨울이 오기 전 “색채를 탐색”하는 미첼의 심정에 공감한다. 어둠이 길어지는 겨울 앞에서 그가 개암나무 꽃차례 같은 사소하고 미세한 지표들에 설레며 “봄은 오고야 말 것”이라고, “밤은 짧아질 것이며 내 생각들도 다시금 밝아지고 가벼워지리라”고 쓸 때, 나는 그 안간힘에 고개를 끄덕인다. 희망 없이 어찌 살겠는가? 그것이 아무리 작고 무력한 식물의 흔적일지라도.
그러나 ‘무력한’ 식물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비록 사나운 불길이나 무자비한 전기톱을 피해 달아나진 못하지만, 그래서 생명력을 잃은 무기력한 존재를 두고 식물인간이니 식물국회니 말들 하지만, 그건 식물의 강인함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식물이 얼마나 강한지는 잡초를 뽑아보면 안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 울화가 턱밑까지 치밀면 회사 마당에 나가 풀을 뽑았다. 아무리 뽑아도 풀은 늘 넘치게 많아서 분노는 이내 힘을 잃었고 나는 수굿해져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때 알았다. 식물에게는 분노를 다스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음을. 한데 식물학자 김진옥과 소지현이 쓴 〈극한 식물의 세계〉를 보니 식물에겐 이것 말고도 아주 많은 극한의 힘이 있다.
일단 식물은 4억6600만 년 전부터 생존해온 엄청나게 긴 생명력을 가진 존재다.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끽해야 600만 살에 불과한 인류는 감히 명함도 못 내민다. 식물 전체만이 아니라 개별 식물의 생명력도 놀라운데, 수령 5000년이 넘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2000년간 시들지 않는 잎새도 있다. 한자리에 붙박인 식물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어쩜 이리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비밀은 다양성이다.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크기만 봐도,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의 차이가 극과 극이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레드우드 나무는 높이 116m나 되고, 현존하는 가장 큰 생물로 알려진 거삼나무는 무게가 1121t에 달한다. 반면 가장 작은 나무인 난쟁이버들은 1~6㎝밖에 안 된다. 북극에 사는 난쟁이버들은 매서운 바람을 피해 땅에 납작 엎드려 살면서 번식에 공을 들인다. 엄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돌연변이가 많이 일어나야 하므로 줄기 번식만이 아니라 씨앗 번식까지 해서 더 멀리 다양한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다.
씨앗 번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은? 정답은 난초다. 최소 0.1㎜, 커봐야 6㎜다. 꽃이 아름다워 비싸게 팔리고 때론 산에서 파 가는 이들 탓에 수난을 겪는데, 가져온 난초가 잘사는 일은 드물다. 이유는 난초의 공생관계 때문으로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시압.
놀라운 건 이 모든 극한의 존재 방식에 –인간이 미처 알지 못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식물 중에는 자신을 지키려 독을 품은 것들이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열대우림에 사는 짐피짐피가 대표적이다. 이 나무는 닿기만 해도 고통에 못 이겨 자살한다고 해서 ‘자살식물’로 악명이 높다. 이런 방어기제는 뭇 동물의 접근을 막아 번식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예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함께 살던 동물들은 면역이 돼 있기 때문이다.
독하다고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중앙아메리카 연안에 사는 맨치닐 나무는 독성이 어찌나 강한지, 비 오는 날 그 아래 서 있으면 온몸에 수포가 생기고 자동차의 도색이 벗겨지며, 나무 타는 연기만 마셔도 후두염이 생기고 눈이 안 보일 정도다. 그래서 한때 플로리다에선 대대적인 맨치닐 제거 작업을 벌였으나 지금은 멸종위기종으로 보호하고 있다. 맨치닐이 해안 침식을 막고 여러 풍토병에 효험이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쐐기풀 역시 찔리면 통증이 며칠씩 이어지는 독풀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천연섬유로, 영양 좋은 식재료이자 항염증제로 널리 쓰였으니,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은 쐐기풀의 쓸모를 역설하며 “세상에 나쁜 식물은 없다”라고 말한다.
과연 자세히 보면 예쁘고 잘 알면 사랑스럽다. 세상에 나쁜 것은 없다. 제가 모르고 제 맘에 안 들면 무조건 나쁘다 하는 못된 심보만 빼고.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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